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3.1운동 민족대표 모두 친일? 변절자는 5명 뿐

  • 기자명 이문영
  • 기사승인 2019.03.0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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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삼일운동하면 반사적으로 '민족대표 33인'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들 33인에게 백업 요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모른다. 33인은 잡혀갈 것이므로 그 후 시위를 지휘할 사람들을 백업요원으로 둔 것이다. 이들 15명을 33인에 포함하여 민족대표 48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 책에는 뒤지니 49인으로 나오는데 언제부터인지 48인으로 변해 있다.)

사람들은 흔히 만해 한용운 이외에는 민족대표가 모두 변절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쉽게 한다. 정말 그럴까? 민족대표 중에는 옥고로 숨을 거둔 사람도 있고(4명), 이후 계속 독립운동을 해나간 분들도 적지 않다. 이들이 민족대표로 나섰던만큼 지명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더 힘든 삶을 살았을지 되새겨 봐야 마땅하다.

3.1운동 민족대표 대부분이 친일 변절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다.

포털에 검색하면 민족대표 대부분이 친일활동을 했고 변절했다는 주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찾아보면 잘못이 고쳐지지도 않고 꾸준히 나온다. 예를 들면 우석훈의 책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에서도 이런 주장이 검증되지 않은 채 버젓이 나온다.

그럼 이들이 누구였는지 살펴보자. (순서는 독립선언서 서명 순.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이 각각 교파를 대표해 서명한 후 당시 ㄱㄴㄷ 순으로 서명했음. 양, 유, 이씨 성은 ㄹ항목에 들어감. 세부 항목까지 일치하지는 않고 초성만 기준으로 서명한 듯.)

민족대표 33인.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1. 손병희 : 1861-1922 (천도교, 59세)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동학혁명 가담. 1897년 동학 3세 교주가 됨. 1907년 천도교로 개칭. 천도교를 대표하여 서명. 3.1운동으로 3년형을 받고 복역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후 사망. - 일제 때는 거의 죽을 지경이 되면 밖에 나와서 죽게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도산 안창호도 풀려난 지 얼마 안되어 죽었지요. 심산 김창숙의 경우에는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풀어주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2. 길선주 : 1869-1935 (기독교, 51세)
1907년 목사가 된 한국최초 목사중 한 명. 기독교계 장로교파를 대표하여 두번째로 서명함. 평양 장대현교회 설립.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고 기독교인이 됨. 태화관에는 서울 도착이 늦어 불참. 3.1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으나 무죄로 풀려났음. 33인 중 유일하게 무죄를 선고받음. 이후 전국을 돌며 전도에 힘씀. 1927년 <말세론>을 저술. 평남 고창 교회에서 뇌일혈로 사망

3. 이필주 : 1869-1942 (기독교, 51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사. 서울 출생. 기독교 감리교파를 대표하여 세번째로 서명함. 3.1운동으로 2년 복역. 이후 교육 사업에 힘씀. 신사참배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

4. 백용성 : 1865-1940 (불교, 56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전북 장수 출생. 해인사 승려. 불교계를 대표해서 네번째로 서명함. 3.1운동으로 1년 6개월 복역. 이후 일본의 대처승 정책에 반발하여 불교계 정화를 위해 노력. 대각사 창건. 태평양 전쟁 소식을 듣고 피를 토한 뒤 열반.

5. 김완규 : 1876-1949 (천도교, 44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서울 출생. 여수통신주사, 한성부주사 역임.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출옥 후 천도교 도사가 되어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계속함. 해방후 국민회재정부장 역임

6. 김병조 : 1877-1948 (기독교, 44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사. 평북 정주 출생. 태화관 모임에는 참석치 못함. 3.1운동을 선천에서 지휘. 상해로 망명하여 임정에 가담함. 1924년 만주에서 저술 활동 및 후진 양성에 힘씀. [한국독립운동사략] [대동역사] [독립혈사] 등 간행. 해방 후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 창당. 1946년 광복회라는 비밀결사 결성하여 지하운동을 펼치다가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사망

7. 김창준 : 1889-1956 (기독교, 31세)
민족대표 중 가장 어리다. 숭실중, 숭실전문대를 거쳐 일본 유학도 했다. 독립선언서를 선천에 보내는 임무도 수행했다. 3.1운동 후 1925년 함경북도 영성 주재소 습격사건을 일으킴. 뒤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복역. 해방 후 사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벌이다가 월북. 1948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이 되었다. 1950년에 서울에서 남조선기독교도 연맹 위원장을 역임. 더 이상의 기록이 없음.

