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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여순사건 수백명 '학살'을 친일파 10여명'처단'으로 축소

기사승인 2019.04.04  1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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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아인 오방간다> 12회 '여순항쟁편' 오류 팩트체크

<도올아인 오방간다>의 마지막 12화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인 제주도 4.3사건과 여순사건을 주제로 했다. 하지만 11화에서도 그랬듯이 12화에서도 사실과 다른, 또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에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김용옥이 시종일관 강조하는 점이 두 사건이 모두 민중항쟁이라는 것이다. 외세를 배격하고 통일을 추구하며 폭정에 반대하는 제주도와 여순 지역 주민의 의사를 미 군정 당국과 이승만 정권이 폭압적으로 탄압하였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비극이 초래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4.3은 분명히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화된 남로당 세력이 무장 및 반정부투쟁을 주도했다고는 하나, 군정당국과 이승만 정권이 제주도민들 처지를 생각하면서 제대로 상황을 진정시켰다면 그런 큰 비극은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태를 격화시킨 가장 큰 원인은 육지 출신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잔학행위에 있었다. 물론 그들이 좌익에 의해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육지에서 온 경찰들은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몇 차례 폭력사태로 인해 동료들이 죽거나 다쳤던 경험이 있었다. 서북청년단은 공산당에 의해 북한에서 쫓겨나면서 재산을 잃고 생명의 위협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경험이 자신을 직접 해치지도 않은 제주도민들에 대한 과도한 폭력 행사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육지 출신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도민들에게 분명한 이방인이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 한참 후 전쟁 중의 일이지만, 제주도민들은 함경도에서 내려온 피난민들과 한국어로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일본어를 써야 했다 – 이방인들에게 위협당한 제주도민들이 항쟁에 나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① 여순사건 당시 봉기한 14연대는 친일파 10여명을 죽였다?

→수백명의 경찰과 우익인사 사살

그럼, 여순에서는 어땠을까? 김용옥은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14연대에서 “동포를 죽일 수 없다!”라고 결심한 병사들이 ‘토벌거부병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는 내용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이승만 정권이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하여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다고 했다.

더불어서 14연대가 봉기하기 전부터 식량 문제로 여수시민들이 곤란을 겪었음을 언급하며, 이 두 가지 문제가 여순 지역 민중들이 이승만 정권을 향해 항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여기서 김용옥은 결정적인 인과관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도올아인 12화에서, 김용옥은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과 여기 동참한 민간인들이 죽인 사람은 ‘대표적인 친일파’ 10여 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식량영단 창고를 열어 시민들에게 식량을 분배한 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친일파를 척결하라. 그래서 한 열 명 정도 대표적인 사람만 처형했다고 하더라. 그러니깐 국민들은 뭐죠? 열광. 야 이제 새로운 세상이 왔다."
-김용옥 발언 중

 

이 부분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10월 19일 밤에 14연대 병사들이 연병장에서 처음 제주도 출동 거부를 선언했을 때, 이들은 동족을 죽일 수 없다는 이유만 대지 않았다. 봉기를 선동한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의 발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지금 경찰이 우리한테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조선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
안종철, 「여순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여순사건 논문집>,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이후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반란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하사관 세 사람을 그 자리에서 사살한 것이었다. 두 번째로 한 일 역시 부대 안팎을 수색해서 장교들을 보이는 대로 사살한 일이었다. 장교들을 죽인 이유는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것이었다.

이게 죽은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김용옥은 ‘대표적인 친일파 열 명 정도’ 죽였다고 했지만, 반란군과 여기 동조한 민간인들에 의해 살해된 경찰과 우익인사의 수는 아무리 적어도 수백여 명을 넘는다. 그 규모에 대해서는 2018년 10월에 이미 뉴스톱에서 다룬 바가 있다.('여순사건'인가 '여순반란'인가 '여순항쟁'인가.)

