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적자 감수한 '적극적 지출', 최소 10년은 필요하다

  • 기자명 전용복
  • 기사승인 2019.06.2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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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화폐이론> 시리즈

 

재정에 대한 새로운 관점 : 계층간, 세대간 연대의 고리

먼저 이번 칼럼은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 연구용역보고서로 작성되었고, 지난 6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확대재정정책 토론회’(국회의원 심상정, 정의정책연구소 공동 주최)에서 발표된 것임을 밝혀둔다.

이번 칼럼은 MMT 칼럼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앞의 칼럼을 요약하면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전반부에 지난 칼럼들을 요약한다. 후반부에서 재정정책이 왜 중요한지 ‘사회통합’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적극적 재정정책은 현 세대의 계층간, 그리고 미래 세대와의 연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불필요한 재정건전성 우려를 극복하고 사회복지서비스 공급 확대에 재정을 과감히 지출하는 것은 현 세대의 소득불평등을 크게 개선할 수 있다. 이는 계층간 통합에 관한 사항이다. 또한 적극적 재정정책은 수요주도 ‘생산성’ 향상을 낳을 것이고, 그렇게 업그레이드 된 경제가 낳을 혜택은 후세대가 누릴 것이다. 반대로 저축(예컨대 국민연금 보험료 인상 등)과 긴축을 강조하면 경제성장과 생산성이 침체되고 미래 세대에게는 ‘저질 경제’가 남겨질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현재 저축을 지나치게 많이 하게 되면, 수요부족으로 경제의 생산성이 정체되어 후세대들의 생산성 이익은 감소하게 될 것이다. 반면, 고령화에 따라 그 비중도 커질 은퇴자들은 더 많은 생산물의 소비를 요구할 것이다. 생산물은 크게 늘지 않았는데, 은퇴자들이 저축을 통해 그 청구권을 많이 보유한 상황, 이것이야 말로 심각한 세대간 갈등의 원천이 될 것이다. 따라서 쓸데없는 재정건전성 관념에 포로가 되지 말고, 적극적 재정지출을 통해 미래 세대에게 양질의 경제를 물러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세대간 연대의 출발이라 할 것이다.

 

1. 통화공급과 지급준비금 제약

재정적자에 대한 보수적 시각은 큰 부분 실제 세금이 징수되고 재정지출이 일어나는 ‘재무적 현상’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가장 중요한 오해는 정부의 재정이 가계와 기업 등 민간 주체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관념이다. 수입을 능가하는 초과 지출이 장기간 지속되면 부채가 쌓du 결국에는 파산하는 가정경제처럼, 정부도 재정적자가 누적되면 국채위기 등 국가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 믿어진다. 하지만 정부의 재정은 엄격한 예산제약 하에서 운영되는 가정경제와 질적으로 다르고, 정부부채의 성격도 전혀 다르다.

 

재정이 운용되는 과정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금융시장 일반의 운영원리를 우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 교과서의 설명은 현실을 거꾸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째, 민간경제(기업과 가계)가 사용하는 대부분은 화폐는 중앙은행이 아니라 민간은행들이 신용화폐를 창조하여 공급한다. 둘째, 중앙은행은 민간은행의 신용창조 활동을 통제할 수 없다. 셋째, 민간은행의 배타적 신용창조 및 배분 권한이 주기적 금융ㆍ경제위기를 낳는다. 이는 전 세계 대부분의 경제에서도 그러하다.

 

민간은행은 법정 의무 지급준비금(이하 ‘지준금’으로 약칭)을 유지하고, 은행간 지급결제를 위해 필요한 지준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한다. 그리고 지준금은 중앙은행만이 공급한다. 하지만 이는 ‘실질적으로’ 민간은행들의 요구로 결정된다. 흔히 한국은행만이 지준금(중앙은행 화폐)을 발행할 수 있으므로, 한국은행의 지준금 발행을 제한하면 민간은행들의 영업도 제약할 수 있다고 주장된다. 기술적으로만 보면, 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반대가 현실에 부합한다. 민간은행들의 지준금 필요를 중앙은행이 무시할 수 없고, 따라서 중앙은행은 민간은행의 필요 지준금을 항상 수용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것을 지준금 공급의 내생성이라 부른다.

 

가계와 기업 등 민간부문은 중앙은행 화폐인 지준금이 아니라 민간은행들이 발행하는 신용화폐를 사용하여 경제활동을 수행한다. 민간은행들이 대출을 통해 예금, 즉 신용화폐를 창조하고 공급하는 것이다. 이때 민간은행은 신용화폐를 ‘무(無)에서 창조’한다. 다만 민간은행의 신용화폐 창조는 지준금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대출과 예금의 일정 비율을 지준금으로 보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고객들의 지급결제를 위해서도 지준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준금이 부족하면 은행들의 신용창조와 지급결제에 제약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장 전체에 지준금이 부족해지면 중앙은행은 그것을 충분히 공급할 수밖에 없다. 보통 어떤 은행의 지준금이 부족하면 자본시장에서 조달한다. 그런데 시장 전체적으로 지준금이 부족하게 되면 금리가 상승하게 된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금리가 하락할 것이다. 현대 대부분의 중앙은행들은 타겟으로 삼는 금리(예컨대, 한국은행은 7일물 RP 금리, Fed는 1일물 RP 금리)를 기준금리 수준으로 유지하는 방식으로 통화정책을 수행한다. 그런데 지준금 과부족으로 타겟 금리가 기준금리를 벗어나면 중앙은행이 개입하여 지준금을 공급하거나 흡수해야 한다. 예컨대, 민간은행들의 과도한 대출로 지준금이 부족해지면 시장 금리가 상승할 것이고, 중앙은행은 이를 억제하기 위해 지준금을 공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융시장은 통제를 벗어나 붕괴할 수도 있다. 따라서 기술적으로는 중앙은행이 지준금 발행권을 통해 민간은행의 영업활동을 제한 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민간경제의 통화공급은 차입자들의 수요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환이 보장되는 통화 수요가 존재 하는 한, 민간은행들의 신용 창조와 공급 여력에는 제약이 없다. 민간은행들의 신용통화 공급은 대출과 예금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부채의 증가를 의미한다. 부채는 항상 채무불이행 가능성이 있다.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민간은행은 차입고객의 채무불이행 가능성만 없다면 무제한적으로 대출할 수 있다. 따라서 민간은행들의 대출과 통화공급을 제한하는 요인은 ‘신용도 높은’ 차입자의 대출수요인 것이다. 현대 경제에서 통화 공급은 수요가 주도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민간은행들은 민간경제의 화폐발행권을 독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배분할 권한도 배타적으로 행사한다. 민간은행의 신용화폐 창조 능력은 무한하지만, 아무에게나 대출하는 것은 아니다. 상환 가능성을 보장하는 차입자에게만 대출을 허용한다. 만약 차입자가 상환 불가능해지면 민간은행은 파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환 가능성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담보를 설정하거나 대기업처럼 상환 가능성이 큰 기업의 신용도를 활용하는 것이다. 반면 중소기업 대출 요구의 경우 담보가 제공되지 않는 한 거절되기 쉽다. 우리나라 민간은행들의 주택담보대출 비중이 높아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택가격이 심각한 수준으로 하락했던 경험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주택은 매우 훌륭한 담보로 간주 된다. 반대로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은 심화된다. 이는 민간은행들의 신용화폐가 비생산적으로 배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민간은행들에게 신용창조와 그 배분 권한이 배타적으로 주어지면, 자연적으로 기형적인 자원배분 현상이 발생한다. 민간은행에 의한 자원배분 왜곡이 심해지면 자산가격 버블과 붕괴로 이어지기도 한다. 금융시장 버블은 대개 파생상품이 주도한다. 그런데 은행들이 파생상품 거래에 자금을 공급하는 방식도 대출을 통해 신용을 창조하는 것과 동일하다. 매입하는 금융상품을 ‘자산’ 항목으로 기입하고, 지급 대금은 ‘부채’ 항목으로 기입하는 방식으로 간단히 금융파생상품을 거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래에 사용되는 화폐도 민간은행의 신용화폐이고, 상환가능성(흔히 리스크라 부른다)에 대한 신용평가 외에 신용화폐 공급 여력에는 제한이 없다. 따라서 은행들이 리스크에 대한 인식이 느슨해지면 버블이 발생하고 붕괴하는 것이다.