8. 권동진 : 1861-1947 (천도교, 59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서울 출생. 함안 군수, 육군참령 역임. 임오군란(1882) 때 일본 망명. 1906년 귀국하여 대한협회부회장으로 계몽운동에 힘씀. 3.1운동으로 3년간 복역. 신간회 부회장.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 옥고. 해방 후 신한민족당 당수, 민의원 등 역임.

9. 권병덕 : 1867-1944 (천도교, 53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청주 출생. 동학혁명 가담. 손병희 밑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천도교 안에서 전제관장, 금융관장 등을 역임.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소파 방정환의 아버지 방경수와 의형제. 방정환이 손병희의 셋째 사위가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0. 나용환 : 1864-1936 (천도교, 56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평남 성천 출생. 동학 혁명 참가.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11. 나인협 : 1872-1951 (천도교, 49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평남 성천 출생. 동학 혁명 참가.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해방 후 간암으로 사망. 아내는 보따리 장수로 아이들을 키우고 손자 나명재는 평택에서 산부인과 원장 (시사인 49호 보도)

12. 양전백 : 1869-1933 (기독교, 51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사. 평북 의주 출생.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 중 하나. 1892년 김관근의 전도로 서울 도사경회에 참석하고 기독교에 입문. 구성신시교회를 창설. 1894년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음. 1896년 휘트모어 의료사가 되었고 선천 선교부의 개설과 함께 선천읍교회를 시작. 1907년 최초의 7인 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1909년 선천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1911년 105인 사건으로 6년형 선고받고 2년간 복역. 각 학교 및 양로원, 고아원을 세우며 사회운동에 헌신. 3.1운동으로 3년간 복역. 예수교 장로회총회장이 되어 신앙운동과 애국운동에 헌신, 저술 활동에 전념하던 중 별세.

13. 양한묵 : 1862-1919 (천도교, 58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전남 화순 출생. 1905년 헌정동지회 결성. 3.1운동으로 체포되어 그해 여름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

14. 유여대 : 1878-1937 (기독교, 42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사. 평북 의주 출생. 의주에서 3.1운동을 지휘했음. 이때문에 서울에 늦게 도착해서 태화관 모임에는 참석 못함.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1931년 병석에서도 민족계몽을 위한 저술활동을 계속. 증손 유창근은 아버지의 사망으로 의료 혜택이 중단되어 노모의 병원비를 위해 아르바이트 중 (시사인 49호 보도)

15. 이갑성 : 1889-1981 (기독교, 31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경북 대구 출생. 3.1운동때 학생시위운동 조직 및 전단 살포 등 중요임무 수행. 2년 6개월 복역. 1933년 신간회에 관여하다가 상해로 망명. 1940년 귀국했다가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 복역. 
이갑성에 대해서는 그가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이갑성은 '이와모토 쇼이치'(岩本正一)로 창씨개명하기도 했다. 훈장이 삭탈되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이 의혹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작년에 SBS는 특별취재를 통해 이 부분의 의혹을 밝혀보려 했다. 그러나 친일 의혹의 구체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좀더 신중하게 조사해야 할 문제다. 

