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괴물들'의 참회록...영화<우행록>의 모순과 반전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9.03.04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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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30초.

불 꺼진 상영관에 앉아 직항으로 꼬박 11시간이 걸리는 그 도시의 노면전차를 떠올리는데 걸린 시간. 2월이면 어차피 절반은 궂은 날씨일 테니 스크린 속에서 내리는 비도 어색할 게 없었다. 무엇보다, 무채색의 차창 위를 흐르는, 비슷한 습도이나 전혀 다른 느낌의 공기가 영락없었다. 촬영지야 도쿄 23구 어디쯤이었을 테다. 그럼에도 지난 1월 17일 개봉한 영화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의 인트로를 보던 필자가 떠올린 곳은 분명 바르샤바였다. 한때 배우를 꿈꿨던 친구가 세일즈맨으로 살아가고 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워진 ‘거대한 세트장’을 호밀밭이 아름다운 마조프셰 출신의 친구는 유난히 못 견뎌했다. 어찌됐든 이 묘한 착시현상의 원인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피오트르 녜미스키.

골든글로브와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상에 빛나는 아그네츠카 홀란드, 칸국제영화제, 베니스국제영화제 등, 구미 유수의 영화제를 석권한 거장, 크지쉬토프 자누쉬와 일했던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의 촬영감독. 이번 프로젝트에서 색 보정 작업을 폴란드에서 진행하는 치밀함을 보여준 그는, 폴란드 영화계를 대표하는 젊은 명장(名匠)의 한사람이다.

 

자세를 고쳐 앉고 화면을 응시하면 주간지 기자로 분한 츠마부키 사토시가 특유의 웃음기가 사라진 수척한 얼굴로 미궁의 살인사건을 파헤쳐 들어갔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연결고리의 등장인물이 차례로 민낯을 드러낼 즈음, 필자의 머릿속에서도 바르샤바 방문기의 다음 신이 플래시백 되었다. 느린 카메라워크처럼 육중하게 움직이던 전차 안에서 친구는 폴란드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고, 필자는 『사천의 선인』에 나오는 셴테(Sen Te)의 읍소를 언급했다. 그리고 학창시절 수없이 외우고 또 외웠던 그 대사의 느낌이 대단원에서 모놀로그를 이어가던 히로인(미츠시마 히카리)의 가냘픈 보이스에 이끌려 되살아났다.

 

“당신들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 쉽지가 않아요. 현명하신 분들! 거지에게 동정의 손길을 뻗치면 팔을 송두리 채 빼가고 길 잃은 사람을 돕다간 제가 길을 잃게 되죠. 이런 일들이 너무 많아요. 못 먹으면 죽는데 나쁜 사람이 되기 싫다고 오래 버틸 자 누구예요? 착한 일을 하다 지쳐 녹초가 돼 누워 있으면 파멸이 바로 눈앞에 일이죠. 나쁜 사람이 되기 싫다고 오래 버틸 자 누구예요?”

 

하지만 “나오키 상 노미네이트 원작의 범죄 스릴러”라는 선전 문구를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던 이들 때문이었을까. 이시카와 케이 감독과 인터뷰 일정을 잡고 나서도 『사천의 선인』에 대한 필자의 연상이 ‘너무 간 것 아닐까’ 하는 고민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을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같은 이야기”라고 언급한 《문예춘추》 기사를 읽기 전까지.

그렇게 대가의 조감독 출신을 거리낌 없이 “애제자”라 부르며 띄워줄 만큼 ‘전통적 도제시스템’이 맹위를 떨치는 환경에서, 불쑥 유학을 다녀와(일본에서는 영화 공부를 하러, 심지어 ‘동유럽’으로 유학을 가는 것은 일종의 ‘이색 경력’이다) 혈혈단신으로 인고의 세월을 버틴 끝에, 상업적 성공과 더불어 베니스국제영화제를 비롯한 9개 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 및 노미네이트라는 기염을 토하며 장편영화 감독에 데뷔한 그를 만났다.

