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인가 '여순반란'인가 '여순항쟁'인가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8.10.30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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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은 우리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다. 역사 교과서에 유달리 굵은 글씨로 쓰일 사건들이 줄을 지어 벌어졌다 우선 남과 북의 정부가 1948년 8월 15일(남), 그리고 9월 9일(북) 수립됐고, 그를 위한 총선거가 남북 공히 실시됐다. “38선을 베고 죽는 한이 있어도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면서 김구가 북한행을 택한 것도 1948년의 일이었고, 그 해 4월 3일에는 제주도에서 단독선거 반대를 외치는 좌익들이 봉기했으며 이 봉기와 관련하여 10월 19일 남해의 항구도시 여수에는 또 한 번 신생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중대 사태가 폭발한다. ‘여순 사건’이다.

요즘 특히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다양한 형태로 조명되고 있는 사건이라면 ‘여순 사건’을 들 수 있겠다. 1948년 10월 19일 14연대의 제주도 출동 명령 거부와 무장 봉기를 시작으로 전남 동부 일대에 피바람을 몰고 왔던 여순 사건은 오랫 동안 ‘여순 반란’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를 ‘여순항쟁’으로 명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잦았다. 올해 8월 27일 전남 여수·순천 등 동부 6개 지역 시민사회단체로 꾸린 ‘여순항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발족했다. 특히 다년간 지역사 연구를 해 온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는 ‘여순 사건’은 ‘여순 항쟁‘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왔다. 14연대의 봉기는 동포 학살을 의미하는 제주도 출동 명령에 대한 항거였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것이었으니 여순반란이니 사건이니 하는 명칭을 물리치고 ’항쟁‘으로 정명(正名)돼야 한다는 주장이겠다. 이름은 곧 명분이다. 이름을 정하는 것은 명분을 세우는 일이다.

 

'적절한 형벌'을 위해 공자가 역설한 정명(正名)의 중요성

정명(正名) 말이 나왔으니 그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되짚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이 단어는 ‘논어’(論語)에 등장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하면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이 정명, 즉 “반드시 이름(명분)을 바로잡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자로가 그를 바로잡아 뭘 하겠느냐고 어이없어 하자 공자는 이렇게 제자를 깨우친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하지 않고 말이 순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못하며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해지지 못하며 형벌이 적절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데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군자가 무언가를 명명(命名)하면 반드시 말할 수 있게 되고 말하면 반드시 행할 수 있게 되니 군자는 그 말에 있어서 구차함이 없느니라.” (논어 제 13편 3장)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그런데 이렇듯 정명(正名)은 유의미하고 훌륭한 작업이지만 사람이 다 군자(君子)일 수는 없고, 무엇인가를 정명하고자 할 때 그것이 바른지(正) 틀린지(誤)를 판명하기 위해서는 공자님의 말씀의 역순을 밟아야 할지도 모른다. 먼저 백성들의 손발을 둘 데가 없을만큼 갑갑한 상황에 있는지, 그 이유로 형벌이 적절하지 못하였는지, 또 그 형별의 영향으로 예악, 즉 서로에 대한 배려와 아름다운 풍습이 제대로 서지 못하였는지, 그렇게 되도록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 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일을 그르쳤던 이름과 그에 대한 말(주장)이 과연 순(順)한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순하다는 것은 온순하다는 뜻이 아니라 얼마나 조리가 있고 합리적인지를 따지는 것이리라.

이런 관점으로 1948년 여순에서 일어난 일과 그 이후를 훑어 올라가 보자. 과연 백성들은 손발을 둘 데가 없었다. 오랜 동안 역사 교과서는 온 국민에게 ‘여순반란’이라는 명칭을 주입시켰다. 즉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난 반란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후 70년 동안 여수 순천 지역과 지역민 전체에 대한 멍에가 됐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지니는가는 옛 일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소론과 남인 세력이 일으킨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뒤 대구 감영 앞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웠다. 이인좌의 난은 충청, 호남, 심지어 평안도 지역 일부까지 가세한 전국적인 반란이었고 대표자격인 이인좌조차 충청도 청주 사람이었으나 남인 세가 강했던 영남 지역의 저항이 강렬했던 바, 영남은 그대로 영조 임금에게 ‘찍혔고’, 영남 전체를 반역향으로 묘사하는 ‘평영남비’가 세워졌던 것이다. 이후 영남 사람들의 출사길은 극히 제한됐고 중앙 권력으로부터 소외됐다. 하물며 우리가 70년 동안 불러온 ‘여순반란’의 이름은 얼마나 폭력적인 이름인가.