 

국민경제 전체는 이렇게 민간은행이 창조하는 신용화폐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생산과정은 끊임없는 화폐의 순환이 필수적이다. 조선소를 예로 들자면, 대형 선박을 수주 받아 건조하여 인도하기까지 2년이 걸린다고 하자. 이 건조기간 동안 조선소는 지속적으로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보통 수주계약을 하더라도 선주가 선조비용을 미리 지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간은행의 신용통화 공급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은행과 여타 금융기관들의 투기적 거래로 버블이 발생하고 붕괴하면, 민간은행들의 신용창조 활동은 멈추게 된다. 이것이 금융위기가 ‘공장의 위기’로 확산되는 이유이다. 통화공급을 민간은행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면 금융위기가 발생하더라도 공장이 멈출 이유가 없다. 버블과 붕괴, 그에 따른 금융위기의 규칙성을 고려할 때, 국민경제 전체가 민간은행에 의존하는 구조를 개혁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요컨대, 현대 자본주의 금융제도에서 통화 공급과 배분의 권한은 민간은행이 갖고 있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지준금이 이 체제를 떠받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준금리 목표제 하에서 중앙은행은 임으로 지준금 공급을 제한할 수 없다. 민간은행이 통화 공급을 담당한 결과 비생산적 자원배분 현상이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또한 민간은행이 주도하는 금융위기는 주기적으로 발생하는데, 생산적 통화공급이 이들에 의존함에 따라 경제 전체가 주기적으로 위기를 겪게 된다.

 

2. 재정운용의 실제

재정활동이 실제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해한다면, 재정적자 증가가 알려진 것만큼 위험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현재의 정부부채 발행에 대한 대안적 방안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로부터 말하자면, 첫째, 재정정책은 통화정책과 결합되어 있고, 정부의 예산제약은 없다. 둘째, 세금과 부채(국채발행)만이 필연적인 재정조달 수단이 아니다. 셋째, 국채발행보다 바람직한 재정적자 보전 방안이 존재한다.

 

 

재정과정의 실제를 [표 1]을 통해 설명해 보자. 이는 한국은행을 포함하여 현대 금융통화 제도를 운영하는 중앙은행 일반의 재무제표를 축약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정부의 세입과 세출을 관리할 권한과 책임은 한국은행이 진다. 정부의 모든 세입과 세출은 한국은행에 개설한 정부계좌(L3)을 통해 이루어진다. 세금이 걷히면 이 계좌로 들어가고, 지출하면 본 계좌의 잔고가 감소한다.

 

재정운용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정부는 민간은행으로 구성된 전산망을 통해 세금을 징수한다. 이는 납세자들이 민간은행이 발행한 신용화폐로 세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민간의 신용화폐는 유통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납세자들이 민간은행을 통해 세금을 납부하면 한국은행에 개설되어 있는 정부의 계좌로 입급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첫째, 민간경제는 민간은행이 발행하는 신용화폐로 세금을 납부하더라도, 이를 대행하는 민간은행은 자신의 지준금을 정부계좌로 이체한다는 점이다. [표 1]로 설명하면, 세금 납부액만큼의 L2가 L3로 옮겨지는 것이다. 둘째, 그 결과 세금 납부는 지준금 발행 잔액의 변화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통화인 ‘본원통화’는 현금(L1)과 민간은행 지준금 예치금(L2)로 구성된다. 정부예금 L3는 통화량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따라서 세금 납부로 인한 L2의 감소는 본원통화량의 감소를 의미한다. 즉. 납세는 시중의 지준금을 감소시킨다.

 

납세에 따른 지준금 감소는 기준금리를 위협할 수 있다. 세금 납부로 지준금이 감소하고 민간은행들의 지준금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면, 지준금 대부 시장에서 금리가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 통화정책 운용목표는 기준금리 유지이므로, 이를 방관할 수 없다. 납세로 감소한 지준금을 공급할 것이다. 제도적으로 지준금을 공급하는 방법은 한국은행이 민간은행에 직접 대출하는 방법 등 다양하지만 주로 공개시장운용 방법이 사용된다. 즉, 한국은행이 민간이 가진 자산을 매입하는 방법으로 지준금을 공급하는 것이다. 이때 활용되는 거래수단(자산)이 국채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방식, 즉 한국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채권인 ‘통화안정증권’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019년 2월 말 기준 한국은행의 국채 보유량은 16.7조에 불과한 반면, 통화안정증권 발행 잔액은 171.4조 원 이었다. 이러한 공개시장운용에 민간이 발행하는 각종 채권(회사채와 금융채 등)을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도덕적 해이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회사채를 중앙은행에 매도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 민간은행은 부실 가능성이 높은 채권을 한국은행에 매도하여 현금으로 전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첫째, 세금 징수는 지준금 변화를 낳는다. 둘째, 따라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한국은행의 개입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재정지출의 과정도 이와 같은 특성을 보여준다.

 

정부가 재정을 지출하는 경우는 세금 징수의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정부가 한국은행에 재정지출을 요청하면, 한국은행은 정부예금(L3)를 차감하고 정부지출 수령자가 거래하는 은행에 입금해준다. 그 결과 은행의 지준금 예치금(L2)가 증가한다. 즉, 정부지출은 정부예금(L3)을 민간은행 지준금 예치금(L2)로 전환한다. 예컨대, 정부가 노인들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는 경우를 고려하자. 개별 기초연금 수령자는 원하는 은행에 기초연금 수령 계좌를 개설하고 있다. 정부가 한국은행에게 노인연금 지급액을 결정해서 알려주면, 한국은행은 은행별로 기초연금 총액을 계산하여 그만큼의 ‘지준금’을 지급한다. 그러면 각 은행은 개별 기초연금 수급 노인들에게 자신이 창조한 신용화폐인 ‘예금’을 만들어준다. 기초연금 수급자는 이 예금액을 생활비 등으로 지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세금 징수의 경우처럼 재정지출도 지준금의 변화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정지출은 지준금 발행액을 증가시키는 과정이다. 따라서 재정지출이 과도하면 자본시장에서 금리가 하락하여 기준금리를 위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방어할 정도의 지준금을 흡수한다. 지준금 흡수에 사용되는 수단도 국채이다. 중앙은행이 보유하는 국채를 매각하는 것이다.

