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를 모시는 신하, 시신(侍臣)이 사무라이가 되다

  • 기자명 김현경
  • 기사승인 2019.05.1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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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기원> 시리즈

2019년 4월 1일, 일본의 새 연호 ‘레이와(令和)’가 발표되었다. 기존의 일본 연호가 중국의 고전을 출전으로 삼았던 것과 달리, 이번에 정해진 연호는 <만요슈(萬葉集, 만엽집)>라는 일본의 고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여 화제가 되었다. <만요슈>는 현재 남아있는 일본의 시가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나라시대(710-794)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안에는 759년까지 만들어진 약 4,500수의 시가가 수록되어 있는데, 왕족과 귀족부터 일반 서민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읊은 작품들이 집대성되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888년에 신라의 위홍과 대구화상이 진성왕의 명에 따라 향가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만든 책 <삼대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삼대목>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만요슈>는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연숙 교수의 완역판이 출간되었다. (<한국어역 만엽집> 1-14, 박이정, 2012-2018)

[사진 1]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새 연호 레이와의 발표에 맞추어 2019년 4월에 전시한 <만요슈> 제5권. 전시된 책은 서예가 후지오카 야스코(1883-1966)가 현대에 필사한 것이다. 연호의 출전에 해당하는 글자에 빨간색으로 표시를 하였다. (사진 김현경)

 

왜 지난 글에서 사무라이 이야기를 하다가 이번에는 갑자기 새 연호에다가 <만요슈> 이야기를 꺼내는지 의아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은 바로 <만요슈>가 ‘사무라이’라는 말의 기원을 탐구하는 데 한 가지 힌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만요슈>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한자로 적혀 있다. 우선 작품의 제목과 설명에 해당하는 부분, 즉 누가 언제 어디서 내지는 어떤 상황에서 작품을 읊었는지가 드러나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것은 한문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 문제는 그 뒤에 이어지는 노래 원문이다. <만요슈>가 편찬될 당시에는 아직 히라가나, 가타카나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였고, 따라서 가사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뜻에 맞는 한자를 적어넣거나 발음이 비슷한 한자를 빌려서 일본어 음절에 대입시키는 방식으로 표기하였다. 이러한 표기 방식은 바로 신라의 향가에 보이는 향찰과 매우 비슷하다. 이런 표기법은 <만요슈>에 보이는 독특한 것이므로 ‘만요가나’라고 불린다. 아래에 제시한 것은 만요가나로 표기된 노래 중의 하나인데, 진하게 표기한 글자가 음과 비슷한 한자를 대입한 부분이며 그 외에는 뜻이 맞는 한자를 표기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만요슈> 제1권 28번 노래

春過而  夏來良之  白妙能  衣乾有  天之香來山

하루스기테 나쓰키타루라시 시로타에 고로모호시타리 아메노카구야마

 

이러한 만요가나 중에서도 음으로 읽는 부분이 바로 옛 일본어의 발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힌트를 제시한다. 훗날 이러한 만요가나가 점차 변형되어 글자의 형태를 간략하게 만들거나 획수를 생략하는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인 것이다. 사무라이라는 말은 원래 ‘사부라이’였고 ‘사부라우’라는 말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지난 글에 언급되었는데, 그렇다면 <만요슈>에서는 ‘사부라이’ 또는 ‘사부라우’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요슈>에는 ‘사부라우’라는 말 대신 ‘사모라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사모라우는 접두어인 ‘사(さ)’에 ‘모루(もる)’라는 동사와 ‘후(ふ)’라는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의 단어라고 한다. ‘모루’는 守る라고 표기하며 지킨다는 뜻을 갖는다. 한국어로 지킨다고 하면 흔히 보호하다, 막다라는 의미를 떠올리지만 ‘지켜보고 있다’, ‘지키고 서 있다’ 등에서 쓰이는 것처럼 주의를 기울여 살피거나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의 ‘모루’도 그러한 의미의 지키다에 가깝게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후’는 반복 혹은 계속의 용법을 지닌다. 따라서 ‘사모라우’는 계속 지켜보고 있다 내지 계속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된다.