김형민 팩트체커의 위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병사들과 동조자들은 정부군과 경찰이 학살을 벌이기보다 먼저 여순 일대에서 학살을 벌였다. 경찰이라는 게, 우익인사라는 게, 과연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죽어야 할 만한 죄였을까?

김용옥은 반란군과 동조자들이 ‘대표적인 친일파’만 죽였다고 했다. 이런 인식에는 경찰관은 모두 일제 때부터 복무하던 친일경찰이고 우익은 지주 등 기득권, 당연히 일제 때부터 내려온 친일세력이라는 관점이 기저에 깔려 있다. 과연 그랬을까?

194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예하에 있는 전 경찰관은 2만6677명이고 여기서 일본인이 1만6058명, 조선인이 1만619명이었다(<아 살아 있다, 대한민국 경찰의 혼>, 대한민국참전경찰유공자회 지음, 월간조선 발간, 2003). 해방 이후 일본인들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고, 군정 당국이 인원을 보충하면서 1946년 초에 남한 경찰의 수는 이미 2만5000명에 달한다. 일제 경찰에 복무하던 경력자들이 전부 남한 경찰에 투신했다고 해도 그 수는 불과 40%가량이다. 신입이 훨씬 많았다.

물론 고위직을 차지한 이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부터의 경력자들이었다. 하지만 반란군과 동조자들은 상대가 언제부터 경찰복을 입었는지는 따지지 않았다. 경찰이면 죽였다. 경찰들이 친일파여서만이 아니라, 군대와 대립하는 경쟁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군정 당국은 치안유지를 위해서 경찰을 주력으로 하고, 경비대는 보조적인 역할을 시켰다. 그래서 국방경비대 창설 시에도 군대가 아니라 ‘경찰 예비대’라면서 그 준말로서 ‘경비대’라는 호칭을 쓰도록 했다. 인원 보충도, 장비 확충도 모두 경찰보다 늦었다. 경찰은 창설 직후부터 미 군정으로부터 새 제복과 미제 카빈총을 받았지만, 경비대는 한참 뒤까지 낡은 일본군복과 일본군 총을 사용해야 했다.

우월감에 차 있던 경찰은 경비대를 매우 하대했다. 외출 나온 경비대 병사에게 시비를 걸어 구타하거나 경찰서로 끌고 가 구금하는 일이 수시로 벌어졌다. 1947년 6월 1일에는 전라남도 영암경찰서에서 경찰관과 말다툼을 벌인 광주 주둔 4연대 하사를 멋대로 유치장에 감금하고, 신병을 인수하러 온 4연대 장교와 헌병까지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눈이 뒤집힌 4연대 병사와 하사관 300여 명이 총을 들고 영암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경찰은 이미 기관총까지 설치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구식 일제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은 화력에 밀렸다. 뒤늦게 따라온 연대장이 경찰서에 들어가 담판을 벌여 겨우 사태를 마무리했지만, 이 ‘교전’으로 4연대는 6명의 전사자와 1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에 반해 경찰은 단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육사졸업생> 장창국 지음, 중앙일보사 발간, 1984).

바로 이 4연대가 14연대의 모체였다. 게다가 14연대가 봉기하기 겨우 한 달 전인 9월 24일에도 14연대 사병 9명이 구례경찰서 경찰관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한 적이 있었다. 그랬으니 지창수의 봉기 선언에서 언급되는 ‘경찰이 쳐들어온다’는 말이 다른 병사들에게도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럼 우익세력은 모두 친일파일까?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 동조자들에게 가족을 잃은 유명한 사람이 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했다고 해서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리는 손양원 목사다. 일제 당국의 신사 참배 요구를 거부하고 5년이나 수감생활을 했던 이 목사는 친일파일까? 우익 학생단체에 가입했으니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은 죽어 마땅했을까?

