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신군부와 유착한 <환단고기> 저자 이유립

  • 기자명 이문영
  • 기사승인 2019.02.12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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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를 내놓은 이유립에 대한 자료로 2007년에 9월에 나온 <신동아>에 흥미로운 자료들이 있다(권말부록 : <환단고기>의 진실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이유립은 이승만 정부 시절에 구금된 바가 있는데, 그에 대해서 해당 기사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 시절 이유립은 이씨 왕조를 보존하자는 주장을 펼치다가 왕정주의자로 몰려 구금됐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향신문 1952년 7월 16일자 기사(2면 '왕정복구를 몽상 일당팔명을 검거문초중')를 보면 ‘이씨 왕조를 보존하자는 주장’ 정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유립은 정치혁명민족협의회라는 지하조직에 소속되어 일본에 있는 영친왕 이은을 국가수반으로 삼겠다는 이른바 ‘신판왕정복구단’ 사건으로 일당 7명과 함께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유립은 1951년 조총련의 전신인 조련 선전부부책 이정(李正)의 지령을 받아 1951년 9월에 ‘붉은 문화사’라는 것을 만들고 정치혁명민족협의회를 결성했다고 한다. 국호는 대달(大達), 국가는 신가, 연호는 개벽으로 정하고 국기도 만들었다. 기관지 이름은 <무궁>이었다. 이들이 만든 국기는 황색 바탕에 담흑색 원에 팔괘를 제거한 형태였다. 행동 강령으로는 외세 배격, 남북민족 사상통일, 국토 통일 등을 내세웠다. 흥미롭게도 이들 일당 중에는 남로당원도 들어있었다. 이유립은 공산당에 의해 북한에서 박해를 받았고 고문을 당하고 간신히 월남에 성공했다고 했는데 조총련과 남로당과 손을 잡는 일은 대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들은 영친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경남 구포에 있던 순정효황후를 통해서 전달하려다가 사찰에 걸려 일망타진 되었다. 단순히 왕조 보존의 주장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상세한 내용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유립의 왕정복고 사건을 다룬 1952년 7월 16일자 경향신문.

 

이유립이 81년 국사공청회에서 배제된 이유는?

<신동아>에는 <환단고기> 일본 번역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이미 여러차례 졸저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그보다 아래와 같은 부분에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선생님의 원고를 가져간 가지마는 대종교를 배신한 강모씨의 설명을 덧붙여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 선생은 박창암 장군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박 장군도 결국 가지마에게 당한 셈이다.”

위 글에 나오는 ‘가지마’는 <환단고기> 일역본을 낸 가시마 노보루(鹿島昇)를 말한다. ‘대종교를 배신한 강모씨’는 누구인가? 그 설명을 덧붙여서 <환단고기>가 나왔다고 기사에 나오는데, <환단고기>에 글을 실은 강모씨는 <환단고기>를 초기에 번역한 ‘강수원’뿐이다. 강수원은 대종교 총전리, 삼일원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고 일역본 재판에 <大倧敎とは ― ここに眞なる宗敎あり(대종교란 - 여기에 참된 종교가 있다)>라는 글을 싣고 있다. 조건에 맞는 사람은 강수원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대종교를 배반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 근거하는지 알 수가 없다. 1990년에 박광용 교수가 대종교 문헌에 대한 위작 여부를 논했을 때 강수원은 반박글을 언론에 내놓기도 했었다. 또한 강수원은 <환단고기>를 번역하면서 일역본을 참고했다고 말하고 있는 만큼, <신동아>의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박창암과 이 일로 멀어졌다고 하지만 이유립은 이후에도 박창암이 발행하는 유사역사학 기관지 <자유>지에 활발하게 글을 실었기 때문에 사실로 보기 어렵다. 이들이 정말 멀어졌다면 그것은 다른 일 때문이다.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1981년의 국사공청회이다.

