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나이라면 축구를 해야 한다, 야구가 아니라"

  • 기자명 최민규
  • 기사승인 2019.02.0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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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단체 구기 스포츠는 야구와 축구다. 두 종목은 경쟁 관계다. 비슷한 시기에 프로화 됐고 한국의 기후 특성상 시즌도 겹친다. 크지 않은 국내 시장에서 팬과 유망주를 두고 다퉈야 한다.

프로리그의 인기는 야구가 축구를 크게 앞선다. 포털사이트 네이버 스포츠섹션의 2016년 5월 27일~6월 19일 댓글 120만 건 가운데 야구가 55.8%, 축구가 31.5%를 차지했다. 해외리그를 제외하고 KBO리그와 K리그로 한정하면 43.5%와 13.0%로 야구가 3.3배 규모다. 하지만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는 국내 스포츠 시장에서 가장 가치높은 콘텐트로 꼽힌다. 생활체육과 유소년 부문에서도 축구가 앞서 있다.

라이벌 의식은 팬들 사이에서도 퍼져 있다. 특히 FIFA 월드컵이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같은 대형 국제대회를 앞두고 두 종목 팬들은 인터넷에서 ‘전쟁’을 벌인다. 객관화하기 어려운 ‘종목의 우월성’이 이 전쟁의 주요 전장이 된다. 가령 축구 팬이 야구를 “운동도 아닌 경기”라고 깎아내리는 식이다. 흥미롭게도 100년 전에도 비슷한 주장이 있었다.

1920년 11월 1일 발간된 잡지 개벽 제5호에는 “산아이거든 풋뽈을 차라”는 제목의 글이 실린다.

‘산아이’는 지금 표기법으로는 ‘사나이’다. 필자의 이름은 김원태. 휘문고보 출신으로 1920년대 조선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였다. 이 글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문체는 현대문으로 다소 다듬는다.

“경기운동은 단체, 개인 종목을 불문하고 각각의 장점에 따라 체육적 효력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나아가 경비와 운동량, 또한 교육상 효과가 확실한 것은 어소시에이션 풋볼 같은 것이 없는 줄로 안다” (*어소시세이션 풋볼=잉글랜드축구협회(FA)의 룰에 따르는 축구 경기. 지금 FIFA(국제축구연맹)에서 주관하는 축구 경기다. 당시엔 아식(A식) 축구라고도 했다.)

 

주의할 점이 있다. 당시 체육인들은 오늘날처럼 특정 종목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니었다. 체육 활동은 학교와 클럽(구락부)에서 주로 이뤄졌으며, 운동 능력이 뛰어난 선수라면 여러 종목에서 뛰었다. 김원태는 1926년 조선축구단의 일본 원정에서 주장을 맡았다. 그와 함께 포워드로 뛰었던 이영민은 ‘이영민 타격상’에 이름이 헌정된 불세출의 야구 스타기도 했다. 김원태도 자신을 “지금도 테니스와 배구, 농구를 한다. 야구라든지 유도, 수영도 즐겨 한다”고 소개했다.

김원태는 겨울철 야구 경기의 한 장면을 소개하며 야구의 운동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동계야구 경기자를 보면 공격측의 대부분은 ‘오바’를 입고 기다리면서 정신만 허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니, 이는 참말로 운동의 가치가 적은 줄로 안다“

야구는 한 경기에 소요되는 개인 운동량이 적은 경기다. 지난해 러시아 월드컵 독일전에서 한국 선수들은 총 118km를 달렸다. 포지션 평균으론 10.7km다. 축구에서 가장 활동량이 적은 포지션인 골키퍼도 경기당 평균 3km를 이동한다. 반면 야구에서 가장 체력 소모가 많은 플레이인 3루타에서 타자가 뛰어야 하는 거리는 82.3m에 불과하다. 전체 경기 시간에서 인플레이 시간 비율은 매우 낮다. 게다가 축구 선수는 경기 중에 ‘오바’를 입지 않는다.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씩씩하게 뛴다.