2월 1일 일본에서 개봉한 <버닝>을 본 이시카와 케이 감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중) 최고였다”며 벅찬 감상을 드러냈다. 그는 201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프로젝트 피칭에 참가해 최고상(부천상)을 받은 경험도 가지고 있다. ⓒTraces of Sin Production Committee

홍상현:

마침 좋은 화제가 있다. 지난 2월 1일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을 영화화한 <버닝>이 일본에서 개봉했다. 201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젝트 피칭에 참가해 최고상(부천상)을 받고,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의 한국개봉이 비원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으니 아마 보았을 것 같은데. (웃음)

이시카와 케이:

굉장히 좋았다. 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었고, <노르웨이의 숲><하나레이 베이> 등도 영화화되었지만 그 중 최고였다. 하루키의 소설은 메타포(metaphor)가 많이 쓰이는 까닭에 어떤 의미에서 영화적이라 할 수 있으나, 영화적인 문법에 담아내기란 아주 어렵다. 역시 영화작가로서 확고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캐스트의 역할도 결정적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또한 어딘가 현실과 동떨어져있는 부유감(浮遊感)도 있는데, 우리와 닮은 한국의 배우들에 의해, 좀 다른 감각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이 너무나 “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 ‘제3국의 작가’라는 의미의)”적이었다.

 

홍상현:

필자가 <버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다”던 유아인의 대사에서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의 세계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묘사되는, ‘계급사회 저변의 인간이 위를 올려다보다가 맛보는 좌절’이랄까.

이시카와 케이:

『우행록』을 영화화 하면서 『위대한 개츠비』라고 생각했던 걸 기억한다. “일본은 격차사회가 아니라 계급사회”라는 대사도 제가 시나리오 작가에게 넣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일본에서 흔히 언급되는 ‘격차’라는 말은, 왠지 “열심히 하면 올라갈 수 있다. 격차는 어디까지나 차이일 뿐이니까 극복 가능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아메리칸드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환상에 불과하다. 이렇듯 폐쇄적인 일본사회의 구조를 드러내고 싶었다.

다만 <버닝>에서 그려진 세상은 보다 여실하게 보이는 격차, 계급의 이야기로, 제가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과 좀 다른 것 같다.

 

홍상현:

다음으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도호쿠대학 이학부를 나왔다. 학부과정을 무사히 마친 것을 보면 전공이 싫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곧장 폴란드 우츠국립영화학교로 향했다. 아이비리그에 MBA를 하러 간 것도 아니고. (웃음) 버블경제의 붕괴 이후 미취업자가 속출하던 취업빙하기의 한중간에 저소득자로 직행할 수 있는 진로전환을 한 거다. 불안하지 않았나?

이시카와 케이:

불안하지 않았던 건 아니나 그대로 취업을 하면 그야말로 “문화적 저소득자”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 유학이 아닌 정신적 방랑이었지. 모라토리엄을 맞게 되었다면 거기까지였을지 몰라도, 저로서는 그 시기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홍상현:

이력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게 하나 더 있다.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이 무려 당신의 ‘데뷔작’이라는 것이다. 전작은 모두 단편영화였다.

이시카와 케이:

그 동안의 경력이 모두 단편이었던 것은 단지 장편을 찍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폴란드로 돌아간다고 쳐도 어디서 굴러온 말 뼈다귀인지 알 수 없는 젊은 놈에게 투자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나마 일본으로 돌아와 완전한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했던 걸 생각하면 순조롭게 데뷔한 편 아닐까. (웃음)

이야기의 촬영지는 분명 도쿄 23구 어디쯤일 테지만, 스크린 위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전개된다. 젊은 명장(名匠), 피오트르 녜미스키는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의 색 보정 작업을 모두 폴란드에서 진행했다. ⓒ Traces of Sin Production Committee

홍상현:

본격적으로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 이야기를 해 보자. 필자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육중한 움직임으로 버스 안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시선에 압도당했다. 그리고 그 ‘불가사의한 힘’이 영화가 끌날 때까지 필자를 놓아주지 않더라. 무겁고. 심지어 기괴한 느낌마저 들지만, 지극히 아름다운 빛과 색채. 지금까지의 일본영화에서 보던 화면과 달랐다.

