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인사가 만든 교가(校歌) 없애면 친일청산?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9.03.11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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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을 며칠 앞두고 흥미로운 기사를 만났다. 전교조 서울지부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기자회견을 통해 ‘학교 내 친일잔재 1차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친일 ‘잔재’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교가’(校歌) 대목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가 113곳으로 확인됐다. 초등학교 18곳(공립 13곳, 사립 5곳), 공립 중학교 10곳, 고등학교 85곳(국공립 14곳, 사립 71곳) 등이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의 동상과 기념관이 있는 학교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서울에서만 벌어진 조사가 아니었다. “전북교육청은 지난해 말부터 도내 학교들의 교가를 조사해왔다. 친일 작곡·작사가가 만든 교가를 찾아 각 학교에 교체를 권고한다는 방침이다. 광주·울산·충북교육청 등에서도 친일 음악인이 만든 교가를 찾아내는 작업이 한창이다. 광주제일고는 친일 음악인으로 분류되는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를 새 교가로 교체하기로 했다.” (중앙일보 2019년 2월 26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사가 교가를 지을 정도라면 꽤 내력과 유서가 깊은 학교들이리라. 짧게는 반 세기, 길게는 7,80년 넘게 불렸을 노래들이 ‘친일 잔재’로 규정되고 ‘권고를 교체’한다 하니 일단은 놀라웠고 다음으로는 궁금했다. 대관절 어떤 이들이 그 교가를 짓고 곡 붙였기에 과감한 교가 교체를 단행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 정도로 씻을 수 없는 친일 행적의 작사 작곡가들의 노래라면 우리 음악 교과서에서도 추방하고 과거 로마 제국처럼 ‘기록말살형’이라도 선고해야 하지 않을까.

툭툭 튀어나오는 ‘친일작곡가’들의 이름들은 무척 낯익었다. “광주 지역의 중·고교와 대학 9곳에서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된 현제명·이흥렬·김동진·김성태 등 친일 음악인 4명이 만든 교가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제명은 대구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때 전시체제에 협조하기 위해 일본 국민음악 보급을 목표로 공연을 개최한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이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광주제일고의 교가는 이흥렬(1909~1980)이 작곡했다. 이흥렬은 1944년 친일음악단체인 대화악단의 지휘자를 맡아 활동했다. 김동진이 작곡한 교가를 부르는 학교는 호남대·서영대(중·고)·금호중앙(여자)중·고, 대동고, 동신(여자)중·고 등이다. 광덕중·고교 교가 작곡가는 친일음악인으로 등재된 김성태다.” (한겨레신문 2019년 1월 10일)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이 사람들이 만든 교가를 친일잔재로 쓸어내야 한다면 이 사람들의 다른 작품들 역시 폐기 내지는 경계 받아야 마땅한 작품들일 터,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의 동심의 세계부터 청소년기 마음의 쉼터였던 음악 시간의 추억까지 그야말로 초토화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민족 정기를 위해 응당 그래야 하며 다른 노래 부르면 된다고 하는 분들도 계실 터이니 한 번 저 네 명의 노래들을 주워 섬겨 보자.

<희망의 나라로> (현제명)는 일착으로 폐기돼야 할 노래다. 친일파 노래 주제에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때도 뻔뻔스럽게(?) 울려 퍼졌을 만큼 대중에게 익숙한 노래라면 응당 배척돼 마땅할 것이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괜히 우울모드가 돼 고향 생각을 하며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불렀던 <고향 생각>도 아니 되며, 짝사랑하던 여자 집 앞을 헤맬 때 어른거리던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도 즐겨 부를 노래가 아니다. 다 현제명의 작품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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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극심했던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크고 노래에 그를 담는 건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그 가운데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푸른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가고파>는 백미 같은 노래다. 하지만 이 노래도 딱지가 붙는다. 친일파 김동진의 작품 아닌가. 이제 곧 목련이 피는 시기가 오면, 벚꽃 필 때의 ‘벚꽃 엔딩’처럼 전파를 수없이 탈 <목련화>도 어김없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역시 김동진의 노래다.

군대 훈련소에서 제아무리 범 같은 장정이라도 펑펑 울게 만드는 노래가 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바로 <어머니 마음>다. 이 노래도 아웃이다. 친일파 이흥렬의 작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동요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섬집 아기>도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한다. 역시 이흥렬 작곡이다. 춘삼월이 왔으니 어김없이 내가 흥얼댈 노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도 언감생심이다.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 가주” 하는 능청순박스러운 가사는 친일 이력의 파인 김동환의 시요, 멜로디는 친일 작곡가 이흥렬의 것인데 어찌 입 밖에 낼 수 있으리오.