 

<만요슈> 제2권 199번 노래 중 일부

鶉成 伊波比廻 雖侍候 佐母良比不得者

우즈라나스 이하이모토리 사모라에도 사모라이에네바

(메추리처럼 기어 돌아다니며 모시려해도 모실 수 없으므로)

 

이 작품은 7세기 말의 유명한 시인인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麻呂)가 696년에 죽은 다케치 황자(高市皇子)를 애도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메추라기는 풀밭의 한 장소에 머물며 기어 돌아다니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히토마로가 자신을 메추라기에 비유하여 황자의 곁에 머무르면서 모시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상황을 읊은 것이 위의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는 시후(侍候), 즉 윗사람 등을 모시거나 돌본다는 뜻의 한자어에 대응하는 일본어 단어의 발음이 사모라이(佐母良比)임을 알 수 있다. <만요슈> 제20권의 4398번 노래에서는 ‘사모라우(佐毛良布)’라는 동사 원형의 발음도 확인 가능하다.

 

이처럼 나라시대에 쓰이던 ‘사모라우’가 헤이안시대에 들어서면 ‘사부라우’로 발음이 변한다.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는 <만요슈>에 수록되지 않은 옛 노래부터 당대의 와카(일본 고유의 정형시)에 이르기까지의 작품들을 모아서 편찬한 시가집으로, 905년에 <고킨와카슈>를 헌상하면서 작성된 서문은 한문으로 작성된 것과 가나 문자로 표기된 것 두 종류가 있다. 이 서문에서 ‘사부라우’를 발견할 수 있다.

 

(한문 서문)

古天子,

每良辰美景,

 

옛 천자는,

좋은 날에 풍경이 아름다운 때마다

(가나 서문)

いにしへの世々のみかど,

春の花のあした, 秋の月のよごとに,

 

옛날의 (여러) 천황들은,

꽃이 피는 봄날과 달이 뜬 가을 밤마다

 

(한문 서문)

侍臣預宴莚者,

獻和歌.

 

연회 자리에 참가한 시신(侍臣)에게

와카를 바치도록 명하셨다.

(가나 서문)

さぶらふをめして, ことにつけつゝ,

うたをたてまつらしめたまふ.

 

곁에서 모시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에 관하여 노래를 바치도록 하셨다.

 

시신(侍臣), 즉 군주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들에 해당하는 말로서 ‘사부라우’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높은 사람의 옆에 있으면서 그 사람을 모시고 명령을 기다리는 행동이 바로 ‘사부라우’인 것이다. 이 표현은 일본의 유명한 고전 문학 작품인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와 <마쿠라노소시(枕草子)> 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용례들은 상급 귀족과 황족들, 궁궐에서 시중을 드는 여성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다. 요컨대 ‘사부라우’는 높은 사람의 곁에 있으면서 모시는 행위 전반에 해당하는 단어이지, 무력에 의한 경호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덧붙이자면 ‘사부라우’는 위의 말뜻에서 출발하여 ‘있습니다’, ‘있사옵니다’ 같이 자신이 여기 있음을 낮추어 칭하는 의미도 가지게 되었고, 나아가 ‘~입니다’, ‘~합니다’와 같은 존경어 표현으로 발전하게 된다. 발음도 사부라우 → 사우라우 → 소로로 점차 변하였다. 중세부터 사용된 일본어 문어체의 한 형식인 소로문(候文)의 ‘소로(候)’가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지금까지 제시한 것은 11세기 초까지의 문헌에 나타나는 ‘사모라우’, ‘사부라우’의 사례들이다. 그런데 헤이안 중기에는 ‘사부라이’라는 말에 ‘무기를 들고 귀족의 경호를 맡은 자’라는 뜻도 생겨난다는 주장이 있음을 지난 글에서 소개하였다. 그렇다면 11세기 이후에 들어 무사와 관련된 새로운 의미가 추가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에 대한 답을 해줄 자료가 바로 헤이안시대의 사전들이다. 물론 사전에 적힌 내용은 사전 편찬자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일반적인 어휘 선택과 말뜻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루이주묘기쇼(類聚名義抄)>라는 한자 사전에서 侍(모실 시) 항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모두 높은 사람을 섬기고 모시며 따른다는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

 

[사진 2] <루이주묘기쇼> ‘侍’ 항목 (<신 덴리도서관 선본총서 루이주묘기쇼 간치인본>, 야기서점, 2018에서 인용)

 

侍: 시(時)와 지(至)의 반절. 하무베리(높은 사람의 곁에서 모시다), 사부라우, 쓰카우마쓰루(섬기다), 지카시(가깝다), 쓰카우(종사하다), 노조무(바라다), 시타가우(따르다)

 

