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먹어 기억 안나"...'주취감형'은 법원에서 얼마나 인정되나

  • 기자명 송영훈 기자
  • 기사승인 2018.11.0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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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취감형’ 팩트와 오해, 그리고 해외사례

범죄자의 단골 레퍼토리가 또 나왔다. “술 취해서 기억 안 난다.” ‘서울 서대문구 경비원 폭행사건’, ‘경남 거제 폭행 살인 사건’ 등 피의자들은 “만취상태여서 전혀 기억이 없다”고 주장해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만취 상태로 범행을 저지른 피의자를 심신미약을 이유로 감형해주는 소위 ‘주취 감형’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커지고 있어 주취감형 인정 현황과 해외사례를 파악했다.

 

술먹고 심신미약 인정되면 감형...조두순 '주취감형'으로 분노 폭발

'주취감형'의 근거는 심신미약이다. ‘심신미약’은 심신장애의 하나로 심신 상실보다는 정도가 가벼우나, 정신 기능이 쇠약하여 시비를 가리고 그 변별에 의해 행동하는 능력이 상당히 감퇴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심신미약 감경은 형법 제10조 2항에 근거한다. 형법 10조 2항은 ‘심신장애로 인하여 전항의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심신장애는 정신기능에 장애가 있는 상태로, 실정법상으로는 심신상실(형법 제10조 1항, 민법 제12조)과 심신미약(형법 제10조 2항) 또는 심신박약(민법 제9조)으로 나누어져 있다.

‘심신미약’은 의학용어가 아닌 법률용어로 심신미약의 판단은 여러 정황과 증언, 의학적 감정과 소견을 통해 범죄 당시 판단력과 의사 결정능력이 없었는지를 판사가 결정한다. 판사들은 심신미약을 판단할 때 정신과 전문의 등 전문가의 감정 의견을 기초로 하지만 최종 결정은 스스로의 법률적 판단으로 내린다. 전문가들의 감정뿐만 아니라 범행의 계획성, 범행 이후의 과정 등도 고려대상이 된다. 보통 지적장애, 조현병, 음주나 마약 등의 약물복용 상태 정도가 심신미약으로 인정받아 왔다.

법으로 ‘형을 감경할 수 있다’가 아닌 ‘형을 감경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강행규정) 심신미약이 확인되면 형법 55조에 따라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선고할 수 없고, 해당 범죄의 법정형을 1/2 감경한 범위 내에서 선고해야 한다. 즉 심신미약이 인정되면 범죄의 경중과 관계없이 의무적으로 형량이 줄게 된다. 

심신미약 감형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부른 대표적인 사례로는 2008년 8세 아동을 잔혹하게 성폭행한 조두순이 꼽힌다. 조두순은 만취 상태였다는 이유로 심신 미약이 인정돼 1심 징역 15년에서 2심 12년형으로 감형됐다. 조두순 판결 이후 주취감경 논란이 불거지자 국회는 2012년 성폭행의 사건의 경우 형 감경을 의무로 두지 않는 법을 통과시켰다. '성폭력특례법 20조'는 음주 또는 약물론 인한 심산장애 상태에서 성폭력범죄를 범한 때에는 심신미약과 심신상실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임의규정) 있다. 

 

‘주취감형’ 적용 사례 많지 않지만 폐지여부 논란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의 경우는 논란이 더 크다. 정신질환의 경우 정신과 의사의 의학적 감정이라는 과학적 장치가 있지만 음주범죄는 음주측정 없이 피의자의 주장과 주변인들의 증언으로만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앞서 조두순 사건이나 리벤지포르노 유포 사건 등 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 때문에 여론의 주목도가 높았던데 비해 실제로 음주에 의한 심신미약을 인정받은 사례는 많지 않다. 지난 3월 발표된 <정신장애 범죄자에 대한 법원의 책임능력 판단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법언에서 심신장애가 쟁점이 된 사건은 1597건. 이 중 1심 재판부가 심신장애로 인정한 사례는 305건으로 19%였다. 305건 중 알코올 의존증을 인정받아 소위 '주취감형'을 받은 사례는 22건으로 전체 7.2%였다. 심신장애 사유 중 1위는 조현병(소위 정신분열증) 등 정신질환이 209건(68.5%)로 가장 많았다. 판례로 보자면 법원에서 '주취감형'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일부에서 주장하는 주취감경 폐지나 주취가중처벌 도입은 논란이 있다. 범죄의 기본 전제는 ‘고의성’인데, 음주운전 사고나 만취로 변별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의 범죄에 대해 고의성을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 ‘책임이 없으면 형벌도 없다’는 형법의 기본 원칙인 ‘책임주의’에 반하게 된다. 형법은 형벌을 부과함에 있어 책임주의 원칙을 따른다. 범죄에 책임이 있어야 형벌을 부과할 수 있고 형량도 결정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14세 되지 아니한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는 형법 제9조나 19세 미만에게 소년법을 적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형법 10조 3항은 범죄 가능성을 예견하고도 자의로 본인을 심신미약에 빠뜨린 경우 감경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무분별한 주취감경을 제한하기 위한 법 조항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추가적인 입법을 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OBS 방송화면 캡처

 

해외에서는 스스로 취했을 때 주취감형 적용 안해

하지만 주취감경은 국제적으로 보편적인 제도는 아니다. 일본이 한국과 비슷한 법 조항을 가지고 있는 반면, 미국과 영국은 주취가 감형의 사유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이 확고하다. 특히 미국은 모범형법전에 ‘만취 상태를 자초했을 경우엔 항변이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독일은 본인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자제력을 잃고 범행을 저지른 경우 이를 처벌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음주 또는 마약 복용 후에 일어나는 범죄 중 폭행과 성범죄 등에 있어서는 형을 가중한다. 중국도 주취감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 형법 18조 4항은 “주취자가 죄를 범한 경우라도 마땅히 형사책임을 져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독일 형법학계의 거장인 군나르 두트게 괴팅겐대 교수는 지난 10월 26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독일 형법상으로는 술을 마신 후 범죄 행위를 하면, 술을 마신 행위가 이후 행위에 영향을 미쳐 과실 범죄로 인정되기에 피고인이 형사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음주는 심신미약으로 인한 책임 무능력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책임을 인정하는 근거가 된다. 만에 하나 책임능력이 없는 만취상태가 인정되더라도, 만취에 따른 별도 처벌 조항으로 최고 징역 5년까지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주요 국가에서 주취 감경을 인정하지 않거나, 도리어 가중처벌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많다.

 

감형 사례 적어도 잘못된 인식으로 범죄 유발 우려

결과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음주운전 사고도 큰 문제다. 음주운전의 경우 음주운전 자체를 징벌하면서 음주운전에 의한 사고에 대해서는 종합보험 가입, 공탁금, 반성 등의 요인으로 감경이 인정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음주운전으로 사망사고를 내도 현행법상으로 최대 징역 3년까지만 가능하다.

형법 10조 3항은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에는 전2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술에 취했는데도 운전대를 잡는 것 자체가 이미 불법이고 사전에 음주 후 운전상황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면 운전을 하면서 사고를 낼 수 있다는 위험을 예견했다고 볼 수 있다.

정신질환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음주는 거의 대부분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감형사례가 적다고 하더라도 ‘술을 먹으면 감형된다’는 인식은 오히려 범죄를 유발할 수 있다. 부정적 여론이 높아지자 검찰도 지난 1월 1일 음주 상태에서의 살인죄는 심신미약에 따른 감경 구형을 하지 않기로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살인범죄 처리기준 합리화 방안’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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