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에 박힌 오지' 재생산하는 미디어

  • 기자명 탁재형
  • 기사승인 2018.12.21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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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전문 프로듀서”. 필자가 한창 방송에 출연할 때 이름 아래 넣곤 했던 설명자막이다. 고백하자면, 이것은 고육지책이었다. 수많은 피디들이 모두 카메라 뒤에 있는데, 넌 대체 무엇이길래 앞에 나와 떠드는가?라는 질문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일종의 기믹(Gimmick)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배우는 맡은 배역대로 인생이 풀린다고 하지들 않던가. 외려 그런 타이틀을 스스로 이름 아래에 넣어놓고 나서, 더욱 독한 오지들을 많이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름 ‘오지’라는 것에 대한 기준과 그 곳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시선도 갖추게 되었던 것 같다.

처음 제대로 오지 맛을 보았던 것은 2004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라오스와 중국 윈난성이 만나는 접경지대에 위치한 므앙 싱(Muang Xing) 마을. 그 곳에서도 차로 한 시간을 더 들어간 곳에 ‘꺼’라는 이름의 부족이 살고 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상, 하수도는 커녕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말 그대로 제대로 된 ‘오지’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 곳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삶의 방식은 필자가 상상하던, 아니 다른 TV 다큐멘터리에서 익히 보아오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옷차림부터 그러했다. 그들의 모습은 ‘원주민’이 아닌 ‘빈민’에 더 가까웠다. 부족 전체가 동일한 톤의 민속의상을 입는 따위의 일은 명절이 아니고선 찾아보기 힘들었다. 숲 속에서 사냥을 하고, 자신들이 먹을 양식을 직접 농사지어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생활양식을 상상했었는데, 그들은 오로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한 달에 두어 번, 중국에서 건너오는 업자들에게 사탕수수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경제생활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머릿속에 남아있는 하나의 장면은, 마을 어른들 중 한 명이 입은 남루한 트레이닝복의 가슴에 커다랗게 쓰여 있던 글자였다. “금.산.농.협.”

오지 느낌을 살리기 위해 주민들에게 민속의상을 입어달라고 요청한 뒤 찍은 사진. 탁재형 제공.
오지 느낌을 살리기 위해 주민들에게 민속의상을 입어달라고 요청한 뒤 찍은 사진. 탁재형 제공.

 

결국 프로그램을 촬영하기 위해선,(당시 유행하던, 리포터가 현지 부족의 일원이 되어 그 곳의 삶을 체험해 보는 포맷이었다.) 주민 몇에게 돈을 주고 집 안에 고이 보관해오던 민속의상을 입어달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대규모의 군중이 필요한, 마을 사람들과 처음 마주치는 장면에선 아예 마을 이장의 협조를 얻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축제 때처럼, 모두 의관을 정제하고 나오도록 한 것이다. 이장에게 얼마간의 마을 발전 기금을 지불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 프로그램 안에서 오지 부족이 입고나온 옷은 우리의 ‘설빔’이나 다름없는 것들이고 그들은 그 옷을 입고 사시사철 살아가는 사람들로 묘사된 것이다. 십 수 년 전의 방송 제작 관행이 옳다 그르다를 논하려는 글은 아니다. 딱히 그 때의 연출을 자랑스러워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런 그림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바로, 당시의 대중이,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방송국의 데스크가 그런 모습을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구가 TV화면을 통해 충족되는 과정을 통해, ‘오지’에 대한 이미지는 점점 더 굳어져 간다. 박제나 화석처럼, 변화라고는 없이 과거의 생활양식과 의복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곳. 바깥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곳. 하지만, 세상의 모습은 그렇게 단조롭지 않다.

<도전 지구탐험대>에 방영된 라오스 므앙 싱 장면. 탁재형 제공

2014년, 에콰도르의 야수니 정글 한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도 비포장 도로로 4시간, 그리고 보트를 타고 12시간을 가야 하는 곳이다.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며칠 후 아마존 강에 도달할 터였다. 태어나서 가본 곳 중에선 가장 깊숙한 오지였다. 이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와오라니’(Huaorani)라고 하는 이름의 원주민들이다. 이들의 ‘원래’ 옷차림은 완전한 나체였다. 단지 남자들의 허리에 두른 끈이, 완전한 원시와 희미한 문명 사이의 경계가 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들이 외부와의 교역을 시작하자, 정글 밖에 살던 백인들이 들어와 ‘선교’라는 이름으로 나체의 죄악성을 설파했다. 티셔츠와 반바지가 하나둘씩 퍼져 갔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옷가지들은 정글의 진흙 색깔을 닮아 갔다. 그렇게 우리 입장에서 그들의 차림새는 ‘남루’해졌다.

이런 그들의 입성이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눈에 차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부터가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때로는 쭈뼛거리며, 때로는 환하게 웃으며 바지를 내린다. 하지만 와오라니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외부의 옷을 입는 것이 ‘원주민’을 포기하고 ‘빈민’이 되기로 한 결정인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발전에 가깝다. 그 전까진 나무껍질 치마 하나를 만들기 위해 하루를 소모해야 했다고 하면, 이제는 바깥에서 구호라는 이름으로 가져다 주는, 또는 숲의 산물을 주고 바꾸어 온 옷가지를 입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어차피 빨아 봤자 금세 다시 흙물이 들 옷, 입을 만큼 입다가 다른 것으로 바꿔 입는 것이 훨씬 낫다. 이런 그들에게 언제는 나체의 죄악성을 떠들더니, 이내 ‘전통’과 ‘순수’를 찾으며 나체를 기대하는 외부인들의 행태는 너무나 이율배반적이다. 그런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오지를 찾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폭력이다.

 

공교롭게도 이 곳은, 2년 전에 다른 방송사의 촬영팀이 다녀간 곳이었다. 그들 역시 와오라니들의 옷을 벗겼고, 설빔을 입게 했고, 그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모습인 것으로 포장해 방송에 내보냈다. 하지만 10년 전에 비해 달라진 것 하나는, 인터넷을 통해 세상 끝의 모습들마저 많이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 곳의 삶이 더 이상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시청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의 항의에 의해 결국 방송사는 사과를 해야 했고, 앞으로는 과한 연출이 가미되지 않은 ‘담백한’ 방송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가 집단적으로 넓어지게 된 사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와오라니 족이 살고 있는 바메노로 가는 길은 사진과 같은 배를 타고 12시간을 가야 하는 외진 곳이다. 제공: 탁재형
에코도르 와오라니 부족의 모습. 이들 중 친절한(?) 이들은 평소에 옷을 입고 있다가 관광객이 오면 전통 의상을 연출한다. 제공: 탁재형

 

야수니의 와오라니 족은 이와 같은 '전통'의상과 캐주얼한 '현대'의상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중이다. 그들에게 어느 한 쪽만을 강요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제공: 탁재형

 

하지만 여전히, 판에 박은 오지의 모습을 확대재생산하는 미디어들이 있고, 그것들에 의해 환상 속의 오지에 대한 열망을 키우는 여행자들이 있고, 그들을 순수의 한복판으로 보내줄 것을 약속하는 여행사들이 있다.

오지를 다녀와 본 사람으로서 한 마디만 하자.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품고 오지로 향하든, 그것을 충족시키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보단 그 지역이 현재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를 관찰해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은 후에야, 우리는 세상 끝의 참모습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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