16. 이명룡 : 1872-1956 (기독교, 47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평북 정주 출생.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복역.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종교, 산업, 교육 분야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미국으로 망명. 1945년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 창당. 고문 취임.북한 정권의 탄압으로 월남

17. 이승훈 : 1864-1930 (기독교, 56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목사. 평북 정주 출생. 1911년 신민회 사건, 105인 사건으로 연달아 체포. 4년 2개월 옥고. 3.1운동으로 3년형 선고받고 복역중 가출옥. 1924년 동아일보 사장. 물산장려운동. 1926년 오산학교 이사장 재임. 민족의식과 독립정신 고취를 가르치다가 사망. 종손자에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가 있음. 5대손 이기대는 지하 셋방에 살며 포장마차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음 (시사인 49호 보도)

18. 이종훈 : 1858-1931 (천도교, 65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경기도 광주 출생.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 동학 혁명 참가. 손병희와 사돈. 3.1운동으로 2년 복역. 1922년 고려혁명위원회 고문으로 추대. 만주에서 독립운동 중 고문후유증으로 병사. 아들 이관영(손병희의 맏사위)은 1905년 이완용의 집을 방화하고 1907년 경기도 용문산에서 의병으로 일본군과 전투 중 사망했으며 손자 이태운도 보성전문학교에 재학하던 스무살에 3.1운동에 가담했다. 

19. 이종일 : 1858-1925 (천도교, 62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중추원의관 역임. 제국신문, 황성신문 사장 역임. 보성사 인쇄소 사장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3년형을 받고 2년 반 옥고. 고문후유증으로 1925년 별세.

20. 임예환 : 1865-1949 (천도교, 55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평남 중화 출생. 평안도 지방에서 동학 혁명 참여. 천도교 도사가 되어 평양에서 민중 계몽과 포교에 힘썼다.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출옥후 계속 독립운동

21. 박준승 : 1866-1921 (천도교, 54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전북 임실 출생. 장성, 남원, 임실 등 각지 궐기를 지휘.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중 사망

22. 박희도 : 1889-1951 (기독교, 31세)
변절
황해도 해주 출생. YMCA 간사로 3.1운동 참여. 본래 3.1운동과 별개로 기독학생 중심의 전민족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음. 기독교 측의 운동자금 출납 담당. 2년 복역. 이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또 2년간 옥고. 1927년 신간회 본부간사. 그러나 1931년 [동양지광] 창간 후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 행위. 조선자치를 위해서 단체를 결성하려고 노력하기도 함. 1943년 학병 독려 강연회 가짐.1948년 반민특위에 체포됨.

23. 박동완 : 1885-1941 (기독교, 35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경기 양평 출생. 3.1운동으로 2년 복역. 신간회 상임간사 역임. 1931년 만보산 사건 때 재만동포옹호연맹 재무부장으로 현지 시찰. 1932년 하와이로 망명한후 흥업구락부와 연락하며 국내 독립운동을 지원 중 병사.

24. 신홍식 : 1872-1937 (기독교, 48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사. 충북 청주 출생.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출옥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신앙운동과 독립운동을 계속. 신사참배 거부 등으로 여러 차례 투옥됨 . (이 분의 이름을 신흥식으로 잘못 쓰는 것을 종종 본다. 한자로 申洪植이라 쓴다. 이름조차 틀리다니 너무 하지 않은가?) 손자 신덕수는 가세의 몰락으로 젊은 시절부터 막노동판을 전전함 (시사인 49호 보도)

25. 신석구 : 1875-1950 (기독교, 45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3)
목사. 충북 청주 출생. 1908년 기독교인이 됨. 1917년 목사 안수를 받고 서울 수표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 3.1운동에 참여.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신사참배, 전승기원예배 등 거부로 여러번 투옥됨. 1946년 3.1절 기념방송 사건으로 구금. 1949년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북한정권으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고 한국전쟁 때 총살됨.

26. 오세창 : 1864-1953 (천도교, 56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서울 출생. 농상공부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만세보 사장, 대한협회 부회장, 대한민보 사장 등 역임. 3.1운동으로 3년간 복역. 서예가로 유명

27. 오화영 : 1880-1962 (기독교, 40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89)
서울 출생. 3.1운동으로 2년 6개월 복역. 1927년 신간회 간부.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체포. 1939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6개월 구금됨. 해방 후 과도정부 입법의원 역임. 한국전쟁 때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납북됨.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치. 1996년 국립묘지에 위패 안장. 