 

재정지출 과정에 대한 이상의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재정지출이 ‘새로운’ 지준금 창조를 낳는다는 점이다. 즉, 정부가 지출을 결정하면 중앙은행이 지준금을 새로 창조하여 집행하는 것이다. 재정지출은 정부예금(L3)를 감소시키고 지준금 예치금(L2)을 증가시킨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정부예금(L3)은 본원통화량에 포함되지 않지만, 민간은행 지준금 예치금(L2)은 본원통화량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 지준금 증가분은 중앙은행이 창조한 것이다. 따라서 재정지출은 중앙은행의 통화창조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3. 재정지출에서 세금과 국채의 역할 : 대안적 관점

세금 징수와 재정지출 모두 지준금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고, 이를 중앙은행이 관장한다는 점은 국채와 세금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세금이 중앙은행 화폐인 지준금을 수거ㆍ폐기하고, 재정지출은 중앙은행 화폐를 새로 창조해 낸다는 사실로부터 세금과 국채가 재정조달 수단이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재정운용의 각기 다른 과정에서 독자적으로 실행되는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재정통화 제도는 중앙은행이 정부에 직접 자금을 공급하는 일을 금하고 있다. 또한 정부예금 잔고가 음(-)이면 재정지출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제도적 제약으로 세금이든 채권 발행이든 정부예금을 충분히 확보한 경우에만 재정지출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적 제약은 어떤 경제적 필연이 아니라, 임의의 정치적 지향을 표현하는 제도적 설정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들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수정될 수 있고, 바람직하다면 의당 그렇게 해야 한다.

 

임의의 제도적 제약을 사상하고 보면, 세금과 국채발행 없이도 재정지출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재정 수입과 지출은 지준금을 통해 이루어지고, 이 지준금 발행 권한은 정부 기구인 중앙은행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의 경제적 효과는 아래에서 논의한다). 특히 국가부채 증가의 부정적 효과 때문에 재정지출을 제한해야 한다면, 국채를 발행하지 않고 중앙은행을 통해 재정지출을 늘리면 된다. 현재의 통화재정 제도 하에서도 정부지출은 이미 중앙은행의 발권력으로 집행되고 있다. 국채발행 없는 재정적자는 한국은행이 관리하는 정부 계좌에 음(-)의 저축, 혹은 정부의 중앙은행에 대한 부채가 증가함을 의미한다. 신용화폐 제도 하에서 중앙은행의 지준금 발행에는 제약이 없으므로, 정부에 대한 대출 여력도 무한하다 할 것이다.

 

이것은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통해 정부의 재정지출 자금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 국채발행을 중단할 경우 재정적자는 민간에 대한 빚이 아니라 중앙은행에 대한 빚으로 전환된다. 다른 한편, 재정적자 증가분은 민간은행의 지준금(L2)로 전환되어 민간에 대한 중앙은행의 부채가 증가한다. 통상 지준금은 중앙은행의 부채라 부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지준금 부채는 정부의 국채발행보다 효율적으로 보인다. 첫째, 이제 정부는 더 이상 국채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정부는 이제 민간 국채보유자가 아니라 중앙은행에 이자를 지급할 것인데, 중앙은행은 이를 정부에 되돌려 주기 때문이다. 정부가 중앙은행에 지급하는 이자는 정부 내부거래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가 ‘부채’로 불리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변제 의무가 없는 부채이다. 불태환 화폐가 지배하는 현대 경제에서 지준금 보유자자가 상환을 요구하면, 중앙은행은 또 다른 지준금을 발행하여 지불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중앙은행 부채는 그 누구의 부채도 아니다. 셋째, 정부의 마이너스 저축은 시장에서 매매되는 대출채권이 아니다. 따라서 국채 투매 등 시장의 변덕에 따른 국채 문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통화정책적 측면에서 보면 국채발행 없는 재정적자는 과잉 초과 지준금을 초래할 것이다. 현재의 제도에서라면 보통은 국채를 발행하여 이를 흡수하지만, 국채가 발행되지 않으면 그 수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정부가 국채 대신 음(-)의 정부예금을 사용할 경우 초과 지준금 관리 수단이 사라지고, 기준금리는 제로(0)로 떨어질 것이다. 제로 금리의 문제는 흔히 ‘통화정책 여지’의 축소로 이해된다. 하지만 저금리에 따른 통화정책 여력의 축소가 통화정책의 효과성에 문제를 야기한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경기과열 억제를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하고자 하는 경우라면 저금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초과 지준금 과잉으로 기준금리의 인상 자체가 어려워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아래 참조). 또한 경기부양을 위한 통화정책, 더 정확하게는 기준금리 인하가 얼마나 효과적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예컨대, 2008년 이후 초저금리 시대에도 세계경제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일본은 지난 20여 년 동안 거의 제로 수준의 기준금리를 유지했지만 두드러진 경기부양 효과는 없었다. 반면 재정정책은 효과가 직접적이고, 섬세하게 기획된 타겟에 맞춰 재정지출이 가능하다(재정정책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아래 참조). 따라서 대안적 재정조달 방안으로 통화정책의 의미가 축소된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더 효율적인 정책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기준금리 하락의 실질적 문제는 은행의 수익성 악화일 것이다. 기준금리가 하락하면 은행들의 마진이 축소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저금리가 장기간 지속된다면 은행이 파산할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 민간은행이 필요하다면 이는 막아야 하고, 초과 지준금 관리를 통해 양(+)의 기준금리를 유지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국채 발행이 중단된 상황에서 초과 지준금을 흡수하여 충분히 높은 금리 수준을 유지할 방법이 존재하는가? 그렇다. 첫째, 한국은행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국채 대신 통안채를 공개시장운영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발권 기관으로서 자체 채권을 발행한다 하더라도 부채부담에서 자유롭다. 예컨대, 국가신용도 하락의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통안채 상환을 요구하면 간단히 지준금을 발행하여 지급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둘째,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이,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EU 등이 입증한 것처럼 초과 지준금에 대해 이자를 지급하는 방법도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완화하고자 이들 중앙은행들은 대규모 국채와 부실채권들을 매입했고, 그 결과 대규모 초과 지준금이 공급되어 기준금리를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현재에도 그렇다). 하지만 초과 지준금에 대해서도 이자를 지급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플러스(+) 금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한국은행도 2010년 10월부터 이와 유사한 통화안정계정을 운영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현대 재정통화제도하에서도 재정활동은 지준금의 변화를 유발하고, 중앙은행의 개입이 필수적이다. 중앙은행이 공개시장운용 수단으로 국채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국채의 실질적 의미가 재정적자 보전수단이라기 보다는, 재정활동에 따른 지준금 변화를 상쇄하는 수단이란 점에서 찾아진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중요한 정책적 대안의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국채의 실질적 역할이 지준금 관리 수단이라면, 대안적인 지준금 관리 방법을 고안하면 재정적자를 보전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하고 있고, 초과 지준금에 이자를 지급하는 방법이 세계적으로 실행되어 그 효과성이 입증되었다. 이렇게 정부적자를 국채 발행 대신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여 재정지원하고, 지준금 관리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정부부채 증가와 국채 발행에 대한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역대 정부 GDP 대비 국가 채무 증가폭. jtbc 화면 캡처.

