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부의 등장, 그리고 '무사'가 된 사무라이

  • 기자명 김현경
  • 기사승인 2019.06.1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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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기원> 시리즈

지난 글에서 사부라이(사무라이)가 원래 군주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인 시신(侍臣)과 통하는 말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나 천황의 곁에서 모시는 신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7세기 후반부터 8세기에 걸쳐 율령에 입각한 고대국가를 형성해 나갔는데, 이때 천황과 신하의 관계도 제도적으로 규정되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 정1품부터 종9품까지의 품계가 있었던 것처럼 일본은 정1위부터 소초위하까지의 위계(位階)가 설정되었고, 위계가 높을수록 천황과의 거리가 가까움을 나타내었다. 궁궐에서 행사가 이루어질 때 천황과 같은 전각 위에 올라서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위계로 따지면 3, 4위 정도의 공경(公卿)들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5위 이상의 관리들까지 참가가 허락되었다.

 

다이호율령(701년) 이후 규정된 일본의 위계

그런데 9세기부터 천황을 둘러싼 신하들의 질서에 변화가 생겨난다. 이때 천황의 비서실 역할을 하는 구로도도코로(藏人所)가 생겨났고, 여기에 소속된 구로도(藏人)들을 비롯하여, 사적인 공간에서 더 가깝게 천황을 모시는 집단이 중시되었다. 특히 천황이 일상생활을 하는 공간인 세이료덴(淸涼殿)이라는 건물 마루에 올라가는 행위, 즉 승전(昇殿)을 허가받는 일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고위 관직자인 공경들은 물론 승전이 가능했는데, 여기에 구로도와 4~6위 관리들 중 일부가 승전을 허락받았다. 이러한 공경 이외에 승전을 허가받은 사람들을 덴조비토(殿上人)라고 부른다. 덴조비토가 천황의 곁에서 대기하는 장소를 사부라이도코로(侍所), 줄여서 사부라이(侍)라고 불렀는데 나중에는 덴조노 사부라이(殿上侍), 덴조노마(殿上の間)라는 명칭으로 점차 옮겨간다.

 

교토 고쇼의 덴조노마. 장지문에 학 그림이 그려져 있어 쓰루노마(鶴の間)라고도 불린다.

 

천황을 둘러싼 사적인 군신관계가 궁궐의 내부 구조나 귀족사회의 질서에 반영되는 것처럼, 고위층 관리를 맡은 상류 귀족들의 존재 또한 귀족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원래 율령에서는 천황의 자녀들과 황족들, 3위 이상의 고위 관료들이 각각의 가(家)를 형성하고 가내의 사무를 담당하는 가령(家令)을 하급 관리들 중에서 임명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8세기 말에서 9세기로 들어가면서 황족과 고위 관료는 정치적으로는 영향력을 키우고 경제적으로는 토지를 확보하며 부를 축적하는 등 권문세가로 성장해 나간다. 특히 9~10세기에는 후지와라 가문의 일족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다지면서 천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고위 관직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정치적 실권을 쥐었다. 이에 따라 중하급의 관료들도 이들 권문세가와 주종관계를 맺어 집안의 경영과 관련된 각종 사무를 담당하였고, 그 대가로 관직 임명 등에 있어서 정치적인 지원을 받았다. 천황을 곁에서 모시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위 관료에게 종사하며 그 곁에서 모시는 사람들 또한 사무라이라고 불렸고, 고위층 귀족의 저택 내부에 이들이 소집되거나 대기하는 장소로서 ‘사무라이도코로’가 존재했다.