1981년 11월 26일 국회 문공위에서 유사역사가들과 역사학자 간의 토론이 벌어지는 희대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때 역사학계에서는 그동안의 비방에 대대적인 토론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최대 인원이 나올 것을 요청했다. 8~10명이 나올 것을 요청했지만 유사역사학계는 3명만 나오겠다고 통보했다. 안호상, 임승국, 박시인 세 명이 나올 사람으로 결정되었다. <환단고기>를 내놓고 가장 많은 글을 발표해온 이유립은 제외되었다. 자리가 없어서 제외된 것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2차에 걸친 공청회 내내 <환단고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은 것을 보아도 명백하다. 그들이 지금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그 <환단고기>는 왜 한 마디도 거론되지 않았을까? 저들 중 임승국은 <환단고기> 번역서를 내놓은 사람이고, <환단고기>가 정식으로 나오기도 전인 1978년에 쓴 책에서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와 ‘삼성기’의 본문을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임승국·안동준 공저 <한국고대사관견> 91쪽)

안호상은 또 어떤가? 그는 1985년에 번역 출간된 강수원의 <환단고기>에 추천사를 썼다. 그는 1985년에 내놓은 <한웅과 단군과 화랑>의 머리말에서 5~6년 전부터 <환단고기>를 연구하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도 빠지지 않고 가시마 노보루의 일역본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일역본이 나온 뒤에서야 이 책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환단고기>의 앞부분만 그것도 그리 큰 비중 없이 취급되었다. 책 말미에 소개하는 자료 모음에도 <환단고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안호상은 1985년 12월 14일에 배달문화원 민족강연회에서 ‘민족의 뿌리 단군을 바로 알자’라는 강연을 한 바 있는데, 여기서도 <환단고기>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안호상이 본격적으로 <환단고기>를 이용해서 책을 낸 것은 1992년에 나온 <겨레 역사 6천 년>에 이르러서다. 이 책에서는 각각의 단군별로 상술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5~6년 전부터 연구했다는 말을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이유다.

이들은 당초에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환단고기>를 일역본이 나온 이후에 중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1981년에는 이유립은 <환단고기> 같은 위서를 들고 설치는 사람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이유로 이유립은 국사공청회에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유사역사학 기관지였던 월간 <자유>지. 표지에 이유립의 이름과 단하산인의 이름이 보이는데, 단하산인은 이유립의 호 중 하나이다. 이처럼 이유립은 <자유>지의 메인 필자였다.

 

이유립이 월간 <자유>에서 축출된 이유는?

국사공청회가 있고난 1981년 12월호에 한 개의 글을 <자유>지에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이유립은 <자유>지 지면에서 사라져버린다. 한 때는 지면의 절반 이상을 채우기도 했던 그가 하루아침에 축출되어버린 것이다.

작고한 후에도 심심찮게 <자유>지에 글을 올리던 문정창과는 달리 이유립은 사후에도 <자유>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이유립은 국사찾기협의회에 가입하고 <자유>지가 이 협회의 기관지 노릇을 하게 된 1976년에 ‘국사교과서는 통곡한다’는 글을 올려 국사 교육에 항의했다. 그는 이 글에서 <천부경>, <삼일신고> 등을 왜 믿지 않느냐 질책하고 또 이런 대목을 언급하기도 했다.

우리의 국사 바로잡기 기본요령을 이 기회에 밝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1은 <삼국유사>에 인용한 고기(환단고기)는 환웅천왕의 신시개천을 말하는 것이고, 왕항 <위서>는 단군의 삼한관경을 적은 것이 확실하다.

 

그는 이 글에서 은근슬쩍 <환단고기>의 한 챕터인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끼워넣어 사료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1976년이라면 <환단고기>가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이유립은 그것을 꺼내들어 여러 사료 사이에 끼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1978년 12월 <자유>지에 이유립은 ‘국사 바로잡기 천 년의 혈맥’이라는 글을 썼는데, 여기에 <환단고기>의 편명과 범례를 모두 소개하고 있다. 이기가 대종교를 세운 나철과 함께 행동하다가 나철의 자백으로 잡혀들어갔다는 등의 이야기와 함께.

1979년 1월 <자유>지에 쓴 ‘국사찾기 사혼(史魂) 십견(十見)’이라는 글에서도 <환단고기>의 구절들을 슬그머니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이처럼 이유립은 항간에 떠도는 말처럼 1980년에 <환단고기>를 공개하라는 말에 아랑곳없이 <환단고기>를 지속적으로 선전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국사를 뜯어고치고 싶어했다. 이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모두 나쁜 쪽으로 몰아갔다.