4. 재정적자의 위험성 : 반론

우리나라 경제가 처한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재정정책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된다. 정부의 역할 강화는 재정규모의 확대를 의미하는데, 증세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지 않다.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불신이 깊고, 복지경험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100% 국채발행 없는 적자재정도 장기적 목표로 정하고 단계적으로 실행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중ㆍ단기적으로 국채발행은 불가피해 보인다.

 

국채를 발행하여 재정적자를 보전하는 경우 다음과 같은 우려가 제기되곤 한다. ①국가부채위기, ②국가신용도 하락과 외국인 자본 이탈, ③인플레이션, ④구축효과, ⑤미래세대 부담론. 각각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자.

 

①국가부채위기

국가부채위기론에 따르면, 국가부채가 과도하면 특정 시점에서 시장의 투자자들이 정부의 지불능력을 의심할 수 있다. 시장의 신뢰를 잃은 정부의 국채는 투매의 대상이 되고, 국채 투매가 발생하게 되면 이자율이 급등하여 경제를 어려움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시장은 적정한 국가부채 수준을 모니터링하고, 규칙을 위반하는 정부에 대해서 가차 없이 처벌하는 ‘채권 자경단’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주장과 함께 최근 남유럽 국가들의 국채위기와 최근에는 베네수엘라 등을 사례로 인용한다.

 

하지만 이들이 인용하는 사례들은 맥락이 전혀 다르다. 원칙적으로 어느 정부가 (1)주권통화를 보유하고(우리나라는 ‘원화’라는 자체 통화를 보유하고 있다), (2)외화가 아니라 그 주권통화 단위로 표시된 국채를 발행하며, (3)다른 무엇인가와 국내통화의 교환비율을 유지하려 하지 않는 한(예컨대 환율 고정이나 금태환 유지), 해당 정부는 자의가 아니고서는 파산(insolvency) 상태에 빠질 수 없다. 즉, 위 세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국가부채위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민간 투자자들이 국채를 투매한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상환을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통화를 창출’하여 민간이 매도하고자 하는 정부채권을 모두 매입하면 그만이다. 국가의 부채가 외국통화로 표시되어 있는 외채의 경우는 다르다. 이는 외환으로 상환해야 하는데, 외환보유고가 부족하게 되면 외채에 대한 지불불능 사태에 빠질 수 있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해당 외화를 발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채위기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는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의 국채위기는 위 조건 중 (1)과 (2)의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다. ‘유로화’라는 단일 통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국가들은 유로화 발행권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만이 유로화를 발행할 수 있다. 따라서 남유럽 국가들에게 유로화는 ‘외화’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국채위기가 아니라 외채위기였다. 또한 터키와 남미 국가들의 국채위기도 전반적인 ‘금융불안’의 일부이고, 주로 외환위기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주류 담론은 부채의 기본적 성격조차 구분하지 않고, 단지 부채의 양과 금융위기를 직접 연결한다.

 

반면 중앙은행이 대규모 부채를 떠안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위기극복 방안이다.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발행하여 민간이 보유한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한 최근의 사례로는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의 일본과 2008년 발생한 세계 금융위기에 미국, 영국, EU 등의 중앙은행들의 자산매입 정책(소위 양적완화정책) 등이 있다. 중앙은행의 개입으로 금융위기의 파국적 결말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자국통화 표시 국채는 절대 부도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②국가신용도 하락과 외국인 자본 이탈

외채위기(정부의 차관 포함)는 보통 환율급등과 그에 따른 물가상승으로 이어진다. 환율급등은 해외자본의 대규모 이탈이 낳은 결과이다. 특히 최근의 터키 금융불안정과 남미 국가들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를 두고 주류 경제학 지지자들은 과도한 국가부채를 근본 원인으로 지목한다. 즉 국가부채가 증가하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가신용도를 의심하여 투자자금을 회수하고, 이는 다시 환율폭등과 경제위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사례가 아니다. 우선 외채와 국내통화 표시 국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주권통화를 발행하는 국가가 주권통화로 표시되는 국채를 발행하면, 국채 보유자가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정부의 상환능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적극적 재정정책을 통해 경제가 강건하게 성장한다면, 국채에 대한 외국인의 신뢰가 하락할 이유가 없다.

 

둘째, 설사 외국인 투자가 이탈한다 하더라도, 건강하게 성장하는 경제에서 그것은 일시적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장하성(2014)의 연구와 그가 인용하는 연구에 따르면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시에도 우리나라로부터 외국자본의 이탈은 양적으로 크지 않았다. 또한 이탈한 외국 자본도 머지않아 재유입되었다. 우리나라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때, 채권가격과 주가의 폭락을 양질의 투자수단을 저가로 매수할 기회로 활용하는 세력이 등장하곤 했던 것이다.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국면에서 외국인 자본의 일시적 유출과 재유입이 좋은 사례이다.

 

셋째, 보다 근본적으로, 재정정책 자율성을 포기할 만큼 외국인 투자가 한국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경제에 재정정책과 외국인 투자 중 어느 것아 더 중요한가? 증권시장에 투자된 외국인 자본이 우리나라 경제 펀더먼탈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불분명하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살펴보자.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19.4월 외국인투자자 증권매매 동향」 보도자료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 자금 대부분이 포트폴리오 투자였고, 생산적 투자(해외직접투자)는 극소량에 지나지 않았다. 2019년 4월 말 기준 외국인 투자 총액은 코스피 주식 545.3조(37.3%), 코스닥 주식 28.8조(11.1%)의 규모였다(괄호 안은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 하지만 코스피 투자의 96.1%, 코스닥 투자의 80%가 포트폴리오 투자로, 대부분이 배당이익과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적 성격임이 드러난다. 또한 같은 시기 외국인은 채권시장에 총 112조 원을 투자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280억 원(0.025%)만이 회사채이고 거의 모든 투자금이 국채와 통화안정화증권에 투자되어 있었다. 따라서 외국자본의 유출입이 국내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자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재정정책 여력을 제한한다면, 외국의 투기자본의 유출입 일부를 제한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외국인 자본 문제와 관련하여, 변동환율제는 재정정책의 자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국가부채가 자국통화로 표시된 부채라 하더라도, 그것을 외국인이 대량으로 보유하는 경우 어떤 이유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채를 대량으로 매도하게 되면, 외환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여 환율이 크게 변동할 수 있다. 만약 환율을 특정 수준으로 유지하고자 한다면, 충분한 외환보유고를 보유해야 한다. 또는 ‘외국 투기자본이 보기에’ 해당 정부의 외환 조달 능력이 충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투기적 자본의 공격을 받아 외환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정부가 환율이든 태환이든 무언가 방어하고 보장하려고 하면 그것이 곧 약점이 되어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요컨대, 변동환율제 하에서 외국인 자본 이탈에 따른 환율변동은 우리나라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적극적 재정정책을 제한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우선 앞서 지적한 것처럼 재정정책이 외국인 자본의 이탈 원인을 제공할 가능성이 낮다. 또한 일정정도 자본시장 개방이 불가피하다면,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환율의 급격한 변동으로 유발되는 부정적 효과는 재정정책으로 방어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일 것이다. 예컨대, 환율인상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경제부문에 대해 정부재정으로 보조금을 지급하여, 그 효과가 국민 전체의 부담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대안도 고려해 볼 수 있고, 모든 대외 거래에 헤징을 의무화하는 제도도 고려해 볼 수 있다(헤징 비용을 재정으로 보조하는 방법).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자율 인상으로 대응하는 것은 그 효과에서도 무력할 뿐더러, 정부의 보조금 지급 비용보다 경제 전체적으로 훨씬 큰 피해를 낳는다. 정부(재정정책)가 책임을 지고 손해를 보는 편이 낫다는 말이다.

