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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오사카성은 과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인가

기사승인 2019.05.31  11: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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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20 정상회의 오사카성 기념사진" 한국 언론보도 팩트체크

2008년부터 매년(2009~10년은 2회, 다른 해는 1회) 열리는 G20 정상회의가 올해는 일본 오사카에서 6월 28일과 29일에 걸쳐 열린다. G20 회의는 매번 회의 때마다 참석한 각국 정상 전원이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게 상례인데, 대개 회의장 내에서 찍는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 정부는 기념사진 촬영 장소로 일본의 3대 명성(名城) 중 하나로 꼽히는 오사카성을 골랐다고 한다. 오사카성은 구마모토성, 히메지성과 더불어 ‘일본 3대 명성(名城)’으로 손꼽히는 성으로, 권역 내에 있는 유적 다수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국제행사를 자국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재를 소개하는 기회로 삼는 건 어느 나라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오사카성이 옛날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이자 대륙 침략의 선봉이었던 옛 일본군 사단 사령부가 있던 곳이라고 알려진 점이다.

한국 정부와 민간에서 일본이 저지른 과거 침략에 대해 매우 부정적임은 굳이 크게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과거 침략대열의 선봉에 섰던 구 일본군을 상징하는 깃발과 같은 물건은 물론이고 그에 얽힌 장소도 좋게 보지 않는다.

<사진1> ‘전범기’로 속칭되는 구 일본군 군기. 욱일기는 전범기? '전범기'는 없다를 참조

 

<사진2> 일제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한국에서 좋게 보지 않는 일본의 역사는 근대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만이 아니다. 7년 동안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수많은 살상과 파괴를 저질렀던 임진왜란이 그전에 있었다. 소소하게 쳐들어온 왜구들의 난리는 그 횟수 및 피해가 계산이 도저히 불가능할 지경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곳을 기념촬영 장소로 삼는다면 논란이 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래 기사를 보면, 아사히 신문 보도를 인용하면서 오사카성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 이후 세운 거주성으로 17세기 도쿠가와 막부 시절을 거치면서 수차 보수가 이뤄졌다가 1665년 벼락을 맞아 소실됐었다. 이후 1928년 일제 육군 4사단 청사가 오사카성 부지로 옮겨져오면서 보수가 다시 이뤄졌고,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해에 천수각 등 전각들이 복원됐다. 당시 만주를 비롯해 대륙침략 중이던 일본 상황에 맞춰 일본역사상 처음으로 대외 침략을 시도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주성을 상징물로 복원했던 셈이다.
만주침략한 4사단 사령부 '오사카성'에서 G20 기념촬영 한다는 일본 (아시아경제, 최종수정 2019.05.24. 10:22, 기사입력 2019.05.24. 10:18)

 

이 기사에 따르자면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성은 도쿠가와 시대인 1665년까지 유지되다가 낙뢰로 소실되었고, 1928년에 구 일본 육군 4사단이 오사카성으로 옮겨오면서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생략된 부분도 많다. 그럼, 실제 오사카성의 역사는 어떨까?

 

히데요시, 오사카성 축성을 명령

오사카성을 처음 세운 사람은 히데요시가 맞다. 일본의 패권을 쥐고 ‘천하인(天下人)’이 된 히데요시는 오사카에 성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수도 교토의 외곽 상업도시인 오사카에 거대한 성을 지어 거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는 원래 불교 일파인 정토진종(淨土眞宗, 일명 일향종(一向宗))의 본거지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가 있었다. 이들은 천하통일에 나선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항하여 10년이나 싸웠지만 결국 패했다. 이시야마 혼간지는 1580년에 오다군에게 넘어간 뒤 불타버렸다.

혼간지 터에 성을 쌓을 계획은 노부나가가 처음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에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반란을 일으켜버렸고, 노부나가는 머물고 있던 혼노지(本能寺)에서 반란군에게 포위당한 채 할복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다른 노부나가의 숙원들이 그렇듯, 오사카성 건축 역시 그 후계자가 된 히데요시가 맡아서 해냈다. 1583년에 축성을 시작한 오사카성은 7년 만에 일본 제일의 강력한 성으로 완공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하지만 지금 오사카에 있는 오사카성은 히데요시가 지은 그 성이 아니다.

