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인 스타일'의 귀환...1978년 무산소로 에베레스트에 오르다

  • 기자명 탁재형
  • 기사승인 2019.05.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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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봄, 네팔의 카트만두 상공 위를 한 대의 경비행기가 날고 있었다. 이 비행기엔 기압조절 장치가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고도를 높일 수록 기내의 산소는 희박해져 갔다. 히말라야의 산봉우리들이 눈높이로 보이기 시작하자, 탑승자들은 별도로 준비한 산소통에 연결된 마스크를 썼다. 오직 한 사람만이 희박해진 대기를 들이마시며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고도계는 8천미터를 넘어섰다. 대부분의 히말라야 설산들보다 높은 고도였다. 하지만 비행기는 상승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9천미터에 도달하자, 기체는 수평을 되찾았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남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고도에서도 산소마스크 없이 생각하는 것과 감각을 느끼는 것에 지장은 없는 것 같군. 그렇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이름은 라인홀트 메스너. 이탈리아에서 온, 30대 초반의 등반가였다. 

라인홀트 메스너 젊은 시절. 출처: 위키피디아

1953년 힐러리와 텐징의 에베레스트 초등 이후, 히말라야에는 꾸준히 원정대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K2(8,611m)의 초등이 이루어진 1954년부터 56년까지, 해마다 2개의 8천미터급 거봉에 인간의 발걸음이 닿았다. 특히 56년에는 마나슬루(8,156m), 로체(8,516m), 가셔브룸II(8,035m)의 3개 봉우리가 각각 일본, 스위스, 오스트리아 팀에 의해 등정되었다. 1960년이 되자 중국 영토 안에 있어 유럽 등반대가 도전할 수 없었던 시샤팡마(8,027m)를 제외한 히말라야 13좌가 모두 초등되었다. 시샤팡마는 1964년 중국 등반대의 발 아래 놓였고, 이로써 8천미터급 초등을 놓고 벌이던 각국 등반대의 각축은 일단락된다.

이 시기, 각 등반대는 저마다의 국가와 국민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일종의 대표선수단으로 활약했다. 이러한 흐름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알프스에서부터 영국과 이탈리아, 스위스와 독일은 각 봉우리를 처음 오르는 영예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근대 올림픽이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등반 역시 재력과 기술력을 총동원해 자국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홍보의 장이 되었다. 나치 독일이 아이거 북벽을 최초로 오른 네 명의 산악인에게 스포츠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 좋은 예다. 자연스럽게 이들 원정대는 국가의 후원을 받아 대규모 물량과 인원을 동원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른바 ‘극지법’(Polar method)이다. 이는 중세기에 성을 공격하던 전술을 응용한 것으로, 목표지점을 최종 공격대상으로 보고 중간에 물자를 보급할 수 있는 캠프를 여럿 설치하여 차츰차츰 목표에 다가가는 방식이다. ‘임시 기지’(Base Camp), ‘전진 캠프’(Advanced Camp), ‘공격 캠프’(Attack Camp), ‘공격조’(Attack Team) 등 군사용어가 많이 사용되는 것만 보아도 이 방식과 군사작전의 유사성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군대 수준의 노무인력과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며, 원정기간 역시 늘어나게 된다. 국가나 기업의 후원을 받는 등반대에 멤버로 참여하지 않고서는, 고산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힘들게 되는 것이다.