 

이처럼 중하급 관료들이 권문에 종사하며 고위층 귀족을 모시는 집단으로 굳어지면서, 아예 중하급 관료층을 가리켜서 ‘사무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각각의 권문세가에는 그 주군을 모시는 사무라이들이 있었고, 이 사무라이들은 조정의 관료로서는 6~7위 정도의 위계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 관료층에도 ‘사무라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11세기 당시 귀족사회의 신분질서를 정리한다면 아래와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덧붙이자면 8위 이하의 위계는 이때 이미 실질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지난 글에서는 사부라이 또는 사무라이라는 말이 무기를 들고 경호하는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고 이야기하였는데, 그것이 사무라이 중에 호위무사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높은 사람을 모시는 방법에는 비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고 경호를 담당할 수도 있다. 권문세가를 모시는 사무라이 중에는 문신이 있는가 하면 무사도 존재했고, 관료층으로서의 사무라이도 문관과 무관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제대부층 관료들 중에도 물론 문무가 공존한다.

 

문무의 구분이 따로 없이 귀족사회의 신분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던 사무라이가 무사에게 집중되는 결정적 계기 중 하나는 12세기 후반에 찾아온다.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라는 무장이 공경에 진입했을 뿐만 아니라 대신에 임명되어서 권문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전 시기만 해도 무사들은 천황이나 상황(上皇) 또는 권문세가에 무력으로 봉사하는 부속적인 입장에 놓여 있었다. 기요모리도 원래 상황의 근신(近臣)으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기요모리가 귀족사회에서 화려하게 출세하면서 공경 신분에 도달한 것이다. 이로써 기요모리는 권문으로서 자신의 집안을 경영하고 가신을 관리하는 기구를 조직할 수 있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이 가문을 헤이케(平家)라고 부른다. 이는 기요모리의 헤이케라는 권문세가 밑에 ‘사무라이’들이 조직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저택에도 사무라이도코로가 존재했다. 그리고 기요모리는 원래 무사였던 만큼, 그 밑에 소속된 사무라이들 중 대다수는 무사들이었다. 그러한 사무라이들을 통솔하는 중견 가신을 사무라이다이쇼(侍大將), 즉 사무라이 대장이라고 불렀다.

 

12세기 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헤이케를 멸망시키고 가마쿠라 막부를 개창하였다. 일반적으로 가마쿠라 막부 하면 귀족들의 조정과는 거리를 둔 독립적인 무사들의 정권을 생각하게 되며 실제로 그러한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요리토모가 구축한 정권의 외적인 형태 자체는 기존의 귀족사회 속 권문, 특히 헤이케의 그것을 기본적으로 답습하고 있다. 요리토모는 1185년에 유일한 무사 출신 권문이었던 헤이케를 멸망시킨 뒤 공경의 지위에 올라 귀족 권문의 가(家)를 구성할 자격을 갖추었다. 그리고 요리모토의 거처에도 가로로 길게 지어진 사무라이도코로가 설치되었다. 고케닌(御家人), 즉 요리토모의 가신들이 모여서 주군인 요리토모와 만나는 장소가 바로 이 사무라이도코로였다. 요컨대 가마쿠라 막부의 수장 요리토모의 밑에도 사무라이들이 소속되었고 이들 중 대부분은 무사였던 것이다.

 

가마쿠라 막부의 사무라이는 기존의 권문귀족에 소속된 사무라이와 비교했을 때 구성면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기존 권문에는 공경 중 일부와 제대부들, 사무라이들이 소속되었던 데 반해 제대부에서 공경으로 업그레이드된 무사 귀족의 권문 휘하 가신들은 일부 제대부들과 대다수의 사무라이로 구성되어 있었다. 헤이안시대의 귀족사회에서는 5위 이상의 제대부와 그 이하의 사무라이를 가르는 경계선이 가장 중요시되었고, 신분질서의 규칙에서도 두 신분을 구별하는 규정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에 비해 소수의 제대부를 예외로 하고 권문의 구성원 중 대다수가 사무라이였던 가마쿠라시대의 막부에서는 제대부와 사무라이의 구분보다는 사무라이와 본게(凡下), 즉 관직이나 위계를 갖지 않은 일반인과의 구분을 엄격히 할 필요성이 있었다. 사무라이에게 여러 가지 특권이 규정되었던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가마쿠라 막부가 몰락한 뒤에는 무로마치 막부가 세워진다. 무로마치시대에는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사들이 천황과 중앙 귀족들을 압도하였고 일본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층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무로마치 막부에 소속된 사무라이라 불리던 무사들이 바로 그 지배층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무라이’에는 고위 지배층에 무사라는 이미지가 확립되었다. 이어서 전국시대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개창한 에도시대에도 막부의 사무라이들은 여전히 지배층의 지위에 있었고,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한 무사들은 이제 행정 사무를 주요 업무로 삼게 되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칼을 찬 지배층이자 관료화한 무사의 이미지가 이러한 사무라이에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19세기에 찍힌 것으로 알려진 사무라이 사진.