 

<사진3> 히데요시 시대의 오사카성을 그린 병풍

 

건설, 첫 번째 파괴

히데요시가 건설한 거대한 오사카성은 2중으로 된 해자와 강력한 성벽을 갖춘 일본 제일의 성이자 도요토미 가문의 거성(居城)으로 영광의 자리에 올랐다. 허나 그 명운은 길지 못했다. 일본 천하를 지배하게 된 히데요시는 자신의 과욕으로 조선 원정, 즉 임진왜란을 일으켜서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엄청난 피를 흘리게 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병과 노환으로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사망했고,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조선에서 물러났다. 히데요시는 생전에 오사카성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뒤를 이은 아들 히데요리와 어머니인 요도기미는 오사카성을 유일한 본거지로 삼았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할복한 뒤에 아직 어린 노부나가의 손자 산보시(오다 히데노부)를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내세워서 권좌에 올랐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같은 방법으로 패권을 잡았다. 여기에 반발하는 세력을 격파한 싸움이 바로 ‘세키가하라 전투’다. 하지만 히데요시 때와는 달라진 점이 있었다. 오다 가는 노부나가의 여러 아들이 후계자가 되겠다고 앞다투어 나서서 서로 싸워댄 덕분에 힘이 흩어져서 말 그대로 폭삭 망했고, 누군가 하나가 나서서 히데요시에게 반감을 표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히데요리는 외아들이라서 도요토미 가문의 힘은 갈라지지 않고 그대로 온존되었다. 비록 이에야스가 영지를 줄여놓았다고 해도 그전에 잔뜩 비축해 놓은 금과 은, 식량, 무기는 그대로였다. 오사카성에 비축된 이런 물자들은 실로 막대한 양이었다. 또한,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바치는 가신들도 상당수 남아 있었다. 이에야스가 반대파를 세키가하라에서 무찌르고 쇼군이 되었다고 하나, 이때 이에야스 편에서 싸웠던 다이묘 중에도 도요토미에 충성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가토 기요마사다.

상황이 이러니만큼 이에야스의 권력은 히데요리가 성장하면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고, 처음 한동안은 상황을 두고 보던 이에야스는 성장한 히데요리를 보고 결국 도요토미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한다. 이에야스는 만으로 71세가 되고 히데요리는 21세가 되던 1614년이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도쿠가와 막부에 맞서서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고, 이를 벌한다며 20만 대군을 동원했다. 그 기세에 도요토미 지지파 다이묘들조차도 모두 이에야스 편에 섰다. 절대 배반하지 않았을 가토 같은 이들은 모두 이미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뒤였다.

모든 영주가 이에야스를 두려워해 눈을 돌린 탓에 히데요리 측은 제대로 된 원군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히데요시가 모아두었던 금과 은을 풀어 용병을 모집했고, 소속을 잃고 떠돌던 낭인(牢人, 로닌) 무사 10만 명을 모아들였다. 히데요리는 곱게만 자라 군사를 움직인 경험이 없었고, 역시 비전문가인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기미가 영향력을 크게 발휘한 때문에 도요토미군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10만 병력을 손에 쥐고도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하지만 오사카성이 워낙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11월부터 12월까지 한 달 동안 싸우고도 성은 끄떡없었다. 이를 ‘오사카 겨울의 진’이라고 한다.

<사진4> 오사카 겨울의 진 포진도

 

전투에 진전이 없자 이에야스는 일단 공성을 포기하고 히데요리와 화의를 맺었다. 조건은 오사카성의 맨 바깥쪽 해자를 이에야스 측이 메우고, 외곽 구역 성벽은 도요토미 측이 스스로 허물기로 약속하는 형식적인 항복으로 이에야스 쪽의 체면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히데요리 측에서는 71세인 이에야스가 곧 죽을 것으로 판단해서 나중에 뒤집을 생각으로 화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는 이에야스의 속임수였고, 이에야스는 자신이 메우기로 약속한 바깥쪽 해자 외에 안쪽 해자도 몽땅 메워버리고 외곽 성벽조차 대부분 허물어버렸다.

이로써 오사카성의 방어력은 격감했다. 시간을 끌며 이에야스가 죽기를 기다리려던 오사카 측은 위급상황이 닥치자 해자를 다시 파고 성벽을 다시 쌓았지만, ‘화의에 따라 없애기로 한’ 성벽과 해자를 다시 만드는 행동은 이에야스에게 협정 위반이라는 구실을 주었다.

이에야스는 전면항복 수준의 화의 요구를 다시 내밀었다. 히데요리 측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이었고, 병력을 다시 소집한 이에야스군이 공격을 감행하면서 1615년 5월에 전투가 재개된다. 이 2차전을 ‘오사카 여름의 진’이라고 한다.