 

③인플레이션

재정적자가 낳을 위험 중 가장 빈번히 거론되는 우려는 인플레이션 상승이다. 하지만 그 메커니즘에 대한 논리는 명시적으로 잘 제시되지 않는다. 우선 상정할 수 있는 인플레이션 경로는 재정적자에 따른 ‘총수요’ 증가이다. 고도 성장기의 일상적 수준의 인플레이션은 문제 삼기 어려울 것이다. 총수요 증가가 ‘문제적’ 인플레이션을 야기하려면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에 도달해 있어서, 총수요가 증가해도 생산은 증가하지 않아야 한다.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에 도달하면 총수요가 증가하더라도 물가만 상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조업 가동률이 73%로 떨어져 있고, 300만 명 이상이 실업자(확장실업률 기준)인 현재 우리나라 경제는 완전고용 상태와는 한참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지배적인 인플레이션 주장은 통화량 증가는 물가상승을 낳는다는 맹목적 믿음에서 나온다. ‘어느 경우든 통화량 증가는 물가상승을 낳는다’는 주류 경제학의 ‘화폐수량설’이 널리 퍼진 까닭이다. 국채 대신 중앙은행이 재원을 공급하는 방법의 경우 이 주장이 가장 전면에 등장할 것이므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가설은 매우 비현실적인 가정들에 기초한 관념으로 현실에 적용될 수 없다. 화폐수량설을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여기서 M은 거래에 활용되는 통화량, V는 화폐유통속도(1단위의 화폐가 매개하는 거래 횟수), P는 가격, Y는 실물 수량으로 측정되는 생산량을 나타낸다. 따라서 좌변은 거래에 사용된 총 화폐량, 우변은 총생산물의 화폐적 가치를 의미하므로, 본질적으로 양변은 항상 같다. 여기서 화폐유통속도는 제도적 요인이나 경제적 습관 등에 의해 결정되므로 단기적으로 잘 변하지 않는 상수로 가정할 수 있다. 또한 경제가 ‘완전고용상태’에 있으므로 단기적으로 생산량(Y) 또한 확대되기 어렵다고 ‘가정’(!)한다. 마지막으로 통화량은 중앙은행이 임의로 변경할 수 있는 정책변수로 간주된다. 이러한 가정들이 성립하면, 통화량의 변화는 비례적인 가격 변화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항등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현실을 완전히 오도(誤導)하는 것이다. 첫째, 위 식에서 통화량 M은 재정지출로 늘어나는 지준금이 아니라 신용통화량을 의미하는데, 지준금 증가와 비례하여 증가할 것이란 보장이 없다. 신용통화는 민간은행이 창조하여 공급하는 신용화폐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은행의 대출이다. 중앙은행이나 민간은행이 이를 강제로 늘릴 수 없다. 신용통화 공급을 결정하는 것은 지준금이 아니라 ‘신용도 높은 민간부문의 수요’이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실시된 양정완화정책이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 양적환화정책으로 엄청난 초과 지준금이 공급되었지만 신용통화량은 그에 비례하여 증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신용통화량 변화는 생산량 변화를 동반한다. 생산과 고용을 담당하는 민간경제부문은 실제로 필요할 경우에만 대출받으려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늘리는 이유는 생산에 투자하여 이윤을 얻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통화량의 변화는 생산과 고용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M과 Y가 비례적으로 변화하게 되면 가격(인플레이션)의 큰 변화 없이도 위 항등식은 성립하는 것이다. 화폐수량설은 완전고용 상태를 그저 ‘가정’하는 방식으로 이를 무시한다. 하지만 이는 설명의 대상이지 가정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 가정도 매우 비현실적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불완전고용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우리나라의 가동률과 실업률을 보라).

 

그렇다고 ‘무한한’ 재정적자가 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호황기에 나타나는 일상적인 물가상승을 제외하고 문제적 인플레이션은 ‘실물적 제약’(constraint of real resources)으로부터 발생한다. 경제의 생산능력 이상으로 수요를 확대하는 재정적자는 생산의 증가 없는 물가상승을 야기할 수 있다. 즉,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통화량이 증가해서가 아니라 경제가 가진 생산능력을 초과하는 수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재정여력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용 실물자원의 정도, 다른 말로 하면 경제의 생산능력 범위 내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전간기 독일, 짐바브웨, 남미 등에서 발생한 초인플레이션이 이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 모든 사례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이전에 대량의 생산시설이 파괴되고 생산물 공급이 급격히 감소했다는 사실이다. 독일은 전쟁으로, 짐바브웨는 토지개혁으로 생산이 대규모로 축소되고 실업이 급등했다. 베네수엘라를 포함하여 남미 국가들의 경우에는 자체 생산시설을 발전시키지 못하여 생필품 등 기초 생활물자조차 대외에 의존하는 경제구조가 형성되어 있고, 수입을 위한 외채발행이 문제를 야기했던 것이다. 이 세 경우 모두 생산 감소와 실업 증가로 궁핍해진 국민들을 재정적자로 지원하여 총수요를 오히려 확대시켰다. 그 결과 생산물의 품귀 현상이 발생하고, 대중들은 적자재정으로 부여받은 구매력을 이용해 ‘사재기’로 대응하자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남미의 경우 정부의 통제 밖에 있는 외채문제로 비화되면서 수렁에 빠진 것이다. 결국 역사적으로 발생한 초인플레이션은 생산설비가 파괴되거나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를 능가하는’ 재정적자가 원인이었다 할 것이다. 즉, 경제의 생산역량 내에서 이루어지는 재정적자를 두고 초인플레이션과 연결시키는 주장은 허구에 가깝다.

 

요컨대, 중앙은행이 지준금으로 재정적자를 보존해 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총수요 증가를 공급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면 ‘문제적’ 인플레이션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④구축효과

주류 경제학의 통념에 따르면 정부부채가 증가하면 금리가 올라 민간투자를 위축시키는 ‘구축효과’가 발생하고, 그 결과 경제 전체의 효율성이 하락한다. 이 주장은 다음 세 가지 가정에 기초한다. 첫째, 대부 자본량이 희소하고, 둘째, 자본시장에서 민간과 정부가 차입하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셋째, 정부지출보다 민간투자가 항상 더 효율적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가정들이다. 첫째, 민간이 활용하는 대부 자본량은 희소하지 않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민간경제가 사용하는 신용통화는 민간은행들이 무에서 창조하여 공급하고, 신용창조 능력에 제약이 없다. 둘째, 정부와 민간경제는 동일한 시장에서 경쟁하지 않는다. 정부는 중앙은행이 창조하는 지준금을 사용하여 지출하는 반면, 민간경제는 은행의 신용통화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불태환 화폐 제도에서 양자 모두 희소한 자원이 아니다. 셋째, 정부지출과 민간투자는 동일한 효율성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자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부지출은 공공의 복리와 경기부양을 목표로 한다. 반면 민간투자는 해당 투자로부터 나오는 이윤만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양자의 효율성은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 공공복리의 관점에서 보면 민간투자가 오히려 비효율적인 것이다.