당연히 형벌은 고르지 못하였다. ‘여순 반란’ 이외의 어떠한 명칭도 허용받지 못했고 국가의 해석 이외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치도곤을 맞기 십상이었다. 사건의 희생자조차 정확히 집계되지 않는 미스테리는 반공의 이름으로 짓눌렸고 국가가 저지른 만행은 반란의 진압 와중에 행해진 ‘부수적 피해’로 얼버무려졌다. 이러니 ‘예악’이 바로 서겠는가. 손바닥만한 지역에서 1만명이 넘을 수도 있다는 인명피해가 났는데 억울한 사정을 말할 수도 없고, 입을 열었다가는 반역자로 찍히는 나라 안에서 무슨 예악이 남아났겠는가. 그러니 일이 제대로 될 리도 없다. ‘여순반란 희생자 추모제’라면 ‘희생자’란 반란에 희생된 반란 비가담자들에 국한되며, 또 희생자를 인정한다 해도 ‘반란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오가는 말들이 어떻게 순할 수 있었으며 납득이 오갈 수 있었을까.

이제 정명(正名)이 다시금 중요해진다. 그래야 그 이름에 따른 주장과 말들이 순해지고, 이치에 맞고 공감을 산다면 그 이후의 일들이 바로잡히며 마음 속 앙금도 가라앉을 것이고 숨겨졌던 진실이 밝혀지는 가운데 희생자 모두가 손을 맞잡고 화해하여 ‘백성들이 손발을 둘 데’가 튼튼해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여기서 의문이 돋는다. 과연 ‘항쟁’이 바른 이름일까. 항쟁으로 정명하자는 분들에 대해 필자는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진압군이 여수에서 제 14연대 군인과 협력자를 색출해 옷을 벗긴 채 연행하고 있다. 이 사진은 외신기자 칼 마이던스가 촬영해 라이프지에 실렸다.

14연대 봉기 뒤 100여명 지역 공무원과 우익 학살

14연대가 제주도 출동 명령에 저항하여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명분으로 봉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주철희 박사는 이렇게 묻고 있다. “1980년 5월 대한민국 군인은 이에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출동했고 광주는 피의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반면에 1948년 10월 대한민국 군인은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잘못된 명령에 저항하고 출동을 거부했습니다. 어떤 군인이 올바른 군인입니까?” 즉 광주에 출동한 공수부대가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광주 시민 편에 섰다면 당연히 항쟁이라 불러야 하듯, 제주도에서 심각한 지경의 민간인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거부하고 일어섰다면 ‘올바른 군인’일 것이며 역시 항쟁이라 불러 마땅하다는 논리일 것이다.

그런데 14연대가 여수와 순천을 장악하면서, 그리고 그 동조 세력들이 14연대가 이르기도 전에 해당 지역에서 봉기하면서 벌어진 일들은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지 않겠다’는 군대나 그 동조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수에서만 100명이 넘는 경찰과 우익 인사들을 학살했다. 주철희 박사는 “경찰과 우익인사 죽음은 이동하는 과정의 교전에서 일어난 것으로 당시 여수경찰서장을 제외한 다른 경찰의 죽음이 학살이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조금만 찾아 보면 그런 기록은 ‘어디에나’ 있다.

 

여수경찰서장 고인수 서장은 정복차림으로 읍사무소 앞 공토에서 총으로 무장한 남학생 2명에게 검문에 끌려가 유달산 호랑이라는 서중현이란 자에게 사살됨. 특히 여수 경찰서 여경인 정현자(鄭玄子)는 폭도들이 옷을 찢고, 벗겨 목에 쇠사슬을 메어 여수 시내를 1시간동안 일주했고, 다시 경찰서로 끌고 와 총탄 두발을 쏴 죽인 잔인무도한 짓을 저질렀음. 서종현 이라는 자는 세 명의 학생을 대동하고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던 우익인사들을 향해 창살 틈으로 총격을 가해 총탄을 피하느라고 아수라장이 되어 결국 다 죽었음. 10월 20일까지 이틀 동안 여수 경찰서 안에서만 희생당한 인원만 경찰관 59명, 의용경찰 20명, 의용 소방대원 5명, 우익계인사 10명, 기독교인 7명, 경찰관 가족 40명.
<광복 30년사>, 오소백 외, 세문사, 1975

 