제주도에 가서 동포를 쏠 수는 없다고 하던 14연대 병사들은, 그리고 그 동조자들은 여수와 순천에서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동포라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 학살이야말로 경찰과 정부군 쪽에서 학살을 벌이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동료를 잃은 경찰관들과 핏줄을 잃은 우익 가족들이 복수하겠다고 미쳐 날뛰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나온 비극이 김용옥이 지적한 손가락 총이다. 여순을 수복한 정부군과 경찰은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학살을 저지른 정확한 범인을 알지 못했다.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오직 복수심이 앞서다 보니 무리한 조치가 잇달았고 결과는 더 큰 규모로 벌어진 학살이었다. 이를 통해 억울한 피해자만 쌓였고, 그 비극은 오늘날까지 상처로 남아있다.

 

②도올, 여순사건에서 남로당 존재 언급 안해

→좌익의 우익 학살사건은 남로당 주도로 이뤄져 

김용옥이 언급하지 않았던 또 한 가지는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존재와 역할이다. 남로당은 38선 이남에서의 공산혁명을 기도하고 있었고, 제주도와 여순에서 모두 사태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제주도 주둔 일본군이 묻어놓고 간 무기와 탄약을 발굴해서 무장을 주도했고, 무장대 주요 간부도 모두 남로당이고, 제주도민을 잔혹하게 대한 9연대장 박진경 중령을 암살했다고 해서 김용옥이 크게 칭찬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역시 남로당원이었다.

이 뿐일까? 지창수 상사를 비롯해 14연대에서 반란을 주도한 하사관과 병사도 모두 남로당 조직원이었고, 나중에 참가한 김지회와 홍순석 등 장교들도 남로당 조직원이었다. 단 장교와 사병들이 속한 조직이 달라서 이들은 서로의 정체를 몰랐고, 남로당에 속한 장교 중에 일부도 반란을 일으킨 사병들에게 사살당했을 정도였다. 김지회조차 자칫 죽을 뻔했다.

이런 일이 발생한 원인은 경비대 창설 초기, 불편부당을 표방하면서 입대 지원자의 정치적 성향을 전혀 상관하지 않은 미 군정당국에 있었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 경비대에 들어간 좌익활동 경력자는 상당했고, 이들은 경비대 내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4연대는 14연대 창설요원을 차출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 ‘골칫거리’들을 최대한 몰아서 보내버렸고, 이는 14연대 내에서 좌익세가 강했던 요인 중 하나였다. 4연대와 14연대가 유독 경찰과 충돌이 심했던 데는 이런 배경도 있었다. 심지어 반란 진압 명령을 받고 출동한 4연대 일부 병력은 반란군과 대치하다 장교들을 사살하고 그대로 반란군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군인들뿐만이 아니다. 14연대에 합세한 지역 동조자 중 다수가 좌익세력이었다. 14연대가 여수를 떠난 뒤에야 빈 병영에서 시민들이 총을 얻었다는 김용옥의 말과 달리, 봉기한 직후에 이미 여수 시내 길 안내를 맡을 동조자들이 병영으로 들어와 무기를 받았다. 사전에 연락해둔 동조자들이었다. 이후 벌어진 경찰과 우익세력에 대한 학살도 당연히 동조자들이 주도했다.

먼저 학살을 벌인 측이 정부군과 경찰이 아니라 반란군과 그 동조자들임을, 그리고 그 핵심 구성원은 남로당이었음을 김용옥은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알지 못했을까? 그리고, 여순사건이 여순 주민 전체가 합심해서 일어난 민중항쟁이라고 할 경우 우익세력과 경찰에 대한 학살 역시 모든 여순 주민의 책임이 된다. 그래도 정말 상관없는 걸까?

12화에서 가장 중요한 오류들은 이제 지나갔다. 하지만 작은 오류들은 아직 남아있다.

 

③ 잘못 알려진 신상정보: 일제 경찰이 아닌데 일제 경찰이라고 주장

김용옥은 손선호 하사가 박진경 대령의 당번병이라고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손선호 하사는 의무병으로, 총을 쏜 뒤 잠시 숨었다가 문상길 중위가 연대장이 총에 맞았다고 소리를 치며 의무병을 찾자 다시 나타나 범인이 아닌 척 연대장의 상처를 살폈다.