28. 정춘수 : 1875-1951 (기독교, 45세)
변절
충북 청주 출생. 3.1운동 때 남감리교회 목사로 참여. 태화관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함. 1년 6개월 복역. 1927년 신간회 본부 간사. 1937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05일간 고문을 당함. 1938년 친일단체인 경성기독교연합회 부위원장이 됨. 1941년 국민총력연맹 가입. 조선임전보국단 참여. 그러나 적극적인 행위는 하지 않았다 함. 창씨개명함.

29. 최성모 : 1874-1937 (기독교, 47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사. 서울 출생. 3.1운동으로 2년 복역. 출옥후 만주로 망명. 봉천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망.

30. 최린 : 1878-1958 (천도교, 42세)
변절
함남 함흥 출생. 최남선을 보호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자기가 썼다고 주장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 3.1운동으로 3년 선고 받고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 가출옥 당시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간 것으로 보임. 이후 자치운동에 힘을 기울이다가 전면적 친일로 넘어감. 1931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매일신보 사장,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역임. 한국전쟁 때 납북됨. 창씨개명함.

31. 한용운 : 1879-1944 (불교, 41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충남 홍성 출생. 3.1운동으로 3년 복역. 1925년 [님의 침묵] 발간. 1926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1931년 조선불교청년동맹 주도. 1937년 만당 사건으로 체포. 

32. 홍병기 : 1869-1949 (천도교, 51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경기 여주 출생. 3.1운동으로 2년 복역 후 만주로 망명. 만주에서 고려혁명당 고문이 되었다가 신의주에서 체포. 다시 2년간 옥고. 출옥 후 천도교 장로로 교세 확장과 민족 운동에 힘씀. 손자 홍재웅은 닭튀김 장사를 하다가 사업에 실패한 후 아내가 동사무소 공공근로를 나가 생계를 유지하고 있음 (시사인 49호 보도)

33. 홍기조 : 1865-1938 (천도교, 60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평남 용강 출생.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출옥 후 고향에서 청년들을 지도하던 중 병사

여기까지가 서명한 33인이다. 이후는 백업 요원들 명단. 시위를 조직, 확산시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34. 송진우 : 1889-1945 (교육계, 31세)
건국훈장 독립장(1963) 
3.1운동으로 1년 6개월 복역. 출옥 후 동아일보 사장 취임.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사임. 1945년 총독부로부터 정권 인수 제의를 받으나 거절. 해방후 한민당을 결성. 복간된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 암살됨.

35. 현상윤 : 1893-? (교육계, 28세)
변절. 3.1운동으로 2년 복역했으나 무죄를 받음. 1937년 시국순회강연을 시작으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유도연합회, 녹기연맹 등의 친일단체에서 간부를 역임. 해방 후 고려대 초대 총장 역임. 한국전쟁 때 납북. 

36. 최남선 : 1890-1957 (문인, 31세)
변절
3.1운동으로 2년 6개월 복역. 독립선언서 기초안 작성. 1927년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위원. 1938년 중추원 참의. 1943년 학병지원 연설. 해방후 반민특위에 기소됨. 

37. 함태영 : 1872-1964 (기독교, 48세)
건국훈장 독립장(1962) 
함북 무산 출생. 한성재판소 검사, 대법원 복심법원 판사 역임. 태화관에 참석하였음. 3.1운동으로 3년 복역. 1952년 3대 부통령 역임.

38. 강기덕 : 1890-? (학생, 31세)
건국훈장 독립장(1990) 
함남 덕원 출생. 3.1운동 당시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현 고려대) 학생대표로 파고다 공원 시위 계획, 주도. 이갑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500장을 받아 각 학교에 배부. 3.1 운동 당시 1년 6개월 옥고를 비롯 총 3차에 걸쳐 8년간 투옥. 한국전쟁 때 납북됨.