봄이 가고 여름 지나 가을이 와도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불어 가을은 깊었네”를 노래하면 곤란하다. 친일 음악가 김성태의 곡을 어찌 혀에 담으랴. 어린 아들이 “방울새야 방울새야 쪼로롱 방울새야....” 재롱을 피우면 군밤부터 한 대 먹일 일이다. “임마 어디 친일파 김성태의 노래를......”하면서 말이다.

뭐 어디 노래가 그것 밖에 없어? 하면서 호령하실 수도 있겠다. 그럼 저 위에 소개된 넷 외에 공인된(?) 친일파 몇 명을 더 소개해 드리겠다. 언젠가 ‘난파 음악상’을 젊은 음악인이 거부하여 화제가 됐던 대표적인(?) 친일파 홍난파. 친일 잔재 청산의 잣대를 들이대자면 우선 남과 북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노래인 <고향의 봄>부터 쓰레기장으로 보내야 한다. 하물며 이 노래는 일제 말의 엄혹한 시기, 요즘으로 치면 농협 기관지 정도의 잡지에 친일 논설 몇 개를 쓴 ‘친일파’(?) 이원수 작사다. 이런 친일파(?)가 합동하여 지은 노래를 어찌 간과할 수 있겠는가.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는 <봉선화>.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고 봉선화 같이 처량한 겨레의 부활을 은유하던 노래 역시 집어치워야 한다. 친일파 홍난파의 노래다. <봄처녀> 제 오시든 말든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든 말든 그런 노래도 허용될 수 없다. 친일파 홍난파의 소산으로 친일의 잔재인 것이다.

하나 더 꼽아 보자. 한국 기독교계의 거목이라 할 강원룡 목사는 “안하면 잡혀갈 형편도 아닌데 굳이 오족협화회 (만주 지역 친일단체) 활동에 능동적으로 나섰고 나에게도 협조해달라고 협박했다.”(신동아 2003년 12월 인터뷰)는 적극적 친일 음악가의 이름을 들고 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윤극영이다. 윤극영의 노래들도 친일 잔재의 무더기에 합류시켜야 마땅하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 (<반달> 중)는 돛대도 아니달고 삿대도 없이 표류시키다 가라앉혀야 하며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도 다음 설에는 꼭 폐기해야 한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가자”는 정겨움도 친일파에 대한 역겨움 담아 물리쳐야 하고,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을 떼서 친일파의 콧구멍에 박아야 하며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는 친일파가 살 뿐이며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넓은 벌판을” 하는 <어린이날 노래>도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서는 안된다. 친일 잔재다.

뭐 위에 기나길게 언급한 노래들 다 무슨 소용 있느냐. 민족 정기를 함양하고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하여서는 아무리 우리 가슴 속 깊숙이 틀어박힌 노랫말과 가락이라도 마땅히 지워야 한다 하실 수도 있겠다. 그분들은 며칠 전 100주년 맞은 3.1절에 태극기 휘두르며 이 노래를 감격에 겨워 부르셨으리라. 혹여 노래를 모르면 삼가 봉청하셨으리라.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나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가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여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참으로 감동적인 <3.1절의 노래>다. 가사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것이다. 최남선이 변절한 뒤 그 집 대문 앞에 가서 “오호라 내 친구 육당이 죽고 말았구나”고 곡을 했다는 이 견결한 역사가의 가사에 노래를 붙인 것은 박태현이라는 작곡가였다. 그런데 그는 일제 말기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외치며 조선인들의 전쟁 참여를 호소한 국민개창운동에 이름을 올렸으며 (매일신보 1943년 8월 27일자) 1945년 5월 해방 직전에도 체제선전 음악회의 일익을 담당했던 (매일신보 1945년 5월 13일자) 사람이었다. 3.1절의 감동을 구현했던 작곡가 역시도 친일의 낙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제헌절 노래를 지은 박태준도 어김없이 친일 행적이 꽤 화려하며 개천절 노래는 아아 통탄스럽게도 위에 언급한 작곡가 김성태이니 도대체 이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다 지우고 다시 만들어야 하나? 차제에 애국가도 친일 행적 명료한 안익태의 것이니 걷어치워야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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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나는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도대체 민족 정기가 무엇이고 친일 잔재는 또 무엇이기에 저 숱한 이름들과 노래를 깡그리 치지도외(置之度外)해야 한단 말인가. 교가를 바꾸자고 했지 누가 저 노래들을 다 부르지 말자 했냐고? 아니 수십 년 역사와 사연을 담은 교가들을 친일파의 이름 탓에 바꾸는 판에 그들의 더러운(?) 마수가 담긴 노래들을 어찌 아이들에게 가르치며 학생들로 하여금 부르게 한단 말인가? 적어도 ‘친일 잔재 청산’ 논리에 따른다면 위에 기나길게 이어붙인 노래들을 ‘버리는’ 게 옳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노래는 창작자들의 것을 넘어 수용자들의 것이 된다. <아침이슬>을 지은 김민기는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역사적으로 수용된 뒤엔 이미 자신의 노래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김민기가 그 말년에 혹시나 어떤 꼴사나운 행보를 보인다고 해도 <아침이슬>의 역사와 의미는 바뀌지 않으며 김민기 때문에 이 노래를 버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참으로 어리석다고 웃을 것이다. 시인 김지하가 최근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다고 한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부르짖던 노래를 버릴 수 있는가? 물론 개인적으로는 자유다. 하지만 먼 훗날 무슨 교육청에서 ‘민주화운동을 배신하고 독재에 부역한’ 사람들의 잔재를 없앤답시고 <타는 목마름으로>를 지워 버리자고 나선다면 나는 자신 있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 것이다. 그건 역사에 대한 섣부른 무례함이고 위험할 정도로 폭력적인 선의(善意)에 다름 아니기에 그렇다.