이시카와 케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솔직히 그 부분과 관련해서는 분석을 하기가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영화문법의 태반이 ‘폴란드어’인 까닭에, 일반적인 일본영화와 무엇이 다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냥 제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영화화를 했다는 정도로만 말씀드릴 수 있겠다.

 

홍상현:

피오트르 녜미스키가 촬영을 맡아주었는데, 필자는 역으로 이것이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이라는 이야기의 보편성과 이어진다고 본다. ‘(장르를 구분하는 기준으로서의) 추리물’을 넘어 ‘인간의 내면을 묘사한, 보편적이고도 사실적인 이야기’라는. 피오트르는 세계의 영화제를 누비던 크지쉬토프 자누쉬의 촬영감독이기도 했다.

이시카와 케이:

자누쉬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대학에서 물리학과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쇼트를 구성하는 방법 등에서도 저로서는 무척 친근감이 느껴진다. 피사체에 너무 가까이 가지 않고, 늘 그 주변의 화학반응을 응시하는 느낌. 전체를 구축하는데 있어서도 어딘지 건축물을 떠올리게 하는 편집을 하고. 당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만 보편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면 그와 한 팀으로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는 피오트르가 직접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에 자신의 방법론을 도입했다는 게 클 것이다.

 

홍상현:

도대체 그를 어떻게 설득했나? 그가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의 커다란 특징, 즉, 동시대 일본영화와의 차이에 대한 설명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이시카와 케이:

도메스틱(domestic)한 소재였기에 피오트르가 이해할 수 있을지 불안했지만 최종적으로 각본을 가장 좋아해 준 사람은 그였던 것 같다. 지엽적인 부분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인간 감정의 보다 보편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것이 하나의 요인 아니었을까.

또한 이는 일정정도 제가 기대한 부분이기도 했다. 폐쇄적인 일본 영화계에서 폴란드 카메라맨을 불러다 일본의 스태프와 일하게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일본인이 평소에 바라보는 일본’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관점에서 이 사회를 찍고 싶었다. 리얼할 필요는 있었지만 관객들이 몰입감보다 자신과, 자신이 사는 세계를 객관화시키는 가운데 이 이야기를 보아주었으면 해서였다. 저 또한 혹시 남들에게 이 영화의 등장인물처럼 보이는 것 아닐까하는 의심과 함께.

츠마부키 사토시는 특유의 웃음기가 사라진 수척한 얼굴로 미궁의 살인사건을 파헤쳐 들어가는 츠마부키 사토시는 ‘스마트, 그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 Traces of Sin Production Committee

홍상현:

각본을 쓴 무카이 코스케의 이름도 눈에 띤다. 한국의 팬들에게 익숙한 배두나의 출연작 <린다, 린다, 린다>를 봐도 알지만, 그는 주로 오사카예술대학 동창으로 학생시절부터 함께 독립영화를 만들던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과 작업했다. 이 콤비의 작품 중에는 이 영화처럼 츠마부키 사토시가 기자로 등장하는 <마이 백 페이지>도 있지만, 정작 필자는 작품의 ‘이시카와 색’이 너무 강렬해서 그의 손길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이시카와 케이:

무카이 작가는 제가 늘 각본을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다. 동세대이기도 하거니와, 어딘가 드라이한 공기감(空氣感)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는, 일본의 각본가 중에서는 매우 드문 타이프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코엔 형제에 가까운 서사를 창조해내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라고 생각한다.

 

홍상현:

다음은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에 일관되는 정서에 관한 것. 이는 작품에 참여한 메인 캐스트와 스태프의 ‘세대’와 연관된다. 70년대와 80년대 중반 사이에 태어나 버블경제의 붕괴 이후의 암울한 사회상과 맞닥뜨리게 된 사람들. 구조조정의 폭풍 속에서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자기책임론을 강요받으며 느꼈을 그들의 분노. 그래서일까, 이 작품에서는 심지어 대학시절의 회고에서도 약육강식의 살풍경이 전개된다.