39. 김원벽 : 1894-1928 (학생, 27세)
건국훈장 독립장(1962) 
황해도 안악 출생. 연희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 3.1운동으로 2년 복역. 출옥 후 신생활사, 시대일보사 종사

40. 박인호 : 1855-1940 (천도교, 66세)
건국훈장 독립장(1990) 
충남 예산 출생. 천도교 4대 대도주로 3.1운동에 천도교 결집을 위해 노력.

41. 노헌용 : 1866-? (천도교, 53세)
황해도 곡산 출생. 천도교 총부 금융관장으로 3.1운동에 필요한 자금조달책으로 활약. 체포되었으나 1920년 복심원에서 무죄 선고받음

42. 김홍규 : 1874-? (천도교, 45세)
대통령표창(1968) 
서울 출생. 3.1운동으로 1년 복역.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인쇄소의 공장감독으로 2만 매를 인쇄하고 각지에 발송함. 체포되어 1년 복역. 

43. 김도태 : 1891-1956 (기독교, 29세)
건국포장(1980)
평북 정주 출생. 사학자. 3.1운동으로 1년 8개월 복역. 1921년 휘문중학교 교사. 해방 후 조선지리학회 회장. 1953년 이화여대 강사. 1954년 서울시사편찬위원

44. 임규 : 1867-1948 (무직, 51세)
대통령표창(1968), 건국포장(1977) 
전북 익산 출생. 1919년 2월 27일 일본으로 건너가 귀족원, 중의원 등 각처에 독립선언서를 제출하다가 체포되었으나 무죄 방면 됨

45. 안세환 : 1887-1926 (기독교, 33세)
건국훈장 독립장(1963), 건국포장(1977) 
평남 순안 출생. 1911년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형 선고. 항소심에서 무죄 방면. 평양 기독교서원에서 독립운동. 3.1 운동 후 임규와 더불어 일본에서 활동. 체포됨. 출옥 후 정신이상으로 의식없이 지내다가 죽음.

46. 이경섭 : 1874-? (천도교, 45세)
건국훈장 독립장(1962) 
황해도 곡산 출생. 3.1운동으로 1년 6개월 복역. 3월 1일에 곡산, 서흥, 수안 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함. 

47. 정노식 : 1899-1965 (무직, 21세)
3.1운동으로 2년 복역. 1921년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입당.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집행위원. 1924년 조선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전형위원. 해방 후 남로당 중앙상무위원. 이후 월북하여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등 역임.

48. 김지환 : 1892-1972 (기독교, 29세)
건국훈장 독립장(1963) 
평북 정주 출생. 3.1운동 당시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독립탄원서 전달책으로 만주에 있던 임시정부의 현순에게 다녀오다 체포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남

49. 김세환 : 1889-1945 (기독교, 21세)
건국훈장 독립장(1963) 
경기 수원 출생. 수원삼일남녀학교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함. 3.1운동 당시 수원, 이천, 충청남북도를 책임짐. 3.1운동을 해외로 알릴 인물들을 모색함. 고등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났으나 수개월 복역하며 고문을 당함. 
내가 예전에 본 책에는 이 분이 포함되어 49인이라고 나오는데, 요즘은 이분을 빼고 48인이라고 하는가 보다. 이유는? 잘 모른다. 그런데 독립운동총서에는 이 분을 포함하고 47번에 기술한 정노식을 제외시켰다. 역시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살펴본 바와 같이 변절자는 5명에 불과하다(이갑성의 경우 아직 불확실하다).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막중한 위치에 있었기에 그 변절은 더 뼈아프다. 그러나 그 어둠의 세월이 너무 길지 않았던가? 그 아픔의 세월이 길고 그래서 그들의 변절이 아프고 서럽기까지 한만큼 자신의 지조를 지키고 산 저 40여명의 애국자들이 더 빛나지 않는가? 누가 이들에게 함부로 돌을 던지는 걸까.

* 이 글은 이문영 팩트체커의 블로그 <초록불의 잡학다식>에 올라온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게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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