이어서 김용옥은 진압군에서 악명을 떨친 김종원이 일제 경찰 출신이라고 소개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종원은 1940년에 일본군에 입대해 종전 때는 오장(伍長, 하사)이었다. 해방 이후에 군에 들어오기 전에 잠시 경찰에 있었고, 군대를 그만둔 뒤에도 다시 경찰에 들어갔으나 일본 경찰로 근무한 적은 없었다. 김용옥은 박진경 또한 일본 경찰이었으며 제주도에서 근무했다고 주장했는데, 박진경은 일제 시기 제주도에서 근무한 적은 있으나 경찰이 아니라 군인이었다. 대학 재학 중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육군 소위로 제주도에 있었다. 그리고 제주도 인민해방군 총책이던 이덕구, 남로당 총책이던 김달삼 역시 학병으로 징집된 일본군 소위 출신이다.

 

④ 잘못 묘사된 사실들: 14연대에 보급된 신무기는 겨우 개인화기

14연대는 예하에 있는 3개 대대 중 1대대만 제주도에 파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김용옥은 이를 언급하지 않아 연대 전체가 제주도로 간다는 인상을 주었다.

또한 김용옥은 제주도 파견 직전에 14연대에 신무기가 대량으로 공급되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실상을 보면 38식, 99식과 같은 일본제 소총이 M1, 카빈 같은 미제 총기로 바뀐 정도에 불과했다. 교체한 일제 소총 3천여 정은 상부에 반납해야 했으나, 반란이 일어나면서 그대로 동조자들을 무장시키는 데 쓰였다. 위에서 밝혔듯, 반란 직후부터 소수이긴 해도 동조자들이 영내로 들어와 무기를 받았다.

왼쪽부터 38식 소총, 99식 소총, M1 개런드 소총, M1 카빈 소총. 왼쪽 두개는 한 발 쏠 때마다 레버를 움직여 재장전하는 볼트액션 소총이다. 오른쪽 두개는 한 발 쏘면 다음 탄환이 자동으로 장전되는 반자동 소총이다.

또 김용옥은 미곡수집령에 대해 농민으로부터 시가보다 싸게 곡식을 빼앗아가는 악법이었으며 관리부실로 창고에서 양곡이 썩어가고 있었다는 점만 강조했다. 하지만 당시 남한에서는 해방 이후 국외에서 돌아온 귀환자들과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자들 때문에 인구가 늘어난 데 반해서 북한 지역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비료 공급과 중국에서 들여오던 식량 공급이 모두 중단되면서 식량 부족이 정말 심각했다. 심지어 1946년 11월 28일 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광복 직전 일제 때도 일반인이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만큼은 배급이 나왔는데, 지금은 폭리를 취하는 자들만 있으니 이게 무슨 꼴이냐”는 토로가 나올 정도였다. 이러니 뛰는 쌀값을 잡고 식량 공급을 안정화하려면 군정당국으로서도 공출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다만 기껏 거둔 곡식이 창고 안에서 썩어나간데서 볼 수 있듯이, 당국의 운영 및 관리 능력이 형편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⑤ 실제와 다른 사실 설명: 여순사건에 탱크 동원된 적 없어

김용옥은 순천을 탈환한 진압군이 순천 시민 2천 명을 국민학교 교정에 모아 놓고 싸그리 죽여 버리자 이를 안 여수 시민들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라면 모두 싸우자!” 하면서 1주일을 버텼다고 했으나, 진압군이 여수 공격을 시작한 때는 24일 아침이고 여수가 완전히 탈환된 때는 27일 낮으로 전투 기간은 3일이었다. 김용옥이 말한 1주일이란 반란군이 여수를 장악한 10월 20일부터 여수가 정부군에게 탈환된 27일까지의 기간을 잘못 가리킨 것이다.