이시카와 케이:

확실히 근저에는 우리 세대의 ‘분노’와 같은 감정이 있었을지 모른다. 윗 세대는 버블세대의 생존자들로, 노는 데는 재능이 있지만 전혀 책임감이 없다. 아랫 세대는 경기가 부양되면서 견실하게 취업을 하게 되었지만 전혀 향상심이 없다. 그 사이에서 부도 명성도 가지지 못했는데 “이렇게 된 것도 자기책임”이라는 소리나 들으면서 “꿈을 가지고 살라”는 훈계 속에 살아가는 세대의 이야기니까.

 

홍상현:

그와 관련된 것이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의 이른바 ‘사회병리학적 접근’이다. 친구와의 관계, 심지어 가정에서조차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하는 주인공 남매(츠마부키 사토시와 미츠시마 히카리)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는 공간은 흑과 백의 미장센이 강렬하게 대비되는 ‘정신병원’과 ‘감옥’이다. 또한 이 공간을 오가는 두 사람과 그 주변의 인물의 색은 ‘그레이’고. 선악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다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단지 시각적인 연출이 아니라 연출의 의도와도 연관된다고 생각하는데.

이시카와 케이:

이 부분은 미츠시마 히카리의 인물조형(人物造形)에 시각설정이 영향을 미쳤다.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당시, 미츠시마가 극중의 미츠코와 관련해서 ‘과거보다 현재 쪽이 더 삶의 촉각과 생기가 있는 거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지금까지의 삶을 통틀어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주는 일이, 바로 정신과 의사와의 대면에서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거였다. 이러한 착상에 따라 정신과 진찰실이 빛으로 가득 찬 교회를 연상시키는 공간으로 변경되었다.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에서 기자로 분 한 츠마부키 사토시는 상대 배우와의 ‘거리감’에 따라 취재용 IC녹음기가 놓인 위치까지 바꾸는 치밀한 연기를 선보였다. ⓒTraces of Sin Production Committee

홍상현:

드디어 모두들 극찬하는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의 연기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캐스트에게는 결코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선량해 보이지만, 실은 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악행의 자서전을 써야할만한 사람들. 필자 개인적으로도 연기를 배운 적이 있지만 이런 배역의 경우 캐릭터를 잡는 데도,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츠마부키 사토시도 프리프로덕션과 프로덕션에서 거의 당신과 함께 일상생활을 했을 정도였다고 들었다.

이시카와 케이:

긴 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대화를 그렇게까지 길게 하지는 않았다. 츠마부키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의 정밀도로 캐릭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즉, 세세한 설정을 진행했다기보다 우리가 같은 비전을 보게 될 때까지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현장에서는 디테일한 디렉팅을 거의 하지 않게 되더라. 대부분의 경우 “한 테이크만 더”라고 하면, 내가 원하는 연기를 새롭게 제시해주었다.

 

홍상현: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츠마부키가 현장에서 기자를 연기하는데 취재용의 IC녹음기가 놓여있는 위치까지 몇 번에 걸쳐 물어볼 정도로 완벽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는 후문이다. “스마트, 그 이상” 아닌가?

이시카와 케이:

일예로, IC녹음기를 책상에 두면, 그것이 취재상대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역으로 수첩에 메모를 하면 상대에게 또 다른 인상을 주겠지. 경우에 따라서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멍하니 이야기를 들을 지도 모른다. 이런 구분을 통해 많은 극중 취재상대와 츠마부키 사이의 거리감을 미세하게 조정했다. IC녹음기의 위치는, 단순한 ‘위치’가 아니라 상대와의 ‘거리감’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소통을 할 수 있어 연출가로써 대단히 행복했다.

