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는 원래 '호위무사'가 아니었다

  • 기자명 김현경
  • 기사승인 2019.05.03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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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기원> 시리즈

우리가 일본 하면 떠올리는 것들 중에는 사무라이가 있다. 앞머리를 밀고 상투를 튼 머리 스타일에 기모노나 일본식 갑옷을 입고 일본도를 허리에 찬 무사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사무라이의 이미지일 것이다. 실제로 무사들은 적어도 근대 이전에 약 200여 년에 걸쳐 일본의 지배층 역할을 수행하였고, 당시 사회에서도 이른바 무사도 정신이 강조되었고 무(武)의 나라라는 자국의 이미지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이 결코 잘못된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14년 6월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 표지를 장식한 일본 아베 총리. 후지산을 배경으로 사무라이 복장을 입고 있다.

이처럼 일본을 대표하는 사무라이가 실은 한반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면 흥미로운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제기된 바 있다. 삼국시대부터 무사 혹은 전사를 가리키는 옛말이 ‘싸울아비’였고, 사무라이라는 말 자체가 바로 이 싸울아비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한때 제법 유행하였다. 예를 들면 국내에서는 2002년 1월에 개봉한 영화 <싸울아비>(감독 문종금, 제작 모닝캄필름)는 ‘위대한 민족혼의 부활’을 표방하며 백제의 싸울아비의 일본 사무라이의 원류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영화가 국내에 개봉되기 직전인 2001년 12월에 작성된 <무카스>의 기사에서는 당시 ‘싸울아비의 일본 사무라이 기원설을 두고 현재 국내의 네티즌과 일본의 네티즌사이에 공방이 오고 가고 있다’면서 인터넷 상의 찬반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위의 기사 작성자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면서, ‘무조건 우기자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 인정받을 수 있도록 지금보다 훨씬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는 한 네티즌의 글을 인용하며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지금은 어떠한지 잘 모르겠지만, 과거에 학교에서 한국의 역사 중 삼국시대에 대하여 배울 때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람들이 각각 일본에 건너가 문물을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부분이 등장했다. 그런 내용을 배우다 보면 일본은 원래 미개한 섬나라였는데 삼국이 높은 수준의 문물을 전달하고 가르쳐서 그만큼 성장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대 일본이 삼국으로부터 배우는 입장에 있었다는 생각은 사무라이도 백제의 싸울아비에서 왔다는 주장을 ‘그럴 만도 하다’고 납득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무카스> 기사 속에 인용된 ‘일본 사이트에 게재된 사무라이의 기원설에 대한 한 일본인의 글’을 읽어보면, 곳곳에 정확하지 않은 번역이 있기는 하지만, 신분이 높은 사람을 모신다는 뜻의 동사 사부라우(さぶらふ, 마지막 ふ는 현대 일본어에서는 ‘후’로만 발음되지만 역사적 가나 표기법에 따라 ‘우’로 읽는다)가 사무라이의 어원이며, ‘싸우다’와 ‘아비’ 모두 현대 한국어인데다 백제의 전사가 당시 ‘싸울아비’라고 불렸는지 증명되지 않았다는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듯하다.

 

교사이자 드라마작가인 김영곤씨는 1962년 방송사극 <강강수월래>에서 싸울아비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어낸다.

 

1981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 '일본의 사무라이 원조는 고대 한국의 싸울아비'. 하지만 싸울아비는 1962년 드라마에서 처음 사용된 신조어였다.

 