민족문제연구소의 한 인사는 홍난파의 친일 행적을 밝히면서 이렇게 말한다. “홍난파는 대개 창씨명에 자신의 이름의 흔적을 남기던 것과는 달리 모리카와 쥰(森川 潤), 완전히 새로운 이름으로 창씨개명하였다. 창씨개명이 친일의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만 홍난파의 의식 세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스스로 ‘창씨개명이 친일의 절대적 기준이 아님’을 밝히면서도 ‘이름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이 ‘홍난파의 의식 세계의 일단’이라고 은근슬쩍 구렁이 담을 넘는 셈이다. 이런 아전인수(我田引水)와 넘겨짚기는 기실 또 다른 의미로 익숙하다. 바로 해방과 전쟁 이후 38선과 휴전선 이남에서 ‘빨갱이 사냥’에 골몰했던 사람들의 패턴이기 때문이다. 한 20년 전 선배 한 명은 보안과 형사에게 이런 질문을 집요하게 받은 적이 있었다. “왜 아들 이름을 ‘새날’이라고 지었어? 새날이 무슨 날일까? 내 생각엔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새날이 ‘빨갱이’의 기준은 아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집요하게 물었다.

3.1운동 100주년, 해방 74년에 난데없는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메이드 인 친일파’ 교가 수색이 벌어지고 그를 교체하자는 목소리에 마음 한 구석이 꺼려지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이다. 전쟁 이후 분단 고착화 과정에서 우리는 거의 모든 ‘메이드 인 빨갱이’의 작품들을 지웠다. 월북이건 납북이건 가리지 않고 일단 북에 간 사람들은 빨갱이의 혐의를 썼고 그들은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완벽하게 소거됐다. 정지용의 <향수>,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노래하던 <향수>는 40년 동안 금지된 시였고 우리가 익히 아는 동요 <가을밤>의 작사가는 아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알려졌다. 작사자가 월북했던 탓이다.

과연 이 ‘반공’의 비정함이 오늘날의 추상같은 민족정기가 보여주는 과감성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수많은 세월과 넉넉한 사연들이 휘어감긴 노래들, 친일 작가들이 짓긴 했다지만 그 노래를 부르며 뭉치고 때로는 데모에 나서고 졸업식 날 부르며 뿌린 눈물들이 아롱져 있을 교가들을 일제히 갈아엎자는 정의와, 빨갱이 냄새나는 노래는 정지용이건 임화건 백석이건 보지도 듣지도 부르지도 말라고 눈 부라렸던 결기 사이에 그렇게 큰 간극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역사는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 오늘은 어제의 자식이고 내일은 오늘의 후손일 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어제를 지운다고 해서 오늘이 영광스러워지지도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내일에 이롭지도 않다. ‘친일 잔재’ 청산의 언성 드높은 오늘날, 언젠가 성가신 질문을 던져오는 친척에게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라던 김영민 교수님의 가르침대로 나는 이렇게 질문해 보고 싶다. “친일 잔재란 도대체 무엇인가” “청산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조금은 직접적인 질문을 추가한다.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자문자답하자면, 나로서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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