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는 정말 흑인이었나

  • 기자명 곽민수
  • 기사승인 2019.05.2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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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는 투탕카멘, 람세스 등과 더불어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양 역사 속에 등장하는 미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수학자인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미인계를 사용하여 당대 세계 최고의 실력자였던 로마 출신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유혹하여 그들의 실력을 토대로 이집트를 다시 한번 고대 지중해 세계의 주요한 행위자로 등장시켰다는 역사적 인식이 투영된 말이다. 널리 알려진 말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분히 성차별적 발언이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기원전 1세기, 지중해 세계의 국제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만큼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사진1> 클레오파트라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John William Waterhouse 1888년 작)

 

비록 성공적인 결과를 낳지는 못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쇠퇴해가던 이집트의 힘을 있는 대로 다 끌어 모아, 100년 전 쯤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당대에는 지중해 세계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었던 로마와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그 일전이 역사적으로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이라 일컬어지는 기원전 31년의 군사적 충돌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는 이때에 로마에 패배하여 결국 ‘황제령’으로 로마 제국의 영토로 편입된다. 

 

<그림2> 클레오파트라가 새겨진 동전. 영국 글라스고 Hunterian Museum 소장.

 

이렇게 기원전 1세기 지중해 세계의 역사적 주역으로 활약했던 클레오파트라를 둘러싼 논란 거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인종’, 즉 해부학적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이 논란이 크게 불거졌던 것은 10년 전 쯤, 클레오파트라의 일대기를 새롭게 영화로 만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던 시점이다. 영화 제작사 측은 클레오파트라 역으로 안젤리나 졸리를 캐스팅하겠다고 발표했는데 (관련 링크 ), 여기에 대해서 일각에서 “클레오파트라는 흑인이었는데, 왜 많고 많은 흑인 배우들을 놔두고 안젤리나 졸리를 캐스팅 했느냐”며 문제제기를 시작했다. 

물론 이런 논란은 대체로 아프로센트리즘(Afrocentrism)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었다는 주장에 사실적 기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면 역사적 배경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 일컬어지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동방원정의 일환으로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이집트를 정복한 것은 기원전 332년의 일이다. 그는 결국 페르시아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인도 서북부까지 진출하여 자신의 대제국을 완성한다. 그런데 이 불세출의 영웅은 정복 사업을 마무리 짓자마자 사망한다.  그의 사후 제국은 4개의 왕국으로 쪼개어지게 되는데, 그 가운데서 이집트를 장악한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친구이자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였다. 그가 이집트의 지배자, 즉 파라오가 된 뒤에 이집트에서는 300여년 동안 그의 후손들에 의한 통치가 지속되었다. 이 그리스 계통의 왕조를 오늘날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라고 부른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이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독립 왕조였기 때문에, 동시에 이집트 역사상 마지막 파라오이기도 하다.

 

<그림3> 그리스 스타일로 묘사된 클레오파트라. 독일 베를린 Alter Museum 소장.

 

그렇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인이지만, 동시에 그리스인이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 내내 지배계층은 이집트어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어도 공용어로 사용했다. 1822년 프랑스 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최초로 고대 이집트어를 해독할 수 있게 해준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은 이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쓰여진 기록인데, 이 비문은 고대 이집트어와 고대 그리스어 양쪽 모두로 쓰여져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시기의 이집트 지배계층은  많은 부분에서 이집트화가 되기는 했지만, 문화적으로 그리스적 정체성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클레오파트라(Cleopatra)라는 이름 역시도 이집트 식이 아닌 그리스 식 이름이라는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분명히 이집트의 파라오였고, '웨레트-네브트-테페루-아케트-세흐'라는 고대 이집트어로 쓰여진 호루스 이름도 갖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인이지만 동시에 이집트인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그림4> 이집트 스타일로 묘사된 클레오파트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Hermitage Museum 소장.

 

그렇다면 클레오파트라는 흑인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입장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좀 문제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흑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들 자신을 아프리카 내륙 출신들과 분명하게 구분했고, 실제로 조형물이나 부조 등에서 묘사를 할 때도 토착 이집트인을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렸다. 대표적인 예가 메세흐티 무덤에서 출토된 ‘행진하는 병사들’ 조각상이다. 제 11왕조 시대(기원전 2000년 전후)에 만들어진 이 조각상에서 이집트 토착 병사들은 붉은색 피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반하여 아프리카 출신 병사들은 검은 피부로 그려진다. 다시 말해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흑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령 클레오파트라를 그리스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으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역할을 맞는 배우가 굳이 흑인일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림5> 토착 이집트인 병사들.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소장.
<그림6>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병사들.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소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를 흑인으로 인식하는 것이 여전히 어느 정도의 타당성은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일단 클레오파트라의 여동생이었던 아르시노에(Arsinoe)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해야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자식들  사이에서는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아르시노에가 한 편이 되었고, 전력에서 밀리는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출신의 카이사르를 동맹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군사적으로 월등한 전력을 갖고 있었던 카이사르의 지원을 받은 클레오파트라가 이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있었던 전투 중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전사하고, 아르시노에는 로마군에게 사로잡혀 로마로 압송되게 된다. 그리고 아르시노에는 다시 오늘날 터키 서부 해안에 위치한 에페수스로 이송되는데, 거기에서 역시 클레오파트라의 동맹이자 연인이었던 안토니우스에게 기원전 41년 경 처형당한다.

1926년 에페수스에서 무덤이 하나 발견되었다. 팔각형 모양의 이 무덤에는 어떠한 비문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덤 주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 무덤에서는 1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유골도 함께 확인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고고학자 힐케 튀르(Hilke Thür)가 무덤의 형태와 유골에 대한 연대 측정값을 근거로 이 무덤을 아르시노에의 것이라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 내용은 2009년 제작된 BBC 다큐멘터리 <클레오파트라 : 살인자의 초상 Cleopatra: Portrait Of A Killer>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그런데 힐케 튀르에 따르면 이 무덤에서 발견된 유골의 해부학적 특성이 아프리카 출신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다만 유골에 대한 DNA 검사는 유골 자체의 손상으로 인하여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유골의 두개골 역시 분실된 상태였기에 힐케 튀르가 분석에 사용한 자료는 1920년대의 기록과 사진이었던 만큼 이 주장의 설득력은 아주 높지는 않다. 그러나 만약 튀르의 주장이 맞다고 한다면, 현재까지 그 실체가 알려져 있지 않은 아르시노에의 모친은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클레오파트라의 경우에는 그리스 출신이 분명한 클레오파트라 트뤼파에나(Cleopatra V Tryphaena)가 모친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계보 역시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을 조금 확장시켜 보면, 클레오파트라의 모친 역시도 흑인이었을 일말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7> 1920년대 힐케 튀르에 의해 복원된 클레오파트라의 동생 아르시노에의 얼굴

 

한편, 꽤 많이 남겨진 클레오파트라의 조각상들이 전형적인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클레오파트라 흑인설’을 일축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전통적으로 파라오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는 전형적인 그리스인으로 묘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를 묘사한 미술품들 자체가 클레오파트라의 해부학적 정체성을 확정해주는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아마도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클레오파트라의 해부학적 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는 계속해서 논란거리로 남을 것이다. 종종 클레오파트라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는 하지만 대부분 과장된 소식이거나 가짜뉴스인 경우가 많고, 아직까지 클레오파트라가 어디에 매장되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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