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착취 '그림자 노동'은 사라질 것인가

  • 기자명 박재용
  • 기사승인 2018.11.0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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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뭔가 얻을 것이 있을까 싶어, 아니면 그냥 호기심에 이 책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서가에서 이 책을 뽑고 앉아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이 책을 읽고 있는데, 그 과정은 온전히 당신이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당신의 뇌 한 가운데는 당신도 모르게 일을 하는 곳이 있습니다. 뇌간이라고 부르는 영역이죠. 대뇌의 아래, 연수와 간뇌 그리고 중간뇌(중뇌)로 이루어진 부분입니다. 당신이 쉴 때도 당신의 몸은 생명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심장 근육은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고, 갈비뼈와 가로막이 움직여 호흡을 해야 하지요. 뼈 안에 있는 조혈세포는 혈구를 만들고, 신장은 피를 걸러 오줌을 만듭니다.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에선 세포호흡을 통해 체온을 유지하고, 간장은 유독성 물질을 걸러내며, 소장과 대장은 꿈틀 운동을 하며, 소화액을 분비해서 음식물을 소화합니다. 부신과 이자, 그리고 정소와 난소에선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이 모든 걸 적절히 조절하는 일을 연수와 간뇌가 합니다. 그래서 잠을 잘 때도 편히 쉴 때도 이 뇌간(뇌줄기ㆍbrainstem)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

출처: HB시골박사의 SFBT 블로그

그래서 사망의 정의도 심장 박동의 중지가 아니라 뇌간의 활동 중지로 바뀌었습니다. 대뇌가 멈추면 식물인간이지만 살아있는 것이고, 뇌간이 멈추면 영원히 죽는 것이죠. 뇌사라고 합니다. 당신은 아마 당신의 대뇌이고 싶을 것입니다. 생각하고, 느끼고, 분노하고, 움직이는 모든 당신의 의지와 감정이 당신의 대뇌에 있죠. 그래서 당신이 느끼는 정체성은 대뇌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제대로 하라고, 대뇌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알리지 않고 24시간 계속 일하는 뇌간이 있습니다. 뇌간이 하는 일의 핵심은 ‘유지’입니다. 당신이 별 탈 없이 일상을 살 수 있게끔, 혹은 당신이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일을 하게끔, 당신이 추운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 때도 얼지 않게끔 하는 ‘당신 몸의 유지’가 뇌간이 하는 일입니다.

 

원래 세상이 그렇습니다. 놔두면 어질러집니다. 흔히 말하듯이 우주를 지배하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그렇습니다. 우주는 항상 무질서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는 곳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률적으로 분명히 어질러집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집에서 나와 일을 하고, 다시 집에 들어갔을 때 집이 그대로라면, 그건 누군가가 청소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옷장을 열었을 때 입을 만한 옷이 언제나 정갈하게 걸려있으면 누군가가 세탁을 하고, 말리고, 정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냉장고 홈바를 열었을 때 언제나 차가운 음료가 준비되어 있고, 냉장고를 열면 어느 때고 먹을 반찬이 제자리에 놓여있다면, 누군가가 음료를 끓여 식혀선 홈바에 넣고, 반찬거리를 사서 다듬고, 조리해서,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상황은 누군가의 노동으로 유지됩니다. 그 누군가가 없으면, 집에는 먼지가 쌓이고, 옷은 세탁기 안에서 썩고, 냉장고 안의 음식은 줄어듭니다. 이때 누군가의 일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작업이 아니죠.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만족을 주는 것도 웬만해선 아닙니다. 그러나 엄연히 이건 노동입니다. 우주의 법칙인 무질서로의 흐름을 역행하려면 누군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뇌간이 하는 일처럼 유지하는 것이 주된 임무인 일이 우리 사이에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사회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1981년 처음 발표한 '그림자' 노동' 개념은 보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반드시 해야하는 일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예가 여성들이 집에서 하는 가사노동이다.

이런 일을 그림자노동이라고 합니다. 꼭 필요한 일이나 그 대가를 충분히 받지 못하는 일이며, ‘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입니다. 가정에서의 그림자노동은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 여자의 몫이었습니다. 아내가 중심에 있었고, 딸과 어머니가 대를 이어가며 했습니다. 어려서는 아버지와 오빠 동생의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했으며, 커서는 남편의 밥을 차리고 집안 청소를 하고, 늙어서는 아들의 밥을 차리고 와이셔츠를 다리는 식이었습니다. 그 사이 남자는 ‘바깥 일’을 하고, 창조를 하고, 혁신을 한다고들 유세를 떱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사회에 헌신한다고 폼을 잡습니다. 마치 남자가 그런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뇌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여자의 몫이라고 가르쳤고 지금도 일부 가르치려 합니다.

그런데 이제 세상이 바뀌어 여자도 대뇌처럼 일을 해야 합니다. 원래 당연히 그랬어야 하는 일입니다. 이제 바로 잡힌 거죠. 하지만 여전히 많은 그림자노동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여성의 몫입니다. 아이들 학교와 학원을 챙기는 것도, 집안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세탁이며 청소며 고된 집안 노동의 대부분은 여성의 몫이고, 남성은 거들 뿐입니다. 이중의 노동은 당연히 힘듭니다. 더구나 이 사회는 정부와 사회, 그리고 기업의 몫이 되어야할 일들조차 가정에 미루고, 가정은 여자에게 미루죠. 사회와 기업조차 여성의 그림자노동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사람의 뇌는 영역이 나누어져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만 대뇌가 되고 다른 누구는 연수가 되고, 간뇌가 될 순 없습니다. 우리가 대뇌와 소뇌, 뇌간을 모두 가진 것처럼 우리의 노동도 모두를 같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래 사회와 기업의 몫이었어야 할 일을 사회에, 기업에 요구해야합니다. 남자가 대뇌처럼만 일하기를 고집한다면 마침내 뇌간이 아님을 이미 깨닫고 참고 있던 이들의 파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대뇌가 아니라 뇌 전체입니다.

흔히 세상 좋아졌다는 말은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 남이 하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전에는 허리 한 번 못 피고 살았는데 이제 싱크대며 가스레인지가 있어 얼마나 좋아졌냐. 예전엔 냉장고나 세탁기는 상상도 못했다. 진공청소기가 있는데 청소가 뭐 그리 어려워.“ 등등. 만약 가정용 로봇이 이 모든 일을 대신하는 사회가 되면, 4차 산업혁명이 이루어지면 이런 그림자 노동은 사라질까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페미니즘 운동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꾸준히 문제제기를 하고, 변화시키고 있지만, 수천 년을 쌓아온 기득권의 저항은 여전합니다. 집안 일이 쉬워졌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그것이 여성이 가정의 그림자노동을 거의 전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덮어버려선 안될 것입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좋아지고 가정용 로봇이 들어와도 그걸 운영하는 노동이 여전히 여성이어선 제대로 된 혁명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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