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 인쇄 '눈 감아준' 조선인 형사 일화는 거짓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9.02.11 05:5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글 '독립선언서 첫 인쇄본, 朝鮮(조선)인가 鮮朝(선조)인가'에서 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고 있던 현장을 포착한 조선인 형사 신승희(신철)의 이야기를 언급했다. ‘하마터면 독립 선언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종일과 손병희는 거금 5000원으로 신승희의 입을 막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것이 널리 알려진 신승희와 선언서에 관한 일화다. 이 얘기를 다룬 글들이 많지만 그 중 하나를 읽어보자.

 

한창 인쇄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보성사 주변을 순찰하던 종로경찰서 소속 형사 신승희(申勝熙·일명 申哲)가 보성사에서 달가닥거리는 소리를 듣고서 검문을 하러 온 것이었다. 이종일로서는 기절초풍할 노릇이었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쇄소 안으로 들어온 신승희는 금세 상황을 알아차렸다. 독립선언서 인쇄가 바로 탄로가 나고 말았다. 이종일은 신승희 앞에 꿇어 엎드려 "당신도 조선 사람이니 제발 한번만 눈감아 달라고"고 애걸했다. 그리고는 이종일은 잠시 다녀올 데가 있으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곧장 의암 손병희(孫秉熙)를 찾아갔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손병희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안방에서 5천원 뭉치를 꺼내주었다. 신승희는 이돈 5천원을 먹고 눈감아 주었다. 물론 이 돈은 천도교 자금이었지만 그날 밤 손병희가 당시로선 거금 5천원을 선뜻 내주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현재 조계사 자리에 있었던 보성사(普成社). 보성전문학교의 교과서를 찍던 곳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사진은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됐다.

 

이 사건에서 이어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뇌물 5,000원에 입을 꼭 다문 신승희가 얼마 후 자살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방송된 다음 라디오 인터뷰에서도 그런 통설을 확인할 수 있다.

▷ 서○○ : 그러니까 하늘이,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늘이 있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정말 대단하고, 우리 운명이,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건 독립선언이 인쇄될 때 사실은 종로경찰서에 있었던 한국인 고등계 형사에게 독립선언서를 뺏겼습니다. 신철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독립선언서를 일본경찰서에 보고하지 않고 신의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 김○○ : 그래요?

▷ 서○○ : 네. 그러니까 친일파인데, 독립선언서를 하는 그것만큼은 지켜주려고 했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TBS, 「세 가지 독립선언서 이야기」, 2019년 1월 11일자

 

신의주로 도망간 신승희(신철)는 자살했다! 과연 그럴까? 신승희의 죽음에 대한 2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위 설명과 같이 선언서 인쇄를 포착하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사실이 들통 나 자살했다는 것이고, 둘은 5000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들통 나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나온 「만세열전」의 저자 조한성은 신철의 죽음과 선언서 인쇄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고 한다. 신승희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잘못 알려진 것은 「매일신보」 1919년 5월 22일자 「고등형사가 천도교로부터 오천원을 수뢰」라는 기사 때문인데, 내용은 신승희가 소요사건 당시 천도교에서 5000원의 뇌물을 받았고, 이것을 탐지한 경성헌병분대가 5월 14일 만주 출장에서 돌아온 그를 남대문역에서 체포하여 취조하였는데, 다음날 유치장에서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 없던 ‘인쇄 현장 포착’이라는 사실이 추가된 것은 1978년에 나온 이종일의 「묵암비망록」이었고, 그 후 ‘신승희가 선언서 인쇄 현장을 포착하고 뇌물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유통되었다는 것이다.

정작 신철이 관계된 사건은 ‘선언서 인쇄’가 아니고, 1919년 5월에 발생한 ‘천도교 특별성미금 모금사건’이었다고 한다. 당시 천도교 대교당 건축 명목으로 대규모 기부금을 모아 독립 운동에 전용한 혐의로 천도교 대종사장 정광조 등 천도교 간부 40여 명이 기소되었는데, 신철이 정광조로부터 뇌물 150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정광조는 뇌물 액수를 300원이라고 말했다.

경성헌병분대는 정광조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을 포착하고 신승희를 체포했다. 정광조는 신승희와 친분이 있는 박노학이라는 천도교인을 통해 돈을 건넸다. 박노학은 체포된 천도교인들에게 의복을 차입하거나 기타 편의를 제공해 달라는 뜻으로 돈을 주었다고 한다.

신승희는 심문에서 종로경찰서장과 고등경찰계 주임 오카모토로부터 천도교단의 사찰을 지시받고 박노학에게 접근했고, 박노학이 돈으로 자신을 매수하려 하자 이를 상관인 오카모토에게 알렸다고 한다. 오카모토는 진짜 매수당해서는 안 되지만 겉으로 매수당한 것같이 꾸며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돈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신승희의 주장이다. (조한성, 「만세열전」 중)

사실이 이러한데 어찌하여 신승희가 천도교로부터 5000원을 받았다는 기사가 나왔을까? 저자는 사실과 다른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저의가 ‘유능한 일본 경찰이 조선인들의 대음모를 미리 알아채지 못한 데는 조선인 내부의 협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음흉한 조선인들이 거금의 뇌물로 대일본제국의 경찰을 매수해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고 함으로써 3.1운동의 의미를 ‘조선인들의 음모’ 정도로 폄하하고자 한 것이라 설명한다.

3.1운동 당시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 모습. 출처:국가기록원

1979년에는 신승희의 이야기가 KBS의 3·1절 특집드라마 「34인」으로 만들어졌다. 왜곡된 일화를 바탕으로 신승희를 민족지도자처럼 그렸던 것인데, 1919년 4월 의용단장의 이름으로 뿌려진 전단에 의하면, 신승희는 무도하고 금수만도 못한 존재로 민족의 피를 빠는 악독한 고등계 형사의 대명사였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즈음 온갖 미디어를 통해 독자를 현혹하는 ‘가짜뉴스’나 ‘아무말뉴스’도 시급히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다.

저자는 「윤치호일기」를 근거로 신승희는 자살한 것이 아니고, 용산 헌병들에게 고문을 당해 죽었다고 한다. 일제의 주구가 되어 같은 동포를 못살게 굴던 민족 배신자의 비참한 말로였다.

Entertained 岡本警部 and 橋本警部 to Korean supper. The former wouldn't touch any of the Korean "panchan" while the latter ate everything that was set before him. From these men I learned the sad fact that 申勝熙 had been beaten or tortured to death by the gendarmes of 龍山.

오카모토(岡本惠三郞) 경부(警部)와 하시모토(橋本淸) 경부에게 한식 저녁을 대접했다. 오카모토 경부는 한식 “반찬”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고, 하시모토 경부는 앞에 놓인 음식을 모두 잘 먹었다. 두 사람에게서 신승희(申勝熙) 씨가 용산 헌병들에게 고문당해 죽었다는 서글픈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윤치호일기, 1920년 1월 6일.(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