 

실제로 금리는 중앙은행의 정책변수이다. 현실에서 시장의 단-장기 금리 모두 중앙은행의 기준금리를 추종해 왔다는 경험적 연구는 무수히 존재한다. 잔존 기간별 수익률 곡선(yield curve)은 이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시장 금리는 만기가 길수록 더 높아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중앙은행의 금리 결정능력이 결함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니다. 장기 금리가 높은 이유는 장기채권 구매자의 인플레이션 기대나 예상되는 채권가격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장-단기 채권의 금리차가 지나치게 커서 문제가 된다면, 중앙은행이 장기채권을 매입하고 단기채권을 매도하는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금리차를 축소할 수도 있다. 실제로 장기적으로 보면 장기와 단기 금리 모두 기준금리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또 하나 지적할 점은 금리가 투자에 미치는 효과이다. 주류 경제학 투자 이론에 따르면 금리는 투자비용이고, 투자의 한계생산가치가 투자의 수익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클 때 투자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금리상승은 투자의 상대적 비용을 상승시켜 투자를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이러난 논리의 첫 번째 문제는 한계생산가치를 사전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계생산가치는 한계생산물에 가격을 곱한 값으로, 현재의 금리와 비교하기 위해서는 이를 사전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한계생산물의 양을 측정하기도 어렵거니와 가격도 투자 이후 한계생산물이 시장에서 실현된 이후에나 알 수 있게 된다. 양자 모두 사전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한계생산가치를 금리와 비교하여 투자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넌센스에 가깝다.

 

종합하면, 구축효과가 작동하는 경로는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재정적자는 금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리가 민간의 투자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투자 결정은 금리 대비 수익이 아니라 이윤의 ‘양’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윤의 양은 생산물의 판매로 실현되는데, 수요만 보장된다면 추가적 투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재정적자는 총수요를 늘리는 정책이므로, 기업들의 투자를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기업들은 시장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경쟁수단으로 투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이는 재정적자가 구축효과를 낳아서 비효율적이라는 주장이 비현실적임을 의미한다.

 

⑤미래 세대 부담론

재정적자 증가를 반대하는 또 하나의 흔한 (감성적) 논리는 미래 세대 부담론이다. 당대의 부채는 미래 어느 시점에 이자와 함께 상환되어야 하고, 그것은 미래 세대가 될 것이란 주장이다. 미래 세대 부담론은 특히 국민연금 등 공적 사회보험의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는 논리로도 흔히 사용된다. 재정이든 국민연금이든 정부가 책임져야 할 공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선 지적할 것은 국가부채는 미래에 반드시 상환해야 하는 민간의 부채와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국가부채는 상환되지 않는다. 만기가 돌아오는 국채라도 단순히 만기연장 혹은 차환(refinacing)을 통해 미래로 연장할 뿐이다. 만약 국가부채위기처럼 민간이 이를 거부하는 경우 중앙은행이 매입하면 된다. ‘국가가 운영’하는 공적 사회보험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그 어떤 공공 부채도 미래 세대가 부담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따라서 국가부채 누적잔액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루어진 정부지출의 장부상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단순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정부가 적자재정을 운영하고 모든 적자분을 중앙은행이 공급한다고 하자.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재정지출이 경제의 생산능력을 초과할 만큼 과도한 총수요를 창출하는 경우라면, 인플레이션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이 외에 재정적자가 문제될 것이 없다. 또한 중앙은행은 정부에 대한 채권을 영구적으로 보유할 것이므로 국채위기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이자 지급 등을 위해 미래 세대에게 더 큰 세금 부담을 지우는 것도 아니다.

 

미래 세대의 실질적 문제는 이러한 ‘회계적 문제’가 아니라 ‘생산성과 총생산량’의 문제이다. 미래에 충분한 생산물을 창출할 수 없다면 미래 세대의 물적 생활수준은 하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긴축적 재정은 경제성장을 저해하여 미래 세대를 위한 생산력 기반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회계적’ 문제로 지출을 제한하는 것은 오히려 미래 세대의 ‘실질적 부담’을 가중 시키는 정책일 수 있다. 미래 세대에게 넘겨줄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건전한 재무제표’가 아니라 생산성 높은 ‘건강한 경제’여야 한다.

 

하나의 예시로, 장기적 재정건전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재정지출을 축소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미래 은퇴자들의 ‘화폐적 청구권’을 보장하기 위해 강력한 강제저축을 시행하는 것과 같다. 그 결과 현재 세대의 소비는 극도로 위축되고 경제성장은 둔화될 것이다.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 남겨질 경제는 저생산성의 경제가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강력한 강제저축의 결과 현재 세대가 은퇴할 시기에 총생산물 대비 총연금급여의 비중이 급등할 수 있다. 이는 미래 세대가 생산한 생산물 중 더 많은 부분이 노인들에게 돌아갈 것이란 의미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미래 세대의 부담이 아닌가?

 

현재 주택을 두고 벌어지는 세대간 갈등이 이와 유사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현재 주택 소유자들의 큰 부분이 중장년층 이상이고, 이는 그들이 청년기에 대규모로 저축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저축이 아니라 투자 혹은 투기로 명명하여 도덕적으로 비난한다 해도 총주택량이 변하지 않는 한 문제는 변하지 않는다.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 없이’ 현재의 저축을 강제하는 방법은 미래 세대의 생산물을 은퇴자들이 더 많이 점유하게 한다. 과거에 재정적자를 통해 ‘공공주택’을 대량으로 건설하여 현 청년 세대에 물려줬더라면 주택을 두고 벌어지는 세대간 갈등은 크게 감소했을지도 모른다. 세대간 갈등의 대부분은 과거의 긴축재정이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국민연금을 경제 및 정부재정과 분리하고 미래 재정건전성만을 강조하는 입장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공적 연금의 재정건전성 확보란 다른 말로 하면 은퇴 후를 위한 더 많은 강제저축을 의미하는데, ‘노후는 각자 알아서 준비하게 하라’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강제저축 주장은 국가의 책무성을 포기하고, 국가의 존재이유마저 부정하는 관점이다. 더구나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강제저축은 미래 생산물에 대한 ‘청구권’의 축적일 뿐, 미래 생산물을 줄이는 일이다. 1인당 청구권 증가보다 1인당 실물 생산량이 더 빨리 증가하지 않는 한, 미래 세대는 오히려 과거 저축으로부터 수탈당할 수도 있다.