이유립은 스스로를 태백교인이라고 말했고 종교연구가 이강오 교수는 그를 단단학회 교주로 소개하기도 했다. 태백교는 이유립의 주장을 따르면 <환단고기>를 감수했다는 자신의 조상 이기로부터 출발하는 종교다. 단군을 섬기되 역사적 실체로 섬기기 때문에 신으로 섬기는 대종교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신의 태백교와 대립되는 대종교를 비방한다. 그는 국회에서 공청회가 끝난 다음날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이 <대배달민족사> 4권에 ‘국회의 국사공청회에 보내는 의견서’에 실려있다. 그 편지에서 이유립은 대종교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대종교의 사관없는 신앙사관의 조작
홍암 나철(초명 인영)씨는 삼신상제를 곧 단군 한배검으로 신앙 대상을 삼고 신시개천의 법통을 잇는 1565년사를 완전 끊어버리고 말았는데 그 교명이 가로대 단군교라 했다. 그러나 단군교의 주도권이 점차 자치파의 정훈모 일파에게로 돌아가게 되자 홍암은 대종교로 개칭하고 (중략) 김교헌과 윤세복 두 분의 사론은 황당무계한 것이며...

 

김교헌은 대종교 2대 교주, 윤세복은 대종교 3대 교주이다. 이유립은 대종교가 환인, 환웅, 단군을 신격화해서 역사를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대종교 문헌인 <단군교포명서>에 기자가 고조선에 와서 대통을 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는 점도 걸고 넘어진다. 이유립에게는 기자는 한국사에서 말살해야 하는 절대 악이었기 때문이다. 대종교인이자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 중국에서 썼던 <감시만어>라는 책을 공격할 때도 기자가 주된 이유가 된다. 이유립은 이 책이 애국적인 관점의 책일 뿐, 역사책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이유립은 대종교적인 역사 해석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안호상을 공격한다.

단군교=개명 대종교는 (중략) 소위 <삼일신고봉장기>라는 글속에 유령의 문서를 조작해서 끼어넣으니 가로대 후조선기니 기자 빙일사산인(聘一士山人:기자가 일사산인을 초빙했다)이니 은문(殷文)으로 신고를 썼다느니 하는 미신의 해석 그것이 안 박사의 소위 <배달의 종교와 철학과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안호상이 이런 대종교적 역사관에 입각해서 ‘식민사학자’들과 대립한 것이 국사공청회였다는 것이다. 이유립은 ‘국회의 국사공청회 질의와 진술의 양실(兩失)을 단(斷)함’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양일간 국회 문공위의 주관으로 열린 국사공청회의 출연요지는 질의인(청원인) 측은 지난날 사대주의 사료를 근거로 하고 대종교의 신앙적 해석방법으로 주먹구구에 의하여 식민주의 망국사관을 바꿔야 한다는 완명(頑命)한 주장인데...

 

이처럼 이유립은 자신이 불참하게 된 국사공청회를 맹비난 했다. 또한 그가 참석했다면 주장했을 내용 역시 이를 통해 명약관화하게 볼 수 있다. 차라리 이때 이유립이 참석해서 <환단고기>에 근거한 주장을 늘어놓았다면 1980년대 중반의 괴현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위 의견서의 한 대목을 보자.

안 박사는 일찌기 일민주의를 제창하여 반민특위를 해산하는데 절호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고 (중략) 기자 41세 929년이라는 환작된 안 박사의 기자조선 그것이 도취사관이란 말이다. (중략) 운운한 그것이 이병도 사관을 닮다가 모자라는 안 박사의 도취적 유령사관이란 말이다. 삼신상제=단군 또 환검인종 또 그 기자조선인 한조선 등등의 비사학적 용어가 조작되어도 이것은 대종교의 일방적 도취사관이요, 미신적 해석임에 틀림없으므로 국사찾기 계몽운동에 있어서 적지 않은 체면 손상을 시키고 있다는 사실 이것을 무엇으로 구제할 것인가.

 

일민주의는 이승만 독재를 위해 만들어진 체제 보위 철학이다. 한마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만들어놓은 파시즘적인 내용이 일민주의이다. 안호상은 이승만 독재가 끝난 후에는 이 내용을 ‘한백성주의’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계속 주장하고 다녔다. 이 내용은 국수주의로 점철되어 있다.

이유립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월간 <자유>를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위기일발의 긴박한 순간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국사찾기 운동을 이끌던 수장 안호상을 맹렬히 공격한 결과 이유립은 더 이상 <자유>지에 글을 실을 수 없게 된 것이라 추측하게 된다.