 

<사진5> 오사카 여름의 진 포진도. 해자가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2차전에 투입한 이에야스군은 15만 5천, 도요토미군은 5만 5천이었다. 성벽과 해자를 잃고 발가벗겨진 성을 지킬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주민과 병사가 대거 이탈했기 때문이다. 양측의 병력비는 2:1에서 3:1로 더 나빠졌고, 방어력도 약해졌으니 결말은 뻔했다.

외성이 사라진 오사카성은 전투가 시작되고 단 2일 만에 함락되었다. 히데요리와 요도기미 모자는 자살했다. 승리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쌓은 오사카성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사진6> 오사카성이 함락되는 순간을 그린 일본의 병풍

 

재건, 두 번째 파괴

공방전 이후로 오사카성은 한동안 폐허로 남았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후계자로서 에도 막부 2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부친이 사망하고 4년이 지난 1620년에 오사카성을 다시 쌓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다만 도쿠가와에서 재건한 오사카성은 히데요시가 쌓은 성과는 달랐다. 토사를 가져다 부어 히데요시가 쌓았던 성벽의 잔재를 묻어버리고 기초를 더 올려서 그 위에 지었고, 부지 면적은 1/4로 줄였다. 그 외에 나머지 부지는 밭을 갈거나 공터로 비워두었다.

하지만 재건된 오사카성도 그 운명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먼저 1660년에 화약고가 벼락에 맞아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서 건물과 사람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1665년에는 천수각이 정통으로 벼락을 맞아 홀라당 타버렸고 그 뒤로 재건되지 않았다. 위의 아시아경제 기사에서는 ‘1665년 벼락을 맞아 (오사카성이)소실됐었다.’고 했는데, 이는 낙뢰로 인해 천수각이 없어진 사건을 오해한 것이다. 오사카성이 통째로 타버린 게 아니다. 천수각은 일본식 성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조물이다. 하지만 본래 전시에나 망루 겸 요새로 쓰는 건물이고 평시에는 쓰지 않으므로, 평화로운 에도시대에는 굳이 천수각을 재건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도쿠가와 쇼군이 사는 에도성에서도 1657년에 화재로 천수각이 불타자 필요 없다고 재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근 200년이 지난 뒤에 일본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났다.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려는 여러 번의 연합군이 막부의 직할지였던 오사카로 진군했고, ‘도바·후시미 전투’에 패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오사카성을 포기하고 에도(도쿄)로 도망쳤다. 이때 발생한 화재로 성에 남은 건물 다수가 불탔다. 이 파괴가 천수각이 불탄 지 200여 년 뒤, 1868년의 일이다.

 

새 주인의 입주, 복원

이후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지면서 성터는 국유지가 되었다. 막부를 밀어내고서 권력을 잡은 새 정부는 지방세력을 약화하고 가용한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옛 영주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성을 없애라는 ‘폐성령(廃城令)’을 내렸다. 건물을 해체해서 목재와 기와 등을 따로 매각하고, 토지는 군부대가 주둔하거나 학교, 관청 부지 등으로 불하했다. 공원이 된 곳도 있다.

오사카성에는 새로 조직한 ‘오사카 진대(鎮台)’와 ‘오사카 포병 공창’이 들어섰다. 이 오사카 진대가 바로 1888년에 창설된 구 일본군 제4사단의 전신이며, 포병 공창은 후에 ‘오사카 육군 조병창’으로 개칭되었다.

 

<사진7> 4사단이 창설된 1888년(메이지 20년)의 오사카성 지도.

 

위의 아시아경제 기사에서는 ‘1928년 일제 육군 4사단 청사가 오사카성 부지로 옮겨져오면서’라고 적음으로써 1928년부터 4사단이 오사카성에 주둔한 것처럼 쓰고 있지만, 이것도 역시 사실과 다르다. 일본군의 오사카성 주둔은 오사카 진대가 창설된 1871년 10월부터다. 1928년은 현존하는 사령부 건물 건설계획이 시작된 해일 뿐이다. 이때 오사카성도 복원되었다. 

복원의 계기에 관해서도 위 기사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해에 (중략) 만주를 비롯해 대륙침략 중이던 일본 상황에 맞춰 일본역사상 처음으로 대외 침략을 시도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주성을 상징물로 복원했던 셈이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과다하게 해석된 부분이 있다.