 

적자재정으로 우리나라 경제성장과 생산성 향상이 가능한가? 현재 우리나라 경제의 침체는 자원부족이 아니라 자원을 활용할 구매력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은데 연유한다. 2018년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73%로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 고령화로 생산가능 인구가 감소한다고 하지만 생산가능 인구 중 일자리를 찾지 못한 비중(확장실업률)이 2019년 1분기 13%(통계청)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유휴 생산 자원이 과잉인 것은 생산성이 너무 높아 우리나라 국민들의 물질적 욕구를 모두 충족하고 남기 때문이 아니다. 실상은 그 반대이다. 가계의 소득 수준이 경제의 생산능력 대비 상대적으로 낮고, 소득불평등이 심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로 보아야 한다. 경제의 넘쳐나는 생산 자원을 온전히 활용하여 국민 복리를 개선하는 방법은 저축이 아니라 지출을 늘리는 것이다. 불태환 화폐 제도에서 구매력은 화폐의 형태로 존재하고, 화폐는 정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발행할 수 있다. 화폐는 그저 장부상 기록으로 창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가 화폐를 창조하여 국민 전체의 구매력을 높여주면 유휴 생산자원이 즉시 가동되어, 경제가 성장하고 생산성도 개선될 것이다. 더 건강하고 생산성 높은 경제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 세대도 이 혜택을 누릴 것이다.

 

요컨대, 현재의 재정적자는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회계 장부상의 기록일 뿐, 미래 세대가 상환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재 강제저축보다는 적극적 재정정책과 수요 증가를 통해 생산성 높고 건강한 ‘실물’ 경제를 미래 세대에 남기고, 높은 생산성이 낳을 풍부한 생산물을 미래 은퇴자들과 나누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이것이 진정한 세대간 연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5. 우리나라 정부의 재정여력

우리나라 국회예산정책처는 2018년 말 『2019~2050년 NABO 장기 재정전망』(이하 NABO 재정전망으로 약칭)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국가채무비율은 2020년 39.5%에서 2050년 85.6%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채무비율이 높아질 것이란 근거로 선제적으로 재정지출을 삭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므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NABO 재정전망의 중요한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NABO 재정전망은 bottom-up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취업자 수, 고령화에 따른 사회보험료 지급 등 개별 변수 혹은 제도의 변화가 재정에 미치는 효과를 추정하는데 유리한 방식이다. 예컨대, bottom-up 접근법은 미래 의무지출액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둘째, NABO 재정전망은 매우 비관적인 장기 거시경제변수에 기초하고 있다. 거시경제변수는 재정수입 전망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쳐 정부채무비율을 상승시키는 주요 요인이다. NABO 재정전망은 2019~2050년 실질GDP 성장률을 2%가정하는데, 2020년 2.8%에서 2040년 1.5%, 2050년에는 1.2%로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이는 지난 2000~2018년 사이의 4.0%, 보다 최근인 2010~2018년 사이의 3.4%보다 매우 비관적인 예상이다. NABO 장기전망은 장기 경제전망이 비관적인 이유로 “인구고령화에 따른 노동투입 감소와 총투자율 하락에 따른 자본투입 감소 등 총요소생산성 약화”를 들고 있다. NABO 재정전망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 또한 해당 기간 동안 평균 1.9%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셋째, NABO 재정전망은 취업자 수 증가율 또한 2019~2050년 사이 평균 0.2%(연평균 6.3만 명)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 원인으로는 생산가능인구의 증가폭 둔화와 경제성장률 하락을 들고 있다. 취업자 수는 소득세 수입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변수이므로, 이의 감소는 재정수입의 하락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NABO 재정전망은 GDP 대비 재정 총수입의 비중을 2020년 25.6%에서 2050년 23.2%로 지속적으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는데, 그 이유가 취업자 수 감소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전망은 지지되기 어렵고, 잘못된 접근법으로 인해 지나치게 보수적인 경제전망을 낳고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 경제성장 전망에 있어서 NABO 재정전망은 경제성장이 배타적으로 공급측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하고, 수요 증가가 기술진보와 경제성장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무시한다. NABO 재정전망에 따르면, 경제성장은 노동투입, 투자 및 그에 따른 총요소생산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가정하고, 각 변수는 수요와 무관하게 인구변수 등 외생적 요인에 의해 배타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판단한다. 즉, 소득과 수요의 변화가 기술진보 등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고 있는, 일종의 숙명론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득과 수요의 변화는 단기적인 경제성장률뿐만 아니라 기술진보와 총요소생산성 등에도 영향을 미쳐 장기적 잠재성장률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대규모 실업과 낮은 설비가동률을 고려할 때, 소득이 증가하면 수요가 증가하고, 수요 증가는 유휴 생산자원을 활용하여 즉각적인 생산 증가를 낳을 수 있다. 총수요 증가에 따른 매출과 가동률의 상승, 그리고 생산 증가는 투자와 기술개발을 유도하여 경제의 잠재생산능력까지도 제고하게 될 것이다(위 참고문헌 참조). 설사 인구고령화에 따라 생산가능인구의 절대적 수가 감소한다 하더라도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현재의 실업자 수를 고려하면, 노동가능인구가 경제성장을 제약하는 요인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빈곤과 소득불평등이 비혼율과 출산율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인구변화 또한 고정된 상수가 아니다. 소득증대는 출산율을 높여 고령화 경향을 완화하는 효과를 낳을 가능성마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지출과 무관하게 미래 경제성장률을 ‘숙명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는 NABO 재정전망의 접근법은 신뢰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적극적인 재정지출은 미래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이는 다시 세수를 높이는 효과를 낳는다. 아래에서 보듯, 경제성장률 상승에 따른 세수 확대는 정부채무비율을 낮추는 강력한 요인이다. 결국 정부는 자신의 미래 부채비율마저도 스스로 결정할 강력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하는 대안적 재정전망에는 이를 반영하여 새로운 재정전망을 추계하고자 한다. 현재의 경제구조와 제도 하에서 (최저인금 인상과 같이) 일부 노동소득분배율 개선을 통해서 국민 전체의 소득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때에 경제성장 및 가계소득증가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여기서는 GDP의 3%(이자비용 제외) 적자재정을 운영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또한 적자재정지출의 효과를 고려하여 NABO 재정전망보다 1%p, 2%p, 3%p 높은 경제성장률을 상정할 것이다. 재정적자는 즉각적인 경제성장률 상승으로 나타나고, 그 혜택이 가계소득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나아가 재정적자분의 지출을 저소득층에 집중한다면, 추가적으로 소득불평등이 개선될 것이다. 그 결과 정부지출 증가와 가계소비지출 증가가 동시에 기술진보와 경제성장에 긍정적 효과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NABO 재정전망보다 낙관적 경제전망을 상정하는 것은 충분히 수용될 수 있다.

 

아울러 NABO 재정전망과 달리 GDP 대비 총수입 비율도 현재의 25.6% 수준으로 유지된다고 가정한다. NABO 재정전망에서 이것이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주요 이유는 고령화에 따른 취업자 수의 감소이다. 하지만 성장하는 경제를 상정하면, 이는 지나치게 비관적인 관점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현재 존재하는 대량의 잠재적 실업자가 취업자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으로 인한 취업자 수 증가가 고령화로 인한 생산가능인구 감소보다 빠르면 오히려 소득세 수입이 증가할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으로 국채 기간별 가중평균 이자는 2% 수준으로 관리한다고 하자. 앞서 지적한 것처럼 현대 통화제도에서 금리는 정책변수이다. 통화당국이 기준금리를 결정하면 국채 금리를 포함하여 시장금리가 따라간다. 장기금리의 경우 가산금리가 클 수 있지만, 국채의 만기구조를 조정하는 것도 통화당국이다. 국채 평균금리 2%는 지난 10년간 평균 실질금리 수준이다.

