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과학이 '과학'이 아니듯, 유사역사학은 '역사학'이 아니다

  • 기자명 이문영
  • 기사승인 2018.11.0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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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은 영어 pseudohistory의 번역어다. 우리의 근대 학문이 다 그렇듯이 이러한 개념들은 서구에서 발전한 것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슈도히스토리’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유사역사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유사역사학이라는 말이 일제강점기의 유사종교라는 말에서 나왔다느니 하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트집잡기에 불과하다. 유사라는 말을 분석하려고 하는 것이나, 이 말에 역사학이라는 말이 붙어있다고 불편하다는 지적 역시 무의미한 이야기가 된다. pseudohistory는 사이비역사학이나 의사역사학으로 번역할 수 있다. 역시 이 경우에도 사이비라는 말의 어원을 따져가며 분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원래 그런 말에서 유래되어 사용되어온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사역사학 또는 사이비역사학에 대한 흔한 오해가 하나 있다. 유사역사학이 있으니 진짜 역사학이 있느냐,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역사학이냐고 묻는 것이다. 가짜가 있으면 진짜가 있다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의문이다. 이 질문 다음에 역사에 진짜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역사는 해석에 따른 재구성이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만의 재구성이 진짜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짜가 없는데 가짜는 있겠느냐고 말하게 된다. 사실 이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 등장하면서 역사학이 수없이 논의하는 화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학 안에서 논의되는 개념에다가 유사역사학을 집어넣어서 이야기하는 순간 잘못되어 버린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증산도에서 운영하는 STB 상생방송은 <환단고기>를 지속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pseudoscience라는 말이 있다. 유사과학 또는 사이비과학이라고 번역한다. 흔히 쓰이는 단어이고 이 말에 대해서 유사과학이 있으면 진짜 과학이 따로 있는 거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유사과학에 ‘학’이라는 말이 붙어 있으니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일이다. 눈사람이 사람이 아니고, 꼭두사람이 사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유사역사학은 역사학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역사학처럼 보이게 치장되어 있으나 역사학과는 다른 것이다. 유사역사학이 역사학의 일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인형에도 눈코입이 있고 팔다리가 있으니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의 이야기이고 암세포도 생명이라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의문이 생길 때가 됐다. 그럼 유사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유사역사학이라는 말은 근대에 생긴 말이다. 최초로 문헌에 사용된 것은 1815년 영국의 군인이자 저술가였던 찰스 A. 엘튼이 쓴 책 <‘헤라클레스의 방패’를 포함하여 아스크라인 헤시오도스가 남긴 것들: 헤시오도스의 삶과 지역, 시와 신화에 대한 논문으로 보는>(아래 사진)이었다. 이 책은 인터넷 아카이브로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최초로 사용된 pseudohistory는 ‘가짜 역사’, ‘조작된 역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유사역사학이라는 말과는 차이가 있다. 엘튼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조사하면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경연에 대한 전승이 가짜 역사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고대의 전승에도 물론 날조되거나 오해와 무지로 인해 왜곡된 가짜 역사들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전근대의 전승에 대해서 유사역사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유사역사학이라는 말 자체가 근대에 생겨난 것처럼 이 용어는 근대 이전에는 적용할 필요가 없다.

본래 역사학 자체가 옛 기록으로부터 찾아낸 것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해나가는 작업이다. 따라서 고대 기록이 왜곡되거나 잘못된 것은 밝혀내면 된다. 옛 기록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것이 잘못 된 것이라 해도 그 시대에 왜 그런 잘못된 기록을 남겼는가를 추적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사료라고 하는 것들은 고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대의 의미를 가지고 추적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그것들이 만들어진 시대에 왜 이런 것을 날조했는가를 추적할 때 의미를 지니게 된다. <환단고기>는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서 위조된 책이다. 따라서 왜 그 시기에 이런 책을 위조했는가를 추적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이 책을 기초로 고대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 된다. <사이비역사의 탄생>을 쓴 로널드 프리츠 교수는 “사이비역사와 사이비과학은 근대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게 된 것일까? 다양한 이유가 있고 다양한 결과물들이 있다. 모든 유사역사학의 현상을 하나하나 짚어가는 것은 너무나 방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현상 - 민족국가와 관련된 부분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민족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구성원들이 집결해야 하는 구심점이 필요해졌다. 이 때문에 위대한 과거가 창조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전세계적인 것이었다. 나치 독일은 위대한 아리안족을 찾아 중앙아시아를 탐험했다. 러시아도 위대한 슬라브 민족의 과거를 찾아 위조 경전을 만들어냈다. 아시아 계통에서는 중앙아시아의 투란이라는 환상적인 존재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고자하는 투라니즘이 발생했고 터키와 일본, 그리고 식민지 조선도 이 영향을 받았다.