여수에서만 이랬다. 여수는 항구 도시로 좌익 조직이 그리 강성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였다. 지주 소작농간의 대립이 팽팽했고 좌우익 갈등도 그만큼 극심했던 순천에서는 더욱 잔인한 학살이 14연대와 그에 동조한 좌익들의 손에 의해 행해졌다. 순천경찰서장이 두 눈이 뽑히고 산 채로 화형당한 것을 필두로 여수보다 훨씬 많은 경찰과 좌익의 표적이 된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군사2부장을 지낸 심명섭은 좌익의 우익 인사 학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20일부터 22일까지 당성이나 정치성이 부족한 세포요원들이 앞장선 무분별한 살상이 있었다. 살상의 주된 표적은 공무원, 경찰과 그의 가족, 서북청년회 등이었다. 그러나 민간인 살상도 상당수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경륜이 짧고 세상이 곧 바뀌리라는 지극히 단순한 사고의 결과로 보인다. 이는 민심을 이반하고 돌아서게 함으로써 정치성의 부재에 따른 명백한 해당 행위를 한 셈이다. 당시 순천경찰서 뒤뜰에는 주검이 쌓여갔고, 곳곳에서 주검이 목격되었다.
「내가 겪은 여순사건―심명섭」,<순천시사>, 순천시사편찬위원회, 1997

후일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가 되는 이현상은 1948년 순천 현지에 도착해서 그 참상을 보고 부르짖었다. “이것은 당적 죄악이고 당적 과오다.” (<이현상 평전>, 안재성, 실천문학사, 2007) 

주철희 박사는 14연대 ‘병사위원회’의 성명 중 “모든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는 부분을 강조하지만 정작 제주도 동포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고 일어난 군대와 그 기치에 동의한 좌익들은 우익 인사들에게는 ‘동포’ 대우를 해 주지 않았다. 주철희 박사는 광주항쟁까지 들어가며 14연대의 거사를 부당한 명령에 대한 항쟁으로 강변하고 있으나 만약 광주항쟁에서 광주를 장악한 시민군들이 ‘전두환의 개’를 잡겠다고 공무원들과 경찰들을 찾아다니며 카빈총알을 퍼붓는 일이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우리가 ‘광주항쟁’이라는 말을 쉽게 쓸 수 있었을까. 그들이 ‘항쟁’을 했다면 그들의 손에 죽어간 우익 인사들은 불의의 편의 주구였고, 구축돼야 할 무리들에 불과하게 되는데 과연 ‘항쟁’이라는 정명(正名)은 가당한가? 이것이 첫 번째 질문이다.

여순사건 당시 봉기 가담자를 가려내기 위해 심사하는 모습. 칼 마이던스가 촬영해 라이프지에 실렸다.

학살된 1만여 양민은 '반란'도 '항쟁'도 하지 않았다

더하여 동포의 목숨을 해칠 수 없다고 일어선 ‘항쟁’ 세력이 또 다른 동포들의 목숨을 그리 허투루 빼앗은 것은 더 큰 비극을 불러 왔다. 진압군이 들어오자 14연대 주력은 지리산과 백운산 쪽으로 물러나 빨치산 투쟁에 돌입한다. 10월 19일 이후 여수와 순천, 그리고 전남 동부 지역에서 일어나 좌익의 우익에 대한 ‘응징’은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가공할 복수를 불러왔고 그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것은 14연대가 아니라 소수의 좌익 조직과 그보다 훨씬 수가 많은 무고한 양민들이었다. 일본도를 휘두르며 좌익 혐의자들의 목을 치고 다녔던 식인호랑이 김종원 (미군들이 부른 별명이 타이거 김이었다)을 위시하여 진압군들과 복수심에 눈이 뒤집힌 경찰들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잔인의 극치를 달렸다.

필자는 이 국가 폭력의 문제가 1948년 10월 여수 순천과 인근 지역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핵심이라고 본다. 좌익의 ‘반란’이든 인민의 ‘항쟁’이든 당시 자행됐던 이 거대한 국가 폭력의 규모 앞에서는 그 의미가 스러지고 만다. 반란이든 항쟁이든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의 손에 희생됐던 수많은 민간인들은 반란에 가담한 것도 아니었고 항쟁의 주역도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부도 1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민간인 피해자들을 ‘반란 가담자’로 규정할 수 없고, 여순 ‘항쟁’을 주장하는 이들 역시 그 막대한 희생자들을 ‘항쟁의 희생자’로 치부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양민이었다. 보통 사람들이었다. 투철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지도 않았고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도 그저 그랬던, 누군가 총칼을 들이밀면 태극기든 인공기든 양손에 쥐고 김일성 만세와 이승만 만세를 번갈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희생 앞에서 과연 ‘항쟁’으로의 정명이 가능하겠는가. 그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들이 ‘항쟁’에 가담하거나 심정적으로 동조한 끝에 희생됐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이는 그들의 희생의 실체를 왜곡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더하여 앞서 언급한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봉기에 대한 비판을 여러 번 했던 것처럼, 14연대의 거사는 준비되지도 않고 계획되지도 않은, 그리고 사후 전망에 대한 분석과 예측은 전혀 없이 일어났다. 그들의 제주도 출병 거부 명분을 십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같은 편이었던 장교들마저 분간하지 못한 채 살해해 버리고 점령 과정에서의 질서도 수습하지 못했고, 정작 진압군이 들이닥치자 자신들을 지지했던 이들과 알몸뚱이의 ‘인민’들을 진압군의 복수에 고스란히 노출시킨 채 산으로 들어가 버렸던 그들의 거사를 그 명분만으로 ‘항쟁’으로 정명하는 것이 과연 ‘순(順)한 일일까.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다.

