'너무'를 너무 사랑한 대한민국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8.10.19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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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에 관한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전화가 있다. 바로 국립국어원의 ‘가나다전화’다. 전화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 질문을 할 수 있는 ‘온라인가나다’를 비롯해서 온갖 누리소통망을 이용할 수 있다. 다음은 지난 2015년 5월 29일자 상담 내용이다.

질문: 부사 ‘너무’가 제가 알기로는 부정의 말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최근 일부 티브이 방송의 자막이나 사람들이 이 말을 쓰는 것을 보면 긍정의 뜻에도 쓰더라고요. 또 사람들이 너무를 긍정의 뜻으로 너무 많이 사용해서 이제는 긍정의 뜻으로도 쓸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사전을 찾아보면 너무가 부정의 뜻으로밖에 보이지 않던데, 어떤가요? 긍정의 뜻으로도 너무를 써도 되는 건가요?

 

‘너무’의 사용에 대한 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 같은 질문이 올라온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어떤 식의 답변이 나왔을지 궁금하다.

 

답변: ‘너무’는 “너무 크다/너무 늦다/너무 먹다/너무 어렵다/너무 위험하다/너무 조용하다”와 같이,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는 뜻을 나타내고, 그 뜻이 말해 주는 대로, ‘너무’는 용언을 부정적으로 한정하는 부사로 쓰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너무’의 뜻과 쓰임새를 고려하여, 용언을 긍정적으로 한정하는 맥락에서는 ‘너무’가 아닌, ‘참, 정말, 아주, 매우’ 등을 써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참, 정말, 아주, 매우 적절한 답변이었지만,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너무’를 너무 사랑한 대한민국이 다 알고 있듯이 불과 한 달 후인 6월 22일 ‘너무’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2015년 2분기(2105.6.22.) 표준국어대사전 정보 수정. 왼쪽은 수정 전, 오른쪽은 수정 후.

 

밑줄 친 부분을 보면 바뀐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수정 전’의 뜻풀이에는 ‘너무’가 부정적인 의미의 문장에만 사용되었지만, ‘수정 후’에는 ‘너무 좋다’, ‘너무 예쁘다’, ‘너무 반갑다’ 등이 올라 있다. ‘너무’를 너무 사랑한 대한민국 국민들 탓에 이런 일이 발생했지만, 국립국어원의 생각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인 ‘애민’과 ‘편민’(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되새기며 국민들이 일상생활에서 국어를 쉽고 편하게 쓸 수 있도록 하고 국민들에게 정제된 언어 정보를 제공함은 물론 장애인 등 소외 계층에 대한 언어 복지 혜택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 송철의 국립국어원장, ‘쉽고 편한 우리말’ 가꾸기 계획 발표(2015. 7. 9).

실제 ‘너무’를 너무 사랑한 많은 이들이 쌍수를 들어 만세삼창을 불렀다. ‘너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불편한 비판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국민이 만족했다고 해서 이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환영 쪽은 ‘너무 좋았겠지만’, 어렵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올바른 국어사용을 고수해 온 이들은 몹시 허탈했을 것이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들, 특히 ‘너무’를 긍정적인 의미의 문장에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온 국어 선생님들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여전히 효력을 잃지 않았는지, 어느 덧 3년이 지나니, 더 이상은 ‘너무’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이 글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은 짓거리나 사후약방문쯤으로 느낄 독자들이 아주 많거나 매우 많거나 몹시 많거나 참으로 많거나 정말로 많을 것이다.

반면에 ‘너무’만큼이나 사랑하는 ‘애기’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다. ‘아기’를 사랑하는 한국인들보다 ‘애기’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이 훨씬 많은데도 왜 ‘애기’는 표준말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계속 차별받아야 하는 것일까? ‘애기’ 역시 표준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니 이 점 오해 없기 바란다.

언어는 변화한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처럼 언어무상이다. 언어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변하고 죽는다. 하룻밤 사이에도 새로운 어휘가 탄생한다. 외국에서 태어나서 바다 건너 들어오는 말들이 다수지만, 한국인들 스스로 만들어내는 토종 어휘들도 적지 않다. 어휘의 뜻이 바뀌는 경우나 뜻이 추가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요즘 많이 쓰는 가능성 ‘1도 없다’와 같은 표현은 일시적인 언어유희에 그칠 가능성이 높지만, ‘가능성 전혀(조금도) 없다’는 문장에서 ‘전혀(조금도)’를 완전히 대체할 가능성도 있다.

대한민국의 사전은 석 달에 한 번 내용이 추가되거나 수정되고 있다. 사전은 보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 상식인 것에 비추어 보면 그야말로 파격적이고 역동적이다. 21세기 4차산업시대를 맞아 급변하는 국어생활에 즉각적으로 대처하기 위함이겠지만, 그래서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싱싱한 국어사전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석 달에 한 번은 바뀐 내용을 확인해야 올바른 국어생활을 할 수 있다.

오랜만에 한국방송공사에 가니 다음과 같은 벽보가 붙어 있었다. ‘이젠 둘 다 맞아요’란 제목으로 알리고 있는 것은 2017년 3분기에 바뀐 국어사전의 내용 중 발음에 관한 것이다.

 

 

‘수정 전’ 관건의 발음은 [관건]이었지만, 이제 [관껀]도 괜찮다. 교과는 [교과]였지만, 이제 [교꽈]도 괜찮다. 안간힘은 [안깐힘]이었지만, 이제 [안간힘]도 괜찮다. 효과는 [효과]였지만, 이제 [효꽈]도 괜찮다. 불법도 [불법]이었지만 이제 [불뻡]도 합법이다. 그런데 합법은 여전히 [합법]이고 [합뻡]은 불법이다.

‘합뻡’처럼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해 아쉬움은 남았지만(?), 위와 같은 ‘수정’에도 많은 사람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다 빨간 색이라고 해도 파란 색이라며 자신의 생각을 지켜 온 아나운서들은 – 포스터 안에서는 밝게 웃고 있지만 –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한국어는 과연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 것일까?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질문하면 ‘그냥 적당히 발음하세요.’라고 해야 하나? 원칙은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국어선생님들이다.

“선생님, 희로애락은 어떻게 발음해야 하나요?”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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