김용옥은 진압군이 여수 시내에 탱크를 진입시켰다고 했으나, 그 당시 국군에는 탱크가 한 대도 없었다. 당시 국군이 사용한 장갑차량은 정찰용으로 쓰는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다.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무게는 7.8t, 37mm 포 1문과 기관총 2정을 장착했다.

제작진이 넣은 자막과 영상에서는 진압군이 여수에 들어가는 과정을 “사상 최초이자 최대의 육해공 합동작전”이라고 했다. 분명 신생 한국군이 벌인 최초의 합동작전은 맞다. 하지만 이 표현이 주는 뉘앙스와 달리, 여수 시내를 쑥대밭으로 만들 만한 대공격은 없었다.

육군에서는 이미 언급한 장갑차 외에는 박격포가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해군에서는 부두에 병력을 내려놓은 수송선에서 육군용 박격포를 몇 발 발사하고 경비정이 수류탄만 한 포탄을 쏘는 37mm 함포를 몇 발 쏜 게 고작이었다. 공군은 유일한 항공기인 L-4 연락기를 투입해 정찰과 연락 임무를 맡겼는데, 이 2인승 경비행기는 무장은커녕 무전기조차 없었다. 아군에게 정찰 결과를 바로 전달하려면 종이에 적어 밑으로 던져야 할 정도였다.

또한, 제작진은 여수를 공격하는 정부 진압군의 목표가 “오직 민중”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기는 했을지언정 진압군의 공식적인 공격 목표는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병력이었다. 이 시점에는 이미 반란군은 대부분 지리산 쪽으로 빠져나가고 없었지만, 진압군 지휘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왼쪽은 당시 한국 해군 최대 함정이었던 PG-313 충무공정. 탑재한 37mm 함포는 M8 장갑차가 장착한 포와 같은 것이다. 오른쪽은 한국 공군의 L-4 연락기.

한 방청객이 군인이라고 해도 잘못된 명령에는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자, 김용옥은 옳은 말이라면서 팔만대장경을 구하기 위해 미군의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한 김영환 대령의 사례를 언급하였다. 헌데 이때 해인사에 있던 적은 빨치산이었는데 인민군이라고 소개했다. 여기서 제작진이 사용한 자료영상에는 한국군이 아닌 미군 소속 F-51 무스탕 전투기와 T-6 훈련기가 등장한다. 또, 김영환 대령이 기관총으로 인민군에게 위협사격만 했다고 소개하는 부분에서 등장한 미군 무스탕은 기관총이 아니라 로켓을 발사하고 있다.

T-6 텍산(왼쪽)은 미국이 한국에 전투기를 내주지 않자 국민성금을 모아 캐나다에서 구입한 훈련기다. 기관총 2문이 있어서 어느 정도 전투도 가능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비로소 전투기인 F-51(오른쪽)을 한국에 주었다. 이미 적에게 제트기 공급이 시작되어 공중전에는 나서지 못하고 지상공격 임무를 주로 맡았다.

프로그램 본 내용과는 상관이 없는데, 김용옥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를 직지심경(直指心經)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록상으로는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이 더 오래되었다. 직지심경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필자 임영대는 역사작가다. 역사를 주된 주제로 ‘슈타인호프의 함께 꿈꾸는 둥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청소년을 위한 파닥파닥 세계사 교과서>, <한국전쟁 전략, 전술, 무기>, <서프라이즈 세계 역사 미스터리> 등의 역사 교양서와 <봉황의 비상>, <이순신의 나라> 등의 소설을 썼다. 2019년에는 <월간 독립기념관>에서 <역사를 만든 사람> 코너를 연재하고 있다.

 

임영대 팩트체커 steinho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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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작가다. 역사를 주된 주제로 ‘슈타인호프의 함께 꿈꾸는 둥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청소년을 위한 파닥파닥 세계사 교과서>, <한국전쟁 전략, 전술, 무기>, <서프라이즈 세계 역사 미스터리> 등의 역사 교양서와 <봉황의 비상>, <이순신의 나라> 등의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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