이런 대규모 건축물 복원에서, 결정하면 바로 결과가 나올까? 당연히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더구나 오사카성을 복원하기로 한 주체는 일본군도, 정부도 아니었다. 당시 오사카 시장이던 세키 하지메(關一, 시장 재임 1923.11.30.~1935.1.26.)가 시민들에게 공원을 만들어줄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세키는 1914년부터 시청에서 일하던 사회학자 및 도시계획 전문가로, 군국주의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공원 정비, 공공주택 제공, 대중교통 정비, 시립대학 건립 및 시영병원 설립 등과 같은 시민을 위한 시정이 그의 목표였고 오사카성 천수각의 재건도 그 일환이었다.

천수각 재건이 하필 1931년인 이유는 1930년에야 공사가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1930년에 공사가 시작된 이유는 1928년에 복원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3년 전인 1925년에 즉위한 쇼와(히로히토) 덴노의 즉위를 축하하는 기념사업이라는 명목이었다.

 

<사진8> 1930년, 건설 중인 천수각

 

어느 쪽이건 만주사변과는 관계가 없다. 만주사변은 1931년 9월에 일어났는데, 이는 정부의 결정도 아니고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 지휘부의 독단 행동이었다. 정부도 만주 침략을 매우 강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그보다 3년 전에 오사카 시당국이 대륙침략이라는 ‘상황에 맞춰’ 이 성을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시민들에게 건설비용을 모금한다는 게 가능할까?

물론 이 천수각 재건 당시 4사단 사령부 건물도 지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오사카성 본성 구역에 4사단 사령부를 짓는 것도 처음부터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위에서 살폈듯이 군대는 이미 1871년부터 여기 있었고, 시가 계획한 오사카성 공원 구역에도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9> 현존하는 천수각과 구 4사단 사령부. 두 건물이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다.

 

복원한 천수각은 전통 기술인 목조가 아니라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었다. 게다가 겉모습은 꽤 그럴듯하게 만들었지만, 내부에는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원형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이 천수각은 일본의 국보도, 중요문화재도 아닌 등록문화재이다.

더구나 복원 대상 양식도 통일되지 않았다. 1층부터 4층까지는 이 성이 가장 오래 존속했던 도쿠가와 시대 양식, 5층 위는 히데요시 시대 양식이라는 요상한 구조로 되어있다.

 

<사진10> 지금 볼 수 있는 오사카성 천수각. 4층까지는 도쿠가와 가문을 나타내는 흰색, 5층은 도요토미 가문을 나타내는 검은색을 칠했다.

 

세 번째 파괴, 그리고 현재

오사카성을 또다시 불길이 휩쓴 때는 14년 후였다.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아시아 전역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며 그 규모는 갈수록 커졌다.

하지만 전쟁의 불길은 결국 일본을 향해서 되돌아왔다. 미군이 날려 보낸 B-29가 한 번에 수백 대씩 날아와서는 소이탄으로 일본의 도시들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육군 조병창 소재지인 오사카는 당연히 중요한 표적이었다.

8차례에 걸쳐 가해진 ‘오사카 대공습’으로 1만 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했다. 오사카성 역시 소이탄 세례를 면하지 못했고, 1868년의 화재를 피해 살아남아 있던 성문이나 망루 등 목조 구조물 다수가 불탔다.

공습에서 살아남은 주요한 옛 건물로 기슈 어전(紀州御殿, 본래 1621년에 와카야마 산성에 지은 건물을 1868년에 타버린 본성 건물 대신으로 1885년에 오사카성으로 옮겨 세운 것)이 있었다. 하지만 종전 후에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의 실화로 인해 이것도 불타버리고 말았다.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천수각은 별 손상을 입지 않아서 전후에 수리되었다. 4사단 사령부도 별 손상이 없었기에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지금 오사카에 있는 화려한 천수각은 ‘히데요시가 만든 오사카성’이 아니다. 에도 막부가 히데요시의 성을 철거해서 묻어버리고 완전히 새로 쌓은 성을, 20세기의 기술로 베껴 만든 복제품일 뿐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구 4사단 사령부는 지금 기사에서처럼 박물관으로 쓰이지 않는다. 해당 건물은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오사카 경시청(1946~1958), 오사카 시립 박물관(1960~2001)으로 사용되었고 그 뒤로는 한참 동안 비어있었다. 2017년부터는 “미라이자 오사카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레스토랑과 기념품점 등이 영업하고 있다.

<사진11> 오사카에서 정식으로 제공하는 오사카성 관광안내도. 천수각과 그에 인접한 4사단 사령부 건물을 볼 수 있다

 

외신에도 오류는 있다!

한국에서 위의 논란을 촉발한 계기는 아사히 신문의 보도였다. 그런데 아사히 신문에서는 오사카성에 대해 뭐라고 적었을까?

