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항공사, 안전비디오에 '아이돌'을 출연시켜라!

  • 기자명 탁재형
  • 기사승인 2019.06.0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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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5일 오후 5시, 모스크바의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이따금씩 구름 사이로 번개가 굉음을 내며 번득이곤 했다. 폭우가 잠시 그친 사이, 아에로플로트 소속 수퍼젯100 여객기 한 대가 모스크바 국제공항 활주로에 접근했다. 통상적인 경우보다 좀 더 빠르고 가파르게 활주로를 향해 내려오던 항공기는, 활주를 시작하자마자 불꽃에 휩싸였다. 거대한 불덩어리가 된 채 활주로 끝에 가까스로 멈춰선 기체에서 비상용 미끄럼틀이 펼쳐졌고, 사람들이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탑승객들이 안전하게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승객과 승무원 마흔 한 명은 결국 불타는 비행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짐을 챙길 생각 하지 말고 당상 비상구로 나가라는 승무원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가방을 찾겠다고 미적대며 탈출로를 막은 승객 몇이 사고를 키웠다. 짐가방 몇 개와 안타까운 목숨 여러 개가 그렇게 뒤바뀌었다.

5월 5일 발생한 러시아 여객기 화재 사고. BBC 화면 캡처.

1914년, 최초의 상업적 여객 비행이 시작된 이래, 항공기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을 태우고 더 멀리 날게 되었다. 최초의 비행엔 단 한 명에 지나지 않았던 승객이, 이제는 500명을 넘게 되었고 기껏 30km에 지나지 않던 비행거리는 1만6093km까지 늘어났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항공기를 이용하는 승객의 수는 1억 명을 넘어섰다. 항공기 사고를 미디어에서 접하는 빈도 수가 늘어날 수 밖에 없고, 항공기 사고를 접하게 될 가능성도 (자연 임신으로 일란성 네 쌍둥이를 낳을 확률보다 더 적다고는 하지만) 확률적으로는 커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특히나 항공기 이용 횟수가 많은 사람들일수록 탑승 후 나오는 안전에 관한 안내방송은 귓등으로도 들은 척 만 척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항공기 여행을 많이 하면 할수록 사고를 접할 확률도 필연적으로 높아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런 단골 고객들이야말로 기내 안전 비디오에 주의를 집중해야 할 사람들이다. 최근의 러시아 항공사고는 위험한 상황에서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안해본 사람이 주변 사람들까지 어떻게 위험에 빠뜨리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비행기가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의무적으로 재생하게 되어있는 동영상에는 최악의 상황에서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는 필수적인 정보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승객의 54%는 아예 이 비디오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2006년 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 조사), 나머지 절반도 그렇게까지 주의를 기울여 시청하지는 않는 듯 하다. 항공사들도 이런 최악의 시청률을 개선하기 위해 유명 배우, 동물, 블록버스터 영화의 패러디, 심지어는 뮤지컬 형식까지 도입하는 추세지만 자신과 항공사고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소귀에 경읽기다. 그나마도 우리나라 항공사들은 이런 시도조차 않고 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비행기를 타게 되면, 항공기내의 스크린을 눈여겨 보기 바란다. 배경음악은 더없이 평화롭고, 등장하는 모델들은 모두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끔찍한 상황들의 연속이다! 그 영상에서 배우들의 웃음기와 음악이 주는 안정감을 들어내고, 내용중에 등장하는 동작들을 실제로 해야만 하는 현실에 대입해 보자. 대충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다. 비행중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체가 손상되어 기압이 떨어지면서 산소마스크가 떨어진다. 이쯤이면 동체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공포에 압도당하지 말고 자기 앞의 산소마스크를 뒤집어 써야 한다. 내 옆에 아이가 있다면, 아이가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다! 내 의식이 흐려지기라도 하면, 아이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울 기회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체가 동력을 잃어 급강하를 시작하고 수평이 흐트러진다. 벨트를 하지 않은 승객들은 붕 떠올라 천장에 부딛혔다가 의자 등받이에 빨래처럼 널리게 될 것이고, 머리 위 짐칸이나 의자 아래 보관하지 않았던 짐들이 마구 날아다니며 사람들의 머리통을 노릴 것이다. 날카롭고 단단한 물건이 항공기 창문에 부딪혀서 기체 피해를 부채질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더 재수가 없으면 그것이 나를 노리고 날아올 수도 있다. 기장은 다급히 가장 가까운 공항으로 기수를 돌리고, 불시착 모드에 들어간다. 다행히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기내에는 부상을 입은 승객들의 신음소리와 불안한 정적이 교차하고, 신을 찾는 기도소리에 뒤섞여 마지막 모습을 남기려는 사람들의 셀카 소리와 가족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을 녹음하는 중얼거림이 들려올 것이다. 지금껏 익숙해져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지면이 가까워질 때쯤, 승무원들이 외친다. “브레이스! 브레이스! 브레이스! 충격방지 자세 취하세요! 충격방지 자세!” 어떤 승객들은 앞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몸을 웅크릴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당황해서 두리번거리거나 창 밖을 핸드폰으로 찍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콰콰광!! 정신을 차려 보니 기내에는 매캐한 연기가 가득하고, 전기는 끊어져서 온통 어둠 속이다. 정신을 잃은 사람들과 다친 곳을 누르며 신음하는 사람들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 희미하게 불이 들어온 전구들이 보인다. 기어서 그 불빛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하지만 이내 길이 막힌다. 비행기가 꼬리부터 지면에 부딪히며 착륙한 탓에, 조금은 상태가 좋았던 앞자리 승객들이 자기 짐을 찾겠다고 오히려 뒤쪽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는 탓이다. 승무원들이 반말조로 “짐 버려! 빨리 나와!” 소리를 지르지만,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사람들은 좀비가 되어 늘 하던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동체 중간쯤에 비상구가 있긴 한데, 그 앞에 앉아있는 승객은 공황에 빠져서 머리만 감싸안고 있고, 오히려 탈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앞쪽 문에 도달했다. 비행기가 멈추며 자동으로 펼쳐진 탈출용 슬라이드가 보인다. 조금만 있으면 내 차례인데, 슬라이드가 갑자기 힘이 빠지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하이힐을 벗지 않은 승객이 그 위에 뛰어 내리며 플라스틱 재질 표면에 구멍이 났고, 슬라이드의 형태를 유지해주던 가스가 급속도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뒤에서는 불길이 점점 덮쳐오는 중이고, 이제 나는 10미터 아래로 뛰어내려야만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항공기를 이용해 여행할 때 위와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될 확률은 로또에 당첨될 확률과 유사하다. A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항공기 이용객 중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는 1억명 당 2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확률은 0이 아닌 이상 의미를 갖기 마련이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복권을 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런 위험 상황이 실제 일어난다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가를 기회 있을 때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나 자신을 지켜내도록 해주는 모든 정보는 결국, 기내 안전 비디오와 등받이 주머니에 비치된 안전 카드에 담겨 있다. 내가 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내 앞에, 옆에, 뒤에 타고 있는 당신이 그런 고민을 한 번쯤은 해본 사람이기를 간곡하게 빌어 본다. 그리고 부디, 국내 항공사들은 단조롭기 그지없는 안전 비디오에 동물과 뮤지컬과 코미디와 아이돌 스타들을 도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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