 

[표 2]와 [그림 1], [그림 2]는 NABO 장기 재정전망과 GDP 대비 본원적자(이자비용 제외한 재정적자) 3%를 가정한 경우들과 비교한 것이다. 2018년 정부부문(D3)은 3.1%의 흑자를 기록했음을 고려하면 당장 3% 적자는 총 6%의 추가 지출을 의미한다. 이 정도 규모의 적극적 재정정책은 경제성장에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가장 보수적으로 가정하여, 3% 적자재정지출의 결과 실질GDP가 NABO 거시경제 전망보다 1%p만 높아진다 하더라도 2020년 66.7조, 2030년 105.9조, 20년 후인 2040년에는 202.2조 원의 추가 지출이 가능하다(이 모든 가치는 ‘현재가치’임을 상기하자). 그럼에도 GDP 정부채무비율은 NABO 전망보다 겨우 최소 2.6%p, 최대 7.7%p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경제성장에 대한 재정지출의 효과를 보다 낙관적으로 예측하여, 실질GDP 성장률이 3%p 개선 될 것으로 가정하면 결과는 보다 나아진다. 본원적자 3%를 지키면서 경제가 연평균 5%로 성장할 경우, NABO 전망 대비 정부지출은 2020년 77.4조, 2030년 282.1조, 2040년 705.8조 추가로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결과는 전적으로 경제성장으로 인한 세수의 확대로부터 나온다. 그 결과 2040년 정부채무비율은 NABO 전망치보다 오히려 10.0%p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난다(그림 2 참조). 경제성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증거라 할 것이다.

 

재정건전성만을 고려한다면, 물가상승률이 더해진 명목GDP로 추계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수는 명목가치를 과세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NABO 재정전망은 장기 평균 물가상승률을 1.9%로 예상하고 있는데,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에서는 통상적으로 물가상승률이 높다. 외환위기 이후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증가율은 연평균 2.5%였다. 동일한 실질GDP 성장률에 대해서 NABO 추정보다 더 높은 물가상승률은 더 많은 세수로 이어져, 정부채무비율은 더 떨어질 수 있다.

 

요약하자면, 적극적 적자재정은 통념과 달리 정부채무비율을 크게 증가시키지 않는다. 유휴 생산자원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조건에서, 정부지출과 그에 따른 총수요 증가가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은 세수의 확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지적할 점은 경제가 성장하면 재량지출의 여지가 확대된다는 점이다. NABO 재정전망에 따르면 정부가 사용처를 자율적으로 정해 지출할 수 있는 재량지출 비중이 2040년까지 약 42%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의무지출은 현재의 법률과 제도가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할 때 지출해야 하는, 국민연금이나 기초연금 등 정부의 책임을 의미한다. 이 부분의 비중이 증가한다면 정부의 재량적 재정정책 여지가 감소한다고 할 것이다. NABO는 bottom-up 방식으로 추계했고 의무지출은 대부분 인구구조 변화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해당 기간 동안의 인구구조 변화는 상대적으로 쉽게 예측 가능하므로 NABO의 미래 의무지출 예상액은 상대적으로 정확하다 할 수 있다. 이를 수용할 경우, 경제성장 전망에 따라 재량지출 비중은 NABO와 반대로 오히려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2040년을 기준으로 NABO는 정부의 재량지출 비중이 약 42%로 축소될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경제가 3% 성장할 경우 그것은 53%, 5%로 성장하면 68.4%로 오히려 증가한다. 미래에 의무지출액이 증가한다 하더라도 경제성장이 충분하다면 큰 부담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미래 지출증가(대개 의무지출을 의미한다)를 대비하여 현재 긴축재정을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할 것이다. 오히려 미래 재정 부담 경감을 위해서도 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춘 재정정책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미래 지출부담을 우려하여 현재 재정을 보수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단견’이다. 미래 세대의 실질적 부담을 늘리는 정책인 것이다.

 

<그림 1> 3% 본원적자일 때 경제성장률에 따른 재정규모 변화
<그림 2> 3% 본원적자일 때 경제성장률에 따른 부채비율

 

6. 이행전략

본 연구는 GDP 대비 정부비중(26.5%)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세율을 높여 정부의 규모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정부비중 확대는 세수 확보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을 확대하기 위함이다. 정부비중이 커지면 경제의 외부적 충격에 대해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증세가 이루어지면 정부부채 문제는 더욱 완화되는 부수적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여기서 증세방향에 대한 구체적 제언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증세 추진 전략에 대해서 간단히 제언하고자 한다. 예컨대 당장 증세 주장은 국민적 지지를 얻기 어렵고,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는 정부와 정치권에 강한 불신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그동안 친자본, 친부자 정책으로 일관해 왔을 뿐만 아니라, 정부로부터 보호받은 경험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각자도생’이 가장 좋은 삶의 전략으로 수용되고 있는 이때에 증세 주장은 지지받기 어렵다. 복지를 확장한다는 약속을 덧붙인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 증세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정부가 희생(?)해야 한다.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계획하고, 이를 통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산층 이하 모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정부재정은 반드시 적자여야 한다. 최소한 10년은 정부가 무조건 적자이고 국민 대다수가 무조건 이익을 보게 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저소득층에 집중하는 재정정책이라도 자본가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 왜냐하면 총수요 증가는 자본 이윤을 증가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국민 대다수가 ①정부정책으로 인한 실질적 소득증가를 경험하고, ②복지를 경험하여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는 국민들의 인식에도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데, ③복지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는 연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될 것이고, ④정부의 중요성과 신뢰를 갖게 될 것이다. 아울러 ⑤정치참여 의식이 높아져, 보다 민주적 정치과정을 확보하기 위한 기반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천적 관점에서, 재정정책은 국민들 스스로 연대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정부는 사회갈등에 직접 개입하기 보다는 약자의 ‘뒷배’ 역할에 집중하여 그들의 협상력을 높여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해고가 두려워 노조가입과 파업을 주저하는 노동자들에게, 예컨대, ‘충분히 실효성 있는’ 노동자기금을 조성해 준다면 연대가 쉬워지고 더 잘 싸울 것이다. 행정력과 법을 동원한 사용자 규제와 처벌보다 이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한 복지항목이고, 정부재정의 큰 부분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성공적으로 실행된다면 정부와 정치권의 증세 제안을 국민이 수용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따라서 현재 필요한 것은 ‘희망적 전망’을 제시하는 일이다. 현실론(예컨대, “보편증세-보편복지”)으로는 국민을 설득하기 어렵고, 보수진영에 정권이 넘어가기 쉽다. 지금은 과거와의 단절 방안을 고민할 때이다. 재정적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그래서 중요하다. 보다 넓은 지혜와 보다 풍부한 연구를 기대한다.

필자 전용복은 2010년부터 경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8년 미국 University of Utah에서 수요측 요인으로 중국경제의 빠른 성장을 설명하는 논문을 작성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에서 가르치는 주류 경제학 대부분이 현실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믿으며, 대안적 경제이론을 탐구해 왔다. 특히 대안적 경제성장론, 화폐ㆍ금융론, 재정정책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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