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식 기고] 뉴스톱 기사에 대한 반박
십여 년 전 인천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한 사업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 공장은 필리핀 불법체류자를 선호해. 월급 조금만 줘도 되고 막 부려먹어도 찍소리 못한단 말이지. 도망도 못 친다니까.” 공장장이 필리핀 노동자를 선호했던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들은 값싼 임금으로 큰 돈을 벌게 해줬으니까. 아프리카를 방문한 노예상들도 ‘백인은 흑인을 선호해’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노예 무역 시대의 백인 농장주들은 진심으로 흑인 노예를 선호했으니까.
그 공장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들은 악덕 사장을 진심으로 좋아할지 모른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푼돈이나마 쥐어준 월급으로 고국의 가족들을 부양하게 해줬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한다 한들 공장주의 착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3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베트남 경제부총리와의 접견 자리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한국에 있는 남자하고 결혼하는 베트남 여성들이 아주 많은데, 다른 나라 여성들보다도 베트남 여성들을 제일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 대표의 발언이 보도되자 각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비판 성명을 냈다. 뉴스톱은 이 비판에 대한 이광수 교수의 반박 기사를 게재했다. 이 교수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국립국어원의 정의를 빌려왔다.
이 교수의 해석처럼 이해찬 대표의 말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말’일까. 그렇지 않다. 진공상태의 말이란 오로지 사전 속에서만 존재한다. 군인 전두환은 민주주의보다 총을 선호했다. 여기서 ‘선호’란 말은 가치중립적인 말일까? 그렇게 우길 수 있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전두환은 단지 민주주의와 총 중에 총을 특별히 좋아했을 뿐이니까. 그러나 전두환은 결코 광주에서 저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사전 속에서와 달리 ‘현실의 말’이 갖게 되는 사회적 맥락이다.
이 비약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 교수의 기사가 말이 가지는 사회적 맥락을 애써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맥락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교수는 이해찬 대표의 말을 듣고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한국 남성들은 왜 베트남 여성들을 선호할까? 이 교수가 찾아낸 해답은 이렇다.
이 대표의 말을 사전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와 비슷한 추측들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이건 진실에 근접한 답이 아니다. 여기서 진짜 답을 얻으려면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같은 한자/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고 생김새까지 비슷하며 서로 좋아할 만한 구구절절한 이유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왜 한국 여성은 (한국 남성이 베트남 여성을 특별히 선호하는 것처럼) 특별히 베트남 남성을 선호하지 않는 걸까? 어째서 베트남 남성은 특별히 한국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 걸까? 왜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남성들과 한국여성을 연결시켜주는 결혼소개소를 찾아볼 수 없는 걸까? 어째서 한국의 결혼소개소에서 ‘수입’하는 베트남인은 모두 여성인 걸까? 이 교수가 기사에서 언급한 매매혼 감소를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위 질문을 살펴보면 그것이 이해찬의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질문을 던진 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은 양국 사이 존재하는 경제 격차와 각국의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성별 격차다. 우리는 쉽게 <한국 남성 - 베트남 여성> 커플을 목격하고 예상하지만 그 역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 <제국 남성 - 식민지 여성>이라는 전통적 국가 – 젠더 권력구조를 배반하기 때문이다. 이 도식에서 베트남 여성들은 이중의 종속에 빠진다. 경제적 약소국 베트남 국민으로서 한번, 젠더 권력관계의 피지배자로서 또 한번이다.
트럼프가 한국에 와서 '미국 남성들은 한국 여성을 선호한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우린 저 말을 가치중립적 사실이라며 국립국어원의 해석처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 말에서 아무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한국과 미국의 외교관계는 수평적인가? 저 말의 성별을 뒤집어도 자연스러울 만큼 양국의 남녀 권력관계는 평등한가?
또 하나, 이해찬 총리의 ‘덕담’이 유쾌할 수 없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만약 트럼프가 저런 말을 했다면 나는 미국 남성 – 한국 여성과 관련한 이런 저런 기억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중에는 박정희가 미군을 위해 만든 기지촌 여성들과 그곳에서 미군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어떤 여성의 기억도 있다.
베트남인들에게도 ‘한국 남성’이 갖는 특별한 기억이 있다. 지금도 베트남에는 베트남전이 끝난 뒤 한국 남성에게 버려진 수천의 베트남 여성들과 그들 손에 길러진 라이따이한이 살고 있다. 그들은 과연 한국 남성의 ‘선호’를 기쁘게 받아들일까? (그 선호는 국립국어원의 해설처럼 가치중립적인가?)
이렇게 복잡한 권력관계와 역사적 맥락이 얽혀있는 가운데 ‘한국 남성이 베트남 여성을 선호한다’는 말을 진공상태의 ‘사실’로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설령 누군가 그 말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한 국가의 사절로 방문한 여당 대표라면 말의 무게가 가지는 사회적 맥락을 고려했어야 했다.
위 문단은 마치 조선인에게 내선일체의 원리를 열심히 설명했던 일제의 모습 같다. 그는 현실에서 작동하는 권력관계를 외면하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지원’하고 ‘응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등한 시민은 그런 수사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대표가 베트남 부총리에게 악의를 담아 저 말을 건넸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이해찬 대표는 정의감 넘치는 선한 사람이다. 이 교수의 말처럼 그는 ‘단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문제다. 세상의 많은 폭력은 악의 없는 외면에서 비롯된다. 단지 그렇게 생각한 게 뭐가 문제냐 따질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