이상으로 사부라이 또는 사무라이라는 말이 본래의 의미를 떠나 새로운 개념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낯설고 어색한 외국말에 복잡한 개념들이 얽혀 있어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겠지만, 한국의 역사에서도 사무라이와 유사한 행보를 보이는 단어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내시(內侍)’라는 말이다. 내시란 원래 궁궐 안에서 왕을 모시는 행위 또는 그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이들이 원래부터 성불구자 또는 거세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유명해진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내시의 대부분이 성불구자나 거세된 사람으로 구성되면서 결국 ‘내시’라는 말까지 그들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변해갔다. 사무라이도 마찬가지로 높은 사람을 곁에서 모신다는 말이었던 것이 관료 계층을 가리키는 말로 변하였고, 또 그들 중 대다수가 무사 지배층으로 구성되면서 결국 무사 지배층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역사 속의 단어들 중에는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생명력을 얻어 사용되고 있는 것들이 더러 있다. 다만 그 중에는 본래의 뜻에서 많이 변화된 의미를 갖게 된 것들도 많다. 이러한 언어의 역사성을 간과하고 현대적인 의미를 그대로 과거의 말 속에 반영시켰을 때 오해가 생겨나며, 이는 비단 한국어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변화하는 말 속에 담겨진 현상과 사물을 파악하는 일은 다소 번거롭고 곤란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인간이 살아온 사회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라도 풍부하게 한다면 좀더 정확한 지식을 보유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얼핏 보았을 때 한국과는 그다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남의 나라의 역사를 공부하는 일의 효용 중 하나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참고문헌> (저자 가나다순)

1) 高橋昌明, 「中世の身分制」, 『中世史の理論と方法: 日本封建社會・身分制・社會史』, 校倉書房, 1997

2) 高橋昌明, 『武士の日本史』, 岩波書店, 2018

3) 古瀨奈津子, 「昇殿制の成立」, 『日本古代王權と儀式』, 吉川弘文館, 1998

4) 滿田さおり, 「淸涼殿南庇「殿上の間」(「侍所」)に關する硏究: 平安宮內裏の空間構成と儀式に關する歷史的硏究 3」, 『日本建築學會計劃系論文集』 78(683), 2013

5) 元木泰雄, 「諸大夫・侍・凡下」, 今井林太郞先生喜壽記念論文集刊行會 編, 『國史學論集』, 河北印刷, 1988

6) 田中稔, 「侍・凡下考」, 『鎌倉幕府御家人制度の硏究』, 吉川弘文館, 1991

7) 黑田俊雄, 「中世の身分制と卑賤觀念」, 『黑田俊雄著作集 6 中世共同體論・身分制論』, 法藏館, 1995

*필자 김현경은 일본 고대사 및 중세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신분과 계층, 혈통과 세습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대학원과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각각 석사학위를 받았고, 교토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다.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어소시에이트 펠로우로 일하고 있다. 논문으로 <원 근신(院近臣)과 귀족사회의 신분질서: 실무관료계 근신을 중심으로>(<일본역사연구> 46, 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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