그렇다면 ‘싸울아비’라는 말은 언제부터 등장했는가? 이에 대해서는 2008년에 작성된 초록불의 글 <싸울아비에 대한 잡담>에서 자세히 다루어졌으므로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는 것으로 한다. <동아일보> 1962년 11월 20일자 5면의 기사(훈장작가...김영곤씨)에 따르면, 교사이자 작가인 김영곤은 옛날 무사를 ‘싸울아비’라는 현대어로 바꾸어 놓은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하였다. 1962년 이전에 김영곤에 의해 창안된 ‘싸울아비’라는 말이 이후 역사소설과 TV 드라마 등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영화 <싸울아비>로 이어졌다. 원래 옛날 무사 일반에 대한 표현으로 제안된 싸울아비가 백제의 싸울아비로 바뀌게 된 것에 대하여, 초록불은 고구려의 조의선인과 신라의 화랑에 비해 딱히 내세울 용어가 없었던 백제에게 싸울아비라는 단어가 부여되었다고 추론하였다. 김영곤이 싸울아비라는 말을 만들었다는 설은 지금도 유효한 것으로 보이며, <동아일보>에서도 황규인 기자가 해당 기사를 2017년에 다시 언급하면서 ‘싸울아비가 변해 사무라이가 됐을 확률은 제로(0)에 가깝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처럼 싸울아비는 현대에 만들어진 단어이므로 이 말이 사무라이의 어원이 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사무라이라는 말은 무엇에서 유래하였는가? 초록불의 글을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사무라이는 한자어로 侍(모실 시)라고 쓰는데 이것이 바로 사무라이의 어원을 나타내고 있다. 이 말은 일본 헤이안 시대(794-1185)에 귀족들을 경호하던 경호무사를 가리키던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글을 놓고 본다면, 사무라이(侍)라는 말은 원래 귀족들의 호위무사라는 의미의 단어가 무사를 지칭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2017년 기사에서는 사무라이의 어원을 다소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아래에 그 개요를 적어 본다.

 

1) 사무라이는 ‘사부라우(기사에서는 사부라푸)’의 명사형인 ‘사부라이’가 변한 말이다.
2) 사부라이는 ‘주군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 또는 그 사람’, 헤이안시대 때 친왕, 섭관, 공경가의 집안일을 집행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여기에는 ‘싸운다’는 뜻이 없다.
3) 사부라이라는 말에는 헤이안시대 중기에 ‘무기를 들고 귀족의 경호를 담당하는 자’라는 뜻이 생겼다.
4) 막부 시대를 거치며 사부라이의 발음이 사무라이로 바뀌었고, 일반 서민과 구별되는 특권적인 대우를 받는 신분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때도 사무라이=무사는 아니다. 문관도 칼을 차고 사무라이가 되었다.

 

요컨대 侍(모실 시), 즉 ‘사부라이’ 또는 ‘사무라이’라는 말 안에는 애초에 싸움이나 무사와 관련된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3)에서는 헤이안시대에 ‘귀족의 경호를 담당하는’ 호위무사라는 의미가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원래 ‘사부라이’라는 말이 싸우는 행위와는 상관이 없는 말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호위무사를 가리키게 된 것은 맞으니까 크게 문제되는 것은 없지 않는가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과연 그러할까?

사부라이(사무라이)라는 말에 귀족들의 경호를 담당하는 호위무사라는 뜻이 있다는 이야기는 일본어 사전의 해당 단어에 대한 정의에 입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황규인 기자도 일본의 유명한 일본어 사전인 <고지엔(廣辭苑)>을 찾아보았다고 적고 있다.

우선은 <고지엔>의 항목 서술을 아래에 옮겨본다.

 

사부라이(さぶらい, 역사적 가나 표기로는 サブラヒ) 【侍】 (‘사부라우’의 연용형에서 옴)

① 주군의 곁에서 섬기는 일. 또는 그 사람.

② 헤이안시대에 친왕, 섭관, 공경가에 종사하며 집안 사무를 집행한 자. 대부분 5위, 6위에 서위되었다.

③ 무기를 들고 귀족의 경호를 맡은 자. 헤이안 중기, 궁궐의 다키구치(瀧口), 원(院)의 북면(北面), 동궁(東宮)의 다치하키(帶刀) 등의 무사들에 대한 호칭.

(이하 생략)

 

사무라이(さむらい, 역사적 가나 표기로는 サムラヒ) 【侍】 (‘사부라이’가 변한 말)

① ‘사부라이’와 같은 말.

② (‘士’라고도 씀) 무사. 중세에는 일반 서민을 의미하는 본게(凡下)와 구별되는 신분 호칭으로, 기마, 복장, 형벌 등의 면에서 특권적인 대우를 받았다. 에도시대에는 막부의 하타모토(旗本), 번(藩)들의 주코쇼(中小姓) 이상 또는 사농공상 중 사 신분인 자를 가리킨다.

(이하 생략)

 

위의 기술들이 앞서 본 글들에 나타나는 일본어 단어 ‘사부라이’ 혹은 ‘사무라이’에 대한 설명의 바탕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쇼가쿠칸(小學館)에서 나온 <일본국어대사전>에서도 <고지엔>과 거의 비슷한 서술을 하고 있다.