유사역사가들은 위대한 조상을 창조해서 민족의 구심점을 만들어내고 싶어했다. 일부는 고대 사서의 모호한 구절을 과대해석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나 더 대담한 이들은 날조된 역사책을 만들어냈다. <환단고기>가 가장 유명하지만 이 책 하나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환단고기> 이전에 이미 <규원사화><단기고사>와 같은 책이 만들어졌고, 70년대에 여러 사람들이 <환단고기>에 필적할 괴서들을 만들었다. 다만 <환단고기>가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큼 유명해졌을 뿐이다.

<환단고기> 내용을 재구성한 그림. 역사적 증거가 없이 한민족이 전 세계의 기원이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유사역사가들은 스스로를 재야사학자, 또는 민족사학자, 또는 애국사학자라고 부르면서 역사학자들을 식민사학자, 이적사가, 용공사가, 매국사가, 친일파라고 불러왔다. 요즘은 조선총독부사관이라는 말까지 쓰고 있다. 이런 인식은 1960년대에 등장해서 1970년대에 확산되었다. 50년 동안 역사학계를 매도해온 집단이 바로 이들이다. 이런 이분법 프레임은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고 상대를 악마화함으로써 자신들 편을 만들어내는데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이처럼 역사학자들을 악마화해내는 방법은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의 독특한 방법이다.

과거 유사역사학에서는 역사학자를 강단사학자라 부르고(이 용어는 원래 유사역사학이 자신들을 대학 밖에 있는 재야라 칭하면서 이분법으로 사용한 것이다) 식민사관을 추종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역사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심지어는 대학 강단에 서면서 유사역사학의 논리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유사역사학 쪽에서도 강단사학자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추세로 변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 역사학계의 우려가 있다.

유사역사학이라는 낙인찍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역사’라는 것이 대체 어떻게 정의되는가라는 문제와 맥을 같이 한다. 누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유사역사학이라고 불러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라는 우려를 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금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돌이 있어서 그것을 시금석이라 부른다. 유사역사학도 마찬가지다. 로널드 프리츠는 유사역사학은 역사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다. 그럼 역사학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사료를 비판하고 증거를 통한 합리적인 추론을 해나가는 것이다. 유사역사학에서는 사료 비판을 하지 않는다. 증거 없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시대와 공간을 취사선택해서 논리를 구성한다. 그리고 기존 학설을 식민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비난한다.

<환단고기>를 취신하는 사람이라면 유사역사학 추종자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환단고기>만이 시금석의 전부는 아니다. 역사학자들을 뭉뚱그려서 식민사학자라 부른다면 유사역사학 추종자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말은 인신공격일 뿐이지 그 어떤 학문적 가치도 담고 있지 않다. 중국과 일본을 증오하게 만드는 것만을 주장한다면 유사역사학 추종자로 보아도 무방하다. 한민족이 고대 아시아를 지배했고 중국과 일본은 모두 한민족의 방계혈족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본다면 유사역사학의 글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기존의 역사학 성과를 조작된 것이라 이야기하고 기존의 사서들을 일제가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를 본다면 유사역사학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일제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나라였다면 2차대전에서 패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사역사학은 아니지만, 유사역사학이 역사학계를 어떻게 괴롭히고 어떤 식의 논리를 갖는지 알고 싶다면 영화 <나는 부정한다>를 보기 바란다. 네이버에서 1000원에 볼 수 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에게 명예훼손 혐의를 받은 역사학자가 어떻게 재판을 진행했는가를 보여주는 실화 영화이다.

 

역사학과 유사역사학이라는 두 대립항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의 반대말이 유사역사학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학 안에는 다양한 논의가 있고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무수한 노력이 존재한다. 역사는 지나가버린 과거의 흔적이며 그것을 누구도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단 하나의 진실로 모든 사람의 사고를 획일화시키고자 했던 것이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국정교과서였다. 유사역사학에서 주장하는 위대한 고대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에게는 이미 정해진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서 위배되는 것은 배척해야 한다. 진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목표에 위배된다면 그것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이들은 한다. 역사학이 민족과 국가에 유용한 도구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며 심지어 유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은 인간이 살아온 과거를 살피면서 삶에 대한 성찰을 가져오는 학문이지 다른 국가와 민족의 우위에 서서 지배하고자 하는 학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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