이어서 12세기 후반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로하지루이쇼(色葉字類抄)>를 보도록 하자. 영어에 알파벳 노래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는 가나 문자를 나열하여 노래 가사로 만든 ‘이로하우타’라는 노래가 있다. ‘이로하’란 그 가사의 첫머리에 나오는 세 글자이며, 오늘날 아이우에오로 시작하는 50음 순서가 현대에 들어 정착되기 이전에는 이로하가 가나 글자를 나열하는 기본적인 순서였다. <이로하지루이쇼>는 이름 그대로 이로하 순으로 단어들을 편집하고 내용별로 분류한 사전으로, 한문을 작성할 때 일본어 단어에 맞는 한자를 찾기 위한 용도로서 제작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와 유사한 구성에 이름이 다른 사전도 여러 종류가 있다. 여기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된 두 권짜리 <이로하지루이쇼>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사진 3] 두 권짜리 <이로하지루이쇼> ‘사’편 인사부의 ‘사부라우’(<존경각선본영인집성 이로하지루이쇼 이권본>, 야기서점, 2000에서 인용)

 

‘사’로 시작되는 단어들 중 인사(人事)부에서는 ‘사부라우’의 대표 한자로 候(기다릴 후)를 제시하고, 같은 음을 지니는 한자로 陪(모실 배), 佇(우두커니 설 저), 侍(모실 시) 등을 수록하였다. 이 내용은 두 권짜리 본보다 나중에 편집된 세 권짜리 <이로하지루이쇼>에서도 거의 똑같이 등장한다. 기다리다, 모시다에 해당하는 한자들을 싣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부라우’와 ‘侍’는 역시 곁에서 대기하며 모신다는 뜻의 말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 두 권짜리 <이로하지루이쇼> ‘사’편 인륜부의 ‘사부라이’

 

같은 책의 ‘사’편 인륜(人倫)부에는 ‘侍(사부라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사부라이’는 역시 사부라우의 명사형에 해당하며 ‘높은 사람의 곁에서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사례들을 통하여 ‘사부라이’가 호위무사 또는 무기를 들고 경호하는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높은 사람을 모시는 ‘사부라이’가 어떻게 무사인 ‘사무라이’로 연결될 수 있을까? 힌트는 사실 <이로하지루이쇼>에 숨어 있다. <이로하지루이쇼>는 단어들을 이로하 순으로 정렬하고 각각의 편 안에서 다시 내용별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천상(天象) (2) 지의(地儀) (3) 식물 (4) 동물

(5) 인륜(人倫) (6) 인체 (7) 인사(人事) (8) 음식

(9) 잡물(雜物) (10) 광채(光彩) (11) 방각(方角) (12) 원수(員數)

(13) 사자(辭字) (14) 중점(重點) (15) 첩자(疊字) (16) 제사(諸社)

(17) 제사(諸寺) (18) 국군(國郡) (19) 관직 (20) 성씨

(21) 명자(名字)

 

‘사부라이’는 이 중에서 인륜부에 속하고 ‘사부라우’는 인사부에 들어가 있다. 인사부의 경우, 가나로 표기했을 때 한 글자로 된 단어부터 일곱 글자로 된 단어까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과 기술적인 용어, 산업 용어 등이 포함되어 있고, 음악의 곡조와 관련된 단어들도 수록되어 있다. ‘사부라우’는 가나 네 글자로 표기되는 단어 중의 하나로 모시다, 섬기다라는 뜻의 일반 단어로서 인사부에 포함된 것이다. 그런데 ‘사부라이’가 들어 있는 인륜부는 말 그대로 인륜, 즉 조상과 자손, 친인척에 관한 단어들을 담고 있으며,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과 같은 인간관계의 용어도 여기에 들어간다. ‘사부라이’는 친척과 연관되는 단어는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신분, 지위와 관계된 명사로서 분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부라이’라는 말이 무사인 ‘사무라이’로 이어지게 되는 단서는 바로 신분에 있다. (다음에 계속)

 

필자 김현경은 일본 고대사 및 중세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신분과 계층, 혈통과 세습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대학원과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각각 석사학위를 받았고, 교토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다.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어소시에이트 펠로우로 일하고 있다. 논문으로 <원 근신(院近臣)과 귀족사회의 신분질서: 실무관료계 근신을 중심으로>(<일본역사연구> 46, 2017) 등이 있다.

 

<참고문헌>

峰岸明, 「尊經閣文庫所藏『色葉字類抄』二卷本 解說」, 前田育德會尊經閣文庫 編, 『尊經閣善本影印集成 19 色葉字類抄 2』, 八木書店, 2000

藤本灯, 『『色葉字類抄』の硏究』, 勉誠出版,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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