 

사부라이(さぶらい, 역사적 가나 표기로는 さぶらひ) 【侍・士】

〔명사〕 (후세에는 ‘사무라이’. 동사 ‘사부라우(候)’의 연용형의 명사화)

(1) 가까이에서 섬기는 일. 손윗사람의 곁에서 모시는 일. 또는 그 사람. 사부라이비토.

(2) 헤이안시대 이후, 친왕, 섭관, 공경가, 사가(寺家), 사가(社家), 원가(院家)를 섬기며 집안 사무를 관장한 가신. 대부분 5위, 6위에 서위되었다. 또, 무기를 들고 귀인(貴人)의 경호를 맡은 궁중의 다키구치, 원의 북면, 동궁의 다치하키 등의 무사를 말하기도 한다. 사무라이.

(3) ‘사부라이도코로(侍所)’의 약칭.

(4) 세이료덴(淸涼殿)의 전상(殿上) 남쪽에 있는 시신(侍臣)들이 연회를 하는 장소. 시모사부라이(下侍).

(5) 중세, 근세, 무가(武家)에 종사하는 자. 특히, 가마쿠라, 무로마치시대에는 상급 무사, 에도시대 막부에서는 하타모토, 번에서는 주코쇼 이상에 대한 호칭. 무사. 이에노코(家の子). 사무라이.

(6) 사원의 몬제키(門跡), 원가에서 서무를 담당하는 하급 승려.

 

사무라이(さむらい, 역사적 가나 표기로는 さぶらひ) 【侍・士】

〔명사〕 (‘사부라이’가 변화한 말)

(1) ‘사부라이(侍) (1)’과 같음.

(2) ‘사부라이(侍) (2)’와 같음.

(3) ‘사부라이(侍) (4)’와 같음.

(4) ‘사부라이(侍) (5)’와 같음.

(5) ‘사부라이도코로(侍所) (2)’의 약칭.

(이하 생략)

 

하지만 여기서 두 가지 문제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고지엔> ‘사부라이’ 항목의 ③에 대해서 살펴보면, 사부라이가 ‘귀족’의 경호를 맡는다고 하였지만, 그 예로 제시된 무사들은 단순한 귀족의 경호를 맡은 사람들이 아니다. 천황이 거처하는 궁궐의 경호를 담당하기 위해 궁궐 안의 다키구치라는 장소에서 숙직하는 무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다키구치노무샤(瀧口武者), 줄여서 다키구치이다. 천황이 퇴위하여 상황이 되었을 때 그 거처를 원(院)이라고 하는데, 원의 북쪽에 있으면서 상황을 모시는 사람들을 북면(北面)이라고 하였고, 그 중 무사였던 사람들을 북면 무사 혹은 하북면(下北面)이라고 불렸다. 또한 다치하키는 동궁에 거처하는 태자를 경호하기 위한 무사들을 가리켰다. ‘귀족’의 경호라고 하니 일반적인 귀족층의 사병 내지 보디가드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이는 오해이며, 왕가의 경호를 담당하는 무관들의 호칭에 해당한다. 단, <일본국어대사전>에서는 귀족 대신 ‘귀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어 오해의 소지가 다소 줄어들기는 하였다.

둘째, 이러한 헤이안 중기의 다키구치, 북면 무사, 다치하키 같은 이른바 ‘사무라이’들이 중세 막부의 무사 사무라이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문장만 읽었을 때는 두 집단이 무사라는 것 외에는 딱히 공통점을 찾기 어렵고, 오히려 서로 다른 개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대의 언어 사전에 수록되는 항목의 해설은 당시의 학술적인 통설과 일반적 용례에 입각하여 집필되는 것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엄밀하지 못하거나 약간의 오류를 포함하는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단어의 여러 가지 의미가 서로 잘 맞물리지 않거나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사례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어 사전상의 정의만으로 그 존재의 정체나 성격을 규명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는, 가능한 한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사무라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배경, 원래의 말뜻,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바로 그 무사로서의 사무라이에 이르기까지 의미가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싸울아비 기원설과 같은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일본 하면 사무라이라는 단순한 연상을 벗어나, 일본이 처음부터 칼 든 무사들의 나라는 아니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살포시 기대해 본다. (다음에 계속)

 

필자 김현경은 일본 고대사 및 중세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신분과 계층, 혈통과 세습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대학원과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각각 석사학위를 받았고, 교토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다.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어소시에이트 펠로우로 일하고 있다. 논문으로 <원 근신(院近臣)과 귀족사회의 신분질서: 실무관료계 근신을 중심으로>(<일본역사연구> 46, 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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