이시카와 감독은 미츠시마 히카리의 독백 장면을 감독인 자신조차 넋 놓고 바라보았노라고 술회했다. ⓒTraces of Sin Production Committee

홍상현:

미츠시마 히카리를 보면서 확신한 것이 있다. 그녀는 동기생 중에 현역의 배우도 있는 제가, 마흔이 넘은 이날까지 보지 못했을 정도의 천재. 진정 ‘연기에 미친’ 천재라는 것이다.

이시카와 케이:

미츠시마 히카리가 동세대 연기자 중에서도 출중하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거다. 그녀는 예리한 나이프다. 겨눈 방향만 틀리지 않으면 어떤 장면도 잘라내 샤프(sharp)하게 만들어버린다. 장래에는 아마 지난해 돌아가신 키키 키린씨와 같은 연기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홍상현:

미츠시마가 고린도 전서 13장을 모두 암송하며 절규하는 <러브 익스포져>의 장면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지만, 그 장면에는 베토벤 교향곡 제7번, 제13악장이라는 BGM, 즉, ‘극대화장치’가 있었다. 그러나 정신병원 장면에서 이어지는 고백, 그리고 다른 사람처럼 톤을 바꿔가면서 오빠에 대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대사뿐이다. 필자의 이성은 이런 인물 때문에 울고 싶지 않다고 비명을 지르는데, 감성은 눈물을 참지 못하는 순간을 경험했다.

이시카와 케이:

그 독백 장면은 현장에 있던 저조차 “엄청난 게 카메라에 담기고 있구나” 감탄하며 넋 놓고 바라봤다. 사실, 이 독백은 원래 그다지 긴 대사가 아니었는데, 저와 각본가인 무카이 씨가, 미츠시마 히카리의 긴 대사를 들어보고 싶다면서 덧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기대이상을 보여주었다.

 

홍상현: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 캐스트의 열연을 보고 있노라면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오랜 시간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보리니”라는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아마추어가 아닌 분들에게 실례인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후유증은 없었나? (웃음)

이시카와 케이:

제가 아는 한 다들 건강하다. (웃음)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 이후, 모두 저마다 멋진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기쁘다. 언젠가 현장에서 재회하고 싶다.

지난 해 말 서른세 번째 생일을 맞은 미츠시마 히카리의 영화계 경력은 22년.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를 통해 그녀는 ‘연기에 미친다’는 말의 의미를 보여준다.ⓒTraces of Sin Production Committee

조금은 감정이 복잡해지는 인터뷰였다.

물론 압도적인 완성도와 영화적 재미를 가진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 이야기를 예의 시원시원한 어조로 들려준 이시카와 감독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허나, 심하게 늦었던 국내개봉 시기나 턱없이 모자랐던 스크린 탓일까, 내내 고전을 면치 못하다 이내 서울의 개봉관에서도 보기 힘들어진 상황에 취재를 진행하다 보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독인터뷰이니 한 달 정도만 서둘렀어도 작품을 소개하는데 아주 작은 도움이나마 되지 않았을는지.

그렇다 하더라도 웰메이드 영화란 시기와 무관하게 관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에 대한 자천의 메시지를 부탁하자, 이시카와 감독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은 범죄 스릴러로 분류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궁극의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과정이나 결과가 틀릴 수도 있겠지만 그 마음만은 진실이니까요. 이를 사람들은 더러 '우행'이라 부르는데요. 무엇이 전정 어리석은지,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던진 차기작에 대한 질문에 이시키와 감독은 나오키 상을 받은 온다 리쿠의 나오키 상 수상작, 『꿀벌과 천둥』을 영화화한 동명타이틀 작품으로 국제 피아노콩쿠르를 무대로 한 군상극이자 음악 영화인데, 장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과 거의 같은 멤버가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말을 곱씹으며 필자가 유쾌한 미소를 지은 것은 대담을 마친 뒤 벌써 준비된 <꿀벌과 천둥>의 홈페이지를 열어본 순간이다.

“감독ㆍ각본ㆍ편집, 이시카와 케이”.

아직 봄도 오지 않았건만, 가을시즌 기대작 리스트에 벌써 한 작품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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