교주 이유립 :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감>(대흥기획)

 

이유립과 군부집권세력 '국수주의'로 유착

그런데 이 80년대는 전두환과 군부세력이 집권을 한 때였다. 그리고 이들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충분히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주입해 놓은 상태였다. 월간 <자유>는 군납 잡지였고, 이런 영향으로 육군본부는 국수주의적 정훈교재인 <한민족의 용틀임-위대한 각성과 웅비>, <통일과 웅비를 향한 겨레의 역사>와 같은 책을 1983년에 잇달아 내놓았다. 특히 후자의 책에는 참고도서에 <환단고기>도 등장하고 있다. 아직 일역본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육군본부에서 내놓은 책자에 <환단고기>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유사역사학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신동아에 주목할만한 대목이 있다.

5공 실세, 군부와 연결된 이유립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 것을 되찾으려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일어나면서 5공 실세와 군인들이 이유립을 찾게 됐다. 이유립을 만난 5공 실세는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려 했다. 1983년 5공화국은 ‘국풍(國風) 83’이라는 행사를 벌였는데, 이는 이유립씨의 영향을 받아 5공 실세들이 마련한 민족주의 이벤트였다. 군인들은 이씨의 역사 강의를 주로 들었다.

 

이 주장은 다른 곳에서 교차 확인되지 않는 이유립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심지어 국풍은 83년이 아니라 81년에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주장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사역사학은 원래 극우적 성향 때문에 권위주의에 기울게 되어 있고 그것은 권력을 향한 갈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두환 등장기에 <자유>지는 국가 공권력으로 역사학자를 처단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라는 주장을 계속 늘어놓았다. 더불어 신군부를 찬양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유립도 중앙청 철거 보류 결정에 항의하면서 전두환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보낸 바 있다.(1982년 9월 10일) 그 편지에서도 서두에 국회공청회를 비난하고 자신의 용건으로 넘어갔다. 이 편지는 <대배달민족사>5권에 수록되어 있다. ‘국사바로찾기 재건활동의 일반’이라는 제목이다. 국회공청회에서 청원인들을 비난하는 요지는 앞서와 동일하다.

 

8.15 이후 한민당 등 친일파 세력과 야합한 소위 일민주의의 본바탕이라는 미명하에 덮어놓고 뭉치자는 식의 근시안적 방편수단이 하룻밤 사이에 헌법 원안이 바뀌어지고 부일 내응 위사 협력한 교육자들이 대거 진출하게 되었으니...
청원인 측의 질의 내용은 사대주의적 사료를 근거로 대종교의 신화적 해석 방법으로 구수(舊讐) 식민주의 국사와 국사교육을 개정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없앨 수 없읍니다.

 

저 글은 전두환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것인데, 원 목적은 중앙청 철거가 보류된 것에 대해서 이런 의견을 보낸 것이었다.

만일 여타의 다른 방책이 서지 못한다면 향후 30년간 우리 단단학회에 무료로 대여해 주신다면 우금 74년 살을 에는 아픔을 이겨내며 민족의 주체사관과 가치의 정립을 위해 노력했던 그대로 사업을 벌여 국사편찬위원회나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다하지 못하는 나머지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해 보겠읍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이런 답변을 보내주었다.

중앙청을 귀하가 속하신 단단학회에 무료로 30년간 대여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서는 응할 수 없음을 통보하며, 마지막으로 귀하께서 기울이시는 민족주의사관 정립을 위한 노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며 귀하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이 있기 바랍니다.

이유립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국사찾기협의회의 주도 세력과 국회공청회를 통해 갈라서게 되고 이유립과 함께 많은 활동을 하고 단단학회에 가입한 적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임승국은 1990년 <자유>지 11월호에서 박광용 교수의 <환단고기> 작성자가 이유립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면서 이렇게 이유립을 평가했다.

이유립 옹이 <한단고기>를 위작할만한 학인이었다면 아마도 그의 학문은 지금쯤 더욱 빛을 발했으리라. 이유립 옹이 쓴 글은 한문으로 된 것은 물론 국한문병용의 서찬도 일반이 잘 이해할 수 없는 글이었다. 따라서 고대사학의 기관지 구실을 해온 본 <자유>지에 다른 학자의 글은 자주 실렸으나 옹의 글은 거의 실리지 않았던 게 현실이었다. (중략) 생전에 기독교 가톨릭에 대한 맹렬한 반감을 가졌던 좀 유별난 학자였던 이유립씨가...