필자는 학생 선수에게 더 유익한 경기가 축구라는 주장도 한다.

“혹자는 경기운동이 학생을 타락하게 한다고 한다. (중략) 여러 경기운동은 시간이 제한이 없어 흥미에 따라 시간 가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스포츠 활동이 학업에 유해하다는 시각은 당대 조선 뿐 아니라 일본에도 있었다. 1911년 일본의 도쿄 아사히신문은 26회에 걸쳐 ‘야구해독록’을 다룬 특집을 게재한다. 같은 계열인 오사카 아사히가 1915년 지금의 고시엔 대회를 창설한 것과 대조적이다. 당시 일본의 저명 인사들이 야구가 유해하다고 주장한 이유 가운데는 ‘시간낭비’와 ‘학업태만’이 있었다.

김원태는 “워낙 심지가 강한 자가 아니면 경기에 열중해 학업을 다소 태만하게 된다. (중략) 풋볼은 이에 대해 조금도 우려할 바가 없다. 게임을 시작할 때 반드시 시간을 정하고 정한 시간에 마친다. 연습도 정해진 날짜와 있어 학업에 방해됨이 없다”라고 기술했다. 물론, 야구는 축구와 달리 시간 제한이 없는 경기다.

여기에 전신 운동인 축구는 조선인의 굽은 하지를 교정하는 효과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릴 때 아기를 업어 키우고 자라서는 꿇어앉는 습관 때문에 조선 사람은 상체에 비해 하체 발달이 좋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 대목에서 “풋볼은 다리 운동만 되고 전신 운동이 되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조금도 풋볼 경험이 없는 자의 피상적 관찰”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또 단체운동으로서 축구의 가치를 강조한다.

“이 운동은 단체적인 것으로 다섯 손가락처럼 연락과 통일이 중요하다”

“아무리 우수한 선수를 보유한 팀도 단체 연결이 좋지 않으면 승리를 예측할 수 없다”

“단체를 위하여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큰 덕성을 양성”

야구 역시 단체 경기지만 축구와 비교하면 팀 플레이 비중이 적고 개인 경기의 조합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1922년에 열린 제3회 전조선축구대회 불교청년회 우승 기념사진

김원태의 기고에는 배경이 있다. <개벽>은 1919년 조직된 천도교청년회가 창간한 잡지다. 천도교청년회는 <개벽> 외에도 여성잡지 <부인>, 소년잡지 <어린이>를 창간하며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다. 지금 5월 5일로 정해져 있는 어린이날도 천도교소년회에서 1921년 처음 제정한 것이다. 스포츠도 신문화운동의 일환이었다. 덴마크 체조를 보급하고 야구부와 축구부를 조직했다.

천도교청년회의 주축 멤버였던 김원태가 축구부 조직을 앞두고 <개벽>에 기고한 글이 “산아이거든 풋뽈을 차라”다. 그런 만큼 축구의 장점와 우위를 강조하는 건 자연스럽다. 다른 종목을 깎아내리자는 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김원태가 "조선 사나이라면 축구를 하라"고 주장했던 첫 번째 이유는 경기의 특성이나 교육 효과 등이 아닌 ‘비용’의 문제였다.

학교 체육 전문가들은 체육 활동에 흥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기구의 사용이 중요하다고 본다. 100년 전의 김원태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떤 경기든 조금 흥미있다는 것은 반드시 운동구를 필요로 한다. 기구 없이 하는 경기가 없지는 않지만 극히 평범하고 재미가 없어 곧 싫증이 나 계속하지 못하니 운동이라는 진가를 발휘할 수 없다.”

김원태는 이 글에서 당시 조선 학원 체육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 야구와 테니스(정구)라고 썼다. 모두 장비가 중요한 종목이다. 당시 조선에는 스포츠 용품을 생산하는 회사가 없었다. 그런 만큼 가격은 더 비쌌다. 김원태에 따르면 두 종목 장비 구입 비용은 “학교 체육비의 태반”이었다.