 

'항쟁' 정명은 과거 반성보다는 이념 갈등을 낳는다

여순 사건 이후 대한민국은 크나큰 변화를 맞는다. 사회 곳곳에 온존하고 있던 좌익 조직은 철퇴를 맞았다. 피가 피를 부르는 복수의 악순환 속에 좌익은 남한 내에서 설 자리를 잃어 갔다. 군대 내에 암약하던 좌익 세력들은 김창룡 이하 공산주의자 사냥에 몰입하다 못해 미쳐 버렸던 이들의 파상공세에 몰락했다. 남로당 군 총책 박정희 소령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들이 총살대에 서거나 감옥에 가거나 군문에서 쫓겨났다. 국가의 최고 무력인 군대가 일으킨 반란에 직면한 국가는 ‘국가보안법’처럼, 법 정신을 짓밟는 악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고 이 흉물스런 법은 여지껏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일어난 전면전은 여순 ‘반란’의 그릇된 이름을 뿌리 깊이 정착시켰고 1948년 여수, 순천 등지에서 자행된 국가 폭력과 국가적 범죄라는 괴물은 반공의 기치 속에서 철저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은폐됐다.

남과 북간에도 전쟁의 그림자를 걷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려는 시도가 무르익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해방 공간과 전면전, 그리고 이후의 냉전에 이르기까지의 과거를 반성하는 일이다. 무한대립과 극한투쟁의 와중에 우리가 스스로 저버렸던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 이념을 위해서라면,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면 사람 목숨 따위는 그다지 안중에 없었던 남과 북 모두의 과거를 돌아보고, 70년 동안 국가 폭력에 희생되고 그 억울함마저 짓밟혔던 이들을 신원시키고, 그들의 희생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함이 시급하다는 뜻이다. 그 시절 어느 이념이 옳았고 글렀고를 따지는 것은 여러 참 뒤의 문제이며, 그나마도 무의미하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역사를 선과 악, 정의와 불의로 나누어 비분강개하고자 함이 아니며 “ 주어진 정보 내에서 과거의 사례를 폭넓게 생각하고 가장 적절한 사례를 찾아본 다음 역사의 교훈을 올바르게 적용”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가토 요코, 서해문집)하기 위해서다. 과연 이 시대에 필요한 ‘적절한 사례’는 무엇이고 우리가 지양해야 할 ‘부적절한 사례’는 무엇일까. 그를 판단하는데 ‘항쟁’이라는 정명이 과연 도움이 될까. 이것이 세 번째 질문이다.

여순사건 진압작전 모습. 미 임시군사고문단 소속 장교는 현지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반란'과 '항쟁'을 넘어...역지사지와 치유 노력 필요

올해 10월 19일에 있었던 여순사건 70주기 희생자 합동 추념식에서 일어난 파행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추념식 집행위원장이 “최초로 희생된 경찰들”을 언급하며 예의 여순 ‘반란’ 표현을 했고 이에 항의하는 이들로 행사에 소란이 일었던 것이다. 이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정명이 과연 ‘항쟁’일까. 항의하는 이들의 주장은 “네 가족이 죽었는데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였다. 이는 항쟁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하고 잔인했던 국가폭력에 대한 항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화해의 시작은 양 갈등 세력이 공유하는 지점, 즉 교집합을 찾는 것이고 둘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최대공약수’를 모으는 일이다. 시점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한쪽을 ‘항쟁’이라고 정명하는 것은 또 다른 분쟁의 불씨가 되고 갈라치기의 담장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자신의 가족’이 의로운 ‘항쟁’에 맞서다가 죽어간 이로 치부된다면 그를 수긍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왜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위로할 수 있는 기회를 ‘항쟁’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할까.

여순 사건의 재조명에 필요한 것은 누가 옳았고 글렀고의 시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행한 과오를 인정하고, 결코 그 악몽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결의일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그 정의를 위해서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고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피해를 입어도 무방하다는 70년 묵은 생각들은 이제 고이 접어 일흔 길 땅 속에 묻어 버려도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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