 

1978년 11월호 <자유>지를 보면, 7개의 기사가 실려있는데, 이중 이유립이 직접 쓴 것이 4개, 단단학회 회원이 쓴 글이 1개로 총 5개의 글이 이유립과 단단학회 글로 채워져있다. 매 호 이유립의 글이 빠진 적이 없고 두 개 이상의 연재를 지속하기도 했다. 그런데 임승국은 이유립의 글이 “거의 실리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임승국은 이 글에서 박광용 교수를 이렇게 협박하기도 했다.

박교수는 아무래도 ‘군사문화’를 떠벌리다가 군의 비수에 찔려 한 때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저 ‘오홍근 기자 피습사건’을 연상케하는 교수이다. 군에서 실시하는 사관 교육을 “굳이 일본 황국사관 - 침략주의 용어라 매도하고 군에서 ‘웅비사관’을 유행시키고 있다”고 증군사상(憎軍思想)을 불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오홍근 기자는 1988년 월간중앙에 군사문화를 비판하는 컬럼을 연재하다가 국군정보사령부 부대원 4명에게 테러를 당했다. 다행히 목격자가 있어서 목숨을 건졌던 초유의 사건이었다. 임승국은 이런 사건을 들먹이고 있는 것이다.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부장은 군대 문화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가 대로변에서 육군정보사 요원으로부터 피습을 당해 중상을 입었다.

이유립은 1982년 12월 6일에도 전두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에서 요구하는 바는 이러했다.

태백교는 무교주 무포교제 자가신앙입니다. 궁교(躬敎) 제1의로 하는 태백교의 경전은 (중략) 보급방법은 3년 1차 교습자의 논문 심사에 의하여 수사(修士), 훈사(訓士), 홍사(弘士)의 학제를 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회일강좌·연구실의 개최 또는 관인 커발한 국학 학원의 인가 절차를 밟아 국학과 국사의 천명에 공헌할 것입니다. 정부로부터 많은 협조와 장려 혹은 육성하는데 특히 유의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

 

이유립은 이어서 <환단고기>가 일역되었고 나카소네 수상도 추천인 명단에 들어있다고 자랑한 뒤에 일본의 속셈이 뭔지 두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렇게 자극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국사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나섰다고 말하면서,

참다 참다 못하여 못난 자격을 무릅쓰고 ‘태백교 및 단학회’의 이름으로 전기 <환단고기>와 전기 태백교성전(聖典)을 하나에로 합편하여 <대배달민족사>라 칭하고 이제 이것을 발간하고자 하오니 정부에서 다소 협조하시는 뜻에서 문예진흥기금 같은 제공이 있었으면 합니다.

 

이에 대해 십여일 후에 문교부 장관 이름으로 “국사교육업무에 많이 참고할 것”이라는 회신이 왔다. 다행히 금전 지원까지는 하지 않은 모양이다.

<환단고기> 일역본 발간을 박창암이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유립이 재판에 축시를 보내준 것만 보아도 사실로 보기 어렵고 위 편지에서도 일역본이 나온 것을 어떤 협잡에 의한 것으로 보는 느낌은 전혀 없다. 이유립이 사망했을 때 박창암은 조문도 왔었는데, 안호상과 임승국은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꼭 오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만큼 사이가 벌어져있다는 방증은 될 것이다.

이유립은 1984년에 배달문화원에서 배달문화대상을 받았다. 이때는 창립자였던 안호상이 물러나고 <환단고기> 번역자 중 한 명인 임훈이 원장으로 들어온 때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이유립 사후인 1986년에 임승국은 번역본 <한단고기>를 내서 베스트셀러를 만들었고, 안호상 역시 자신의 책에 마음껏 <환단고기>를 이용했다. 전두환에게 손을 벌린 것은 이유립과 대립했던 쪽도 마찬가지였다. 임승국은 이미 70년대부터 군 출신 정치인 안동준과 공저를 내는 등 친분을 과시했으며 1980년대 들어와서는 임승국은 구국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자유>지에 떠벌리며 자신들을 지원할 것을 읍소했다. 사정이 이러했는데도 오늘날에 이른바 좌파연하는 사람들 중에서 극우의 산물 <환단고기>를 민족의 지보로 떠받드는 것을 보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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