김원태는 “A식 축구는 공 하나만 있으면 다수 인원이 동시에 유쾌한 운동을 할 수 있다. 조금만 주의하면 공 하나를 3개월은 사용할 수 있다”고 기술했다. 그의 기고문에는 당시 축구공 1개의 가격도 나온다.

“또한 1개의 볼은 십원쯤으로 살 수 있으니 설비가 지극히 간단하고 비용이 적은 점에 대하야서는 이 운동에 지나는 것이 없는 줄로 안다”.

지금 화폐단위로 환산하면 7만1540원이다. 2019년 경기용 축구공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다.

과다한 경비 부담은 식민지 시대 야구가 확산이 더뎠던 이유기도 하다. 고시엔 조선 예선 참가 여부를 기준으로 식민지 시대 조선인 학교 야구부는 최대 13개에 불과했다. <윤치호일기>의 1928년 5월 28일자는 이날 열렸던 제 9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언급하고 있다. 윤치호는 이날 일기에서 “조선에선 야구 팀이 질적 양적으로 모두 열악하다. 서울에는 딱 네 개 팀밖에 없다. 조선인들의 체육 활동을 고양할 역량이 전혀 없다”고 기술했다. '의무교육이 아니었고 자퇴율이 높았던 식민지 교육에서 '비싼 운동'이었던 야구는 태생적으로 확산에 한계가 있었다. 윤치호가 언급했던 제9회 전조선야구대회 전체 참가 팀은 소학부 두 팀, 중학부 세 팀, 청년단부 두 팀에 불과했다. 참가 팀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대회가 무산될 위기도 있었다. 

 

비용 문제만은 아니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이 펴낸 <이야기한국체육사> 야구편은 당대인들의 야구에 대한 인식을 이렇게 기술한다. 

“조선 사람들은 축구나 육성, 복싱 등에서는 일본 사람들을 상대하더라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당한 규칙 안에서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다는 데에서 스포츠는 색다른 희열을 안겨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야구는 달랐다. 일본의 수준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체격이나 뚝심만 갖고는 되지 않는 게 야구였다. (중략)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럴수록 ‘야구는 왜놈들이 좋아하는 운동’이라며 경원하는 경향이 생겼다.”

한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 야구단은 1912년 일본 원정을 떠났다. 결과는 총 7경기 1승 1무 5패라는 참패였다. 12월 2일 요코하마 도즈카구장에서 열린 와세다대학과의 첫 경기에서 YMCA 야구단은 0-23으로 대패했다.

한국 최초의 야구부였던 YMCA 야구단의 1912년 일본 원정을 기념해 1923년에 만들어지 '1912 야구단'

반면 김원태가 포워드로 활약했던 조선축구단은 1926년 일본 원정에서 5승 3무 무패라는 압도적인 전적을 거뒀다. 일본 최강으로 꼽히던 히로시마의 리죠구락부, 도쿄 넘버원 고등사범을 연파했고 전년도 중등대회 챔피언 히로시마중학에는 5-2로 대승했다. 원정 전인 4월엔 경성운동장 개장 경기에서도 일본의 명문 오사카사커클럽에 3-1 역전승을 거뒀다.

식민지 시대 축구는 조선인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덜어줬다. 반면 야구는 오히려 '2등 국민'이라는 열패감을 자극하는 경기였다. 1921~1940년 열렸던 고시엔대회 조선예선을 통과한 조선인 학교는 1923년 휘문고 단 한 팀이었다.

식민지 시대 스포츠는 제국주의 체제의 일환이자 지향해야 할 근대의 상징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띤다. 국내 경기로 한정하면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야구와 축구의 위상이 해방 이후 180도로 달라진 건 한국체육사의 아이러니다. 어쩌면 축구가 너무 일찍 일본을 극복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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