1970년, 히말라야에는 이러한 흐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이단아가 나타난다. 바위와 얼음이 뒤섞여 수직으로 4.5km 높이로 솟아있는 낭가파르바트의 루팔 벽(壁)은 히말라야에서 가장 긴 암벽이자, 그 때까지 아무도 오를 수 없다고 생각되던 난코스 중의 난코스였다. 히말라야에 처음 도전장을 내면서, 보란 듯이 이 코스를 성공시켜 보인 이가 바로 라인홀트 메스너(1944~)다. 이탈리아 쥐트티롤 지방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알프스의 산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성장했다. 그는 히말라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당시 등반계의 주류를 이루던 산소용구의 사용과 대규모 인원을 동원한 극지법 스타일의 등반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산소용구를 사용하는 것을 ‘산의 높이를 낮추는’행위로 여겼다. 즉 산소마스크를 쓴 채 8,800m 높이의 산을 오르는 것은 산소마스크 없이 6,400m짜리 산을 오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리였다. 그는, “인간의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려고 산업 기술을 사용한다면 그만큼 모험 정신은 약화되고 만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가 포터의 도움을 최소화하고, 인공적인 산소 공급 없이, 최소한의 물자와 인원으로 신속하게 산을 오르는 ‘알파인 스타일’을 추구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4천미터 대의 알프스 산을 오르는 방식과 8천미터 대의 히말라야 봉우리를 오르는 방법이 원칙적으로 다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당연하게도,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방식에 비해 몇 배나 어렵고 위험했다. 특히, 8천미터 이상의 고도에서 산소 용구를 이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의사들은 그 높이에서 추가적인 산소를 흡입하지 않는다면, 영구적인 뇌손상이 일어나 여생을 식물인간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산소마스크 없이 9천미터 높이의 대기 속을 비행했던 것은, 이러한 세간의 시각에 맞서 자신의 확신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이었던 것이다.

1978년 5월 8일, 동료 한 명과 7,950m 지점에 위치한 캠프4를 출발한 메스너는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향하는 사투를 시작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수록 바람은 거세졌고, 정신은 흐려졌다. 나중에는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위를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마침내 8시간 후, 메스너와 그의 파트너는 힐러리 스텝을 돌파해 정상에 올랐다. 인류 최초로 산소 용구를 이용하지 않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6주 후에는, 낭가파르바트를 다시 올랐다. 이번엔 무산소 뿐만 아니라 파트너 없는 단독 등정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체력으로 보조 용구의 도움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정의가 그로 인해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1980년 단독으로 에베레스트를 처음 오른 라인홀트 메스너의 모습. 출처: 기네스 월드 레코드

각국의 정부가 사활을 걸고 원정대를 파견하던 시절에서 알피니즘의 초인들이 인간 한계의 지평을 넓혀가던 시절을 지나, 이제 히말라야는 상업등반(Commercial Expedition)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1인당 7만 달러 내외의 비용을 내면, 등정 전문 여행사들이 경험이 풍부한 가이드와 셰르파를 붙여 정상까지 안내해 준다. 베이스캠프에서는 호텔 출신 요리사가 조리한 영양 만점의 식사를 할 수 있고, 6천미터 대에 위치한 캠프2에서도 가스히터를 틀고 온수 샤워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한 해에만 500-600명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다.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고, 개인적인 성취가 폄하되어서도 안될 일이지만, 더 이상 어느 산의 정상에 오른 사실만으로 대단한 화제가 되는 시절은 아니다. 메스너를 비롯한 여러 선구적인 산악인들의 출현 이래, 세계적인 산악계의 흐름은 점점 더 ‘등로주의’(登路主義) 쪽으로 굳어져 갔다. 즉,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어떤 루트를 통해’ 올랐는가가 더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몇몇 스타 산악인들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던 등정 위주의 원정대 모델이 대형 산악사고로 귀결되고 난 후,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더 힘을 얻어가는 중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본능적으로 산을 좋아하고, 자주 찾는 사람들도 없다. 휴일날 불광역이나 도봉산역에 길게 늘어선 등산복의 행렬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해발 2천미터 대의 산도 존재하지 않는 남한에서 그렇게나 많은 걸출한 산악인들이 배출되었다는 것도 수수께끼다. 하지만 이런 생각조차 따지고 보면 케케묵은 ‘등정주의’의 산물일 것이다. 산을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국내 최고봉의 높이가 무슨 상관인가. 세계 산악계의 흐름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으로 바뀌어 온 것처럼, 우리도 저마다의 산에서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가치를 발견하면 될 일이다. 다만 혹시 이번 주말 산을 찾는다면, 우리가 바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갑자기 찾아온 비바람 속에서 당황하지 않도록, 간혹 길을 잃고 헤매다가도 다시 루트를 찾아갈 수 있도록 먼저 산에 오르고 길을 닦은 영웅들의 존재를 생각하며, 하산 후의 막걸리집에서라도 화제에 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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