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과 예술' 공예(craft)는 어느 길로 가야 하나

  • 기자명 김신
  • 기사승인 2018.12.0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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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의 디자인 팩트체크] 생활공예와 예술공예 발전사

지난 주말에 코엑스에서 하는 공예트렌드페어를 보러 갔다. 이 행사는 공예 스튜디오나 공방에서 참여해 자신들이 만든 공예품을 판매한다. 전시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전시 관람이 어려울 정도로 부스마다 사람들로 꽉 찼다. 드넓은 코엑스 전시장을 매운 만큼 도자, 나무, 금속, 가죽, 섬유 등 재료별로 다양한 공예품들이 출품되었다. 나는 괜찮은 물건이 있으면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구경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타나면 가격을 확인해보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가격대의 물건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그릇이 있어서 확인해보면 나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할 가격이 많았다. 새 지갑이 필요해서 보면 적당한 가격은 디자인이나 마감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고, 괜찮다 싶어서 보면 10만 원이 훌쩍 넘었다. 결국 단 하나도 사지 못하고 눈요기만 하고 전시장을 빠져 나왔다.

 

내가 사회에 첫 발을 디딘 곳은 월간 <미술공예Arts and Crafts>라는 공예 전문 잡지였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이다. 당시 이 잡지가 늘 고민했던 것은 ‘생활 공예’의 정착이었다. 거의 다달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던 거 같다. 그러다가 이 잡지는 적자로 인해 폐간되어 나는 자매지인 월간 <디자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생활 공예’에 대한 고민이 사라졌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늘 생활 속의 사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번 전시회를 보면서 다시 한번 그 ‘생활 공예’라는 문제를 아주 오랜만에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먼저 폐간된 잡지 ‘미술공예’(한국어로는 미술 또는 예술로 번역되지만 영어에서는 모두 아트art다)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 말은 영어로 ‘아트art’와 ‘크래프트craft’라는 단어가 결합된 것이다. 아트와 크래프트는 사실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순수 예술fine art’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18세기 무렵부터 아트는 실용성을 떠난 순수한 미의 세계를 탐닉하는 것이 되었다. 고대 이래로 아트는 현대적인 의미의 예술보다는 실용적인 무엇인가를 만드는 ‘뛰어난 기술’이라는 개념에 더 가까웠다. 어느 순간부터 아트는 생활로부터 멀어져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즐거움, 순수한 미적 쾌감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실용적인 물건 만들기는 누가 맡는가? 바로 공예다. 따라서 공예는 순수 예술의 등장으로 더욱 더 예술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이와 동시에 서열이 생겼다. 쓸모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은 실용적인 물건을 만드는 공예보다 자신의 지위가 높다고 여긴다.

윌리엄 모리스는 '모리스 상회'라는 생활용품 생산 회사를 설립하고 예술공예운동을 펼쳤다.

 

그런데 이렇게 상반되는 개념의 말들이 어떻게 결합되었을까? ‘예술공예’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영국에서 윌리엄 모리스가 ‘예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을 일으키면서부터다. 윌리엄 모리스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공장의 기계가 값은 싸지만 미적으로 천박한 물건들을 대량 생산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그리하여 산업혁명 이전의 수공예 시대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한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서 예술의 개념은 순수 예술이 등장하기 전, 즉 모든 예술이 집과 그 안에 들어갈 실용적 물건을 제작하던 그 중세의 예술 개념을 가져온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예술공예’라는 말은 대비되는 단어의 결합이 아니다. 실용적인 생활 용품을 최고의 기술력(예술)으로 만들어내 그것을 여러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아주 좋은 뜻을 가지고 ‘예술공예’라는 말을 쓴 것이다.

 

도자기 예술가 피터 불코스가 만든 도자 오브제는 20세기 미술공예품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공예품이라기보다 도자기에 가깝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태어났다. 디자인은 공장에서 기계로 생산되는 저렴하고 실용적인 물건들의 외관을 창조하는 일을 맡았다. 공예는 디자인보다 싸게 물건을 만들 수가 없다. 손으로 정성을 다해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0세기 공예는 새롭게 자신의 길을 찾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예술공예’의 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윌리엄 모리스가 꿈꿨던 실용적인 기술로서의 예술공예가 아니다. 오히려 순수한 미적 즐거움의 길을 찾는 개념으로서의 예술공예에 가깝다. 그리하여 야심에 찬 20세기의 공예가들은 자신이 만드는 물건을 공예품이라기보다 ‘작품’의 반열에 올리고 싶었고, 그것을 미술관에서 전시하기를 갈망했다. 그것은 윌리엄 모리스가 추구했던 생활공예의 모습이 아니었다. 작품으로 대접 받는 공예품은 그 무엇보다 가격에서 대중이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20세기 공예의 비극이다. 실용적인 물건을 만들지만 작가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으려는 태도는 순수 미술과 디자인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낳는다.

 

물론 작가의 길을 가서 문화계의 인정을 받고 높은 가격에 팔리고 미술관에 컬렉션되는 공예품도 존재해야 한다. 나는 그런 뛰어난 공예가들을 많이 알고 있고 그들을 존경하기도 한다. 하지만 집에서 쓸 수 있는 적당한 가격의 그릇을 만드는 공예가도 필요하다. 그런 공예가의 숫자는 훨씬 더 많아야 한다. 또한 그 공예품은 튼튼하면서도 미적으로 추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공예의 본질인 실용의 아름다움이다. 모든 공예가가 작가의 길을 가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미술공예의 가치를 획득하려고 할 때 공예는 생활로부터 멀어지고 고립되고 만다. 그것은 마치 과거, 생활 속에서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뛰어난 기술이었던 예술이 순수의 길로 가버린 것과 비슷한 과정의 길을 걷는 것이다. 나는 이번 공예 트렌드 비엔날레의 특별 부스에서 바로 그런 미술공예를 더 높이 평가하는 태도를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여전히 생활공예, 튼튼하고 추하지 않고 합리적인 가격대의 공예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나로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름 없는 공예수가 만든 막사발은 평범하지만 튼튼하고 아름답다.

첨단 디지털 시대인 21세기에 공예는 오히려 각광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날로그한 공예의 감성을 사람들이 그리워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경제적 여유를 가진 소수의 사람이라면 불공평하지 않은가? 서양이든 동양이든 과거 공예가들은 똑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수도 없이 하면서 기술이 완벽의 경지에 이를 뿐만 아니라 물건을 만드는 속도를 높여서 비록 손으로 만들더라도 가격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든 공예품은 아름다움을 잃지도 않았다. 작가의 길을 가는 공예가들만큼이나 이런 평범함(그러나 그것은 비범할 수도 있다) 길을 가는 공예가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 길을 장려할 때 진정한 의미의 생활공예가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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