6月末に大阪である主要20カ国・地域(G20)首脳会議で、日本政府が恒例の記念撮影で、背景に大阪城が入る構図を検討している。日韓外交に関わる複数の関係者が明らかにした。大阪城は朝鮮半島を侵略した豊臣秀吉の居城で韓国の反発が予想され、今後調整が行われる可能性もある

 

G20 기념촬영, 배경은 히데요시의 오사카성. 한국 반발 우려도.
6월 말에 오사카에서 주요 20개국 (G20) 정상회의에서 일본 정부가 상례적으로 시행하는 기념촬영 배경으로 오사카성을 넣는 구도를 검토하고 있다. 한일 외교에 관한 여러 관계자가 확실히 밝혔다. 오사카성은 한반도를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성이라서 한국의 반발이 예상되며, 향후 조정될 가능성도 있다.

 

아사히 역시 지금의 오사카성을 ‘히데요시의 거성’이라고 적었다. 과연 아사히에서도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히데요시가 ‘처음’ 오사카성을 지었다는 점에 주목해서 일본에서 관습적으로 오사카성을 ‘히데요시의 성’이라고 부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추가: 731부대는 화학전 부대다? 

아시아경제가 낸 기사는 일본의 우경화를 비난하면서 맨 밑에 이런 내용을 넣었다.

731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 관동군 소속의 화학전 부대로 한국인, 중국인 포로와 주민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벌였던 부대의 이름이다.

731부대는 ‘마루타’와 생체실험으로 유명한 일본 관동군의 비밀부대다. 이들의 정식 명칭은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전장에서 질병을 예방하고 깨끗한 물을 공급한다는 게 이들이 표면상 수행하는 임무였다.

하지만 그 실상은 기사에서 언급했듯이 생체실험을 일삼은 악마들이었다. 사람을 실험실의 모르모트처럼 취급하여 강제로 가혹한 환경에 내몰거나 병에 걸리게 했다. 총과 화염방사기, 독가스 등의 무기를 써서 살상하고 그 효과를 살피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화학전 부대’는 아니었다. 한국군이 ‘화생방 훈련’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화학전 대비훈련만 주로 실시하기 때문인지 ‘화생방전 = 화학전’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화학전과 생물학전과 방사능전은 엄연히 서로 구분해야 하는 전투 양상이다.

731부대는 ‘생물학전’ 부대였다. 이들의 임무는 페스트와 콜레라를 비롯한 각종 세균무기를 제작해서 적진에 질병을 퍼뜨리는 것이었고, 강력한 세균을 만들기 위해서 수천 명이나 되는 한국인·중국인·러시아인들을 납치해다가 생체실험을 했다.

화학전 연구와 실시를 맡은 부대는 엄연히 별도로 존재했다. 종전 시 이들이 중국에 버리고 철수한 화학탄만 70만 발에 가깝고(일본중국에 버린 화학무기 골머리), 일본 본토에도 이때 버린 수많은 화학무기가 아직 외딴섬이나 산속에 묻혀 있다.

위에서 적었듯 731부대에서도 독가스 실험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목적은 일본군을 위한 독가스 방호법을 연구하는 데 있었지, 화학무기 제작이나 운용기술을 발달시키기 위한 연구는 없었다.

*2019년 6월 2일 오전 11시 57분 1차 수정: 일부 사실관계 오류가 있어 수정했습니다.

1. "다만 사실 일본에는 천수각이 처음부터 아예 없는 성도 있었다" 문장 삭제, "심지어 도쿠가와 쇼군이 사는 에도성에서도 1657년에 화재로 천수각이 불타자 필요 없다고 재건하지 않았다." 문장 추가

2."이시야마 혼간지는 1580년에 오다군에게 '넘어간 뒤' 불타버렸다."→"이시야마 혼간지는 오다군에게 '넘어간 뒤' 불타버렸다."

3.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천수각을 비롯한 건물 배치 및 구조도 모두 본래 있었던 히데요시의 성과는 전혀 다르게 만들었다. 당연히 히데요시의 성을 심정적으로도 묻어버리기 위해서였다." 문장 삭제

임영대 팩트체커 steinho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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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작가다. 역사를 주된 주제로 ‘슈타인호프의 함께 꿈꾸는 둥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청소년을 위한 파닥파닥 세계사 교과서>, <한국전쟁 전략, 전술, 무기>, <서프라이즈 세계 역사 미스터리> 등의 역사 교양서와 <봉황의 비상>, <이순신의 나라> 등의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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