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 후원으로 고문당한 정세권...'큰 사전' 편찬을 끝까지 후원하다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9.06.2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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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권은 1888년 4월 10일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잇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전통 교육을 받았고, 진주백일장에서 장원을 했으며 진주사범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는데, 3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18살에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23살에 하이면장이 되어 주위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샀다.

1910년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나, 면장으로서 주민들의 소득을 향상하고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방풍림 조성사업을 벌이고, ‘대동계’라는 저축계를 발족했으며, 누에를 치는 잠업조합연습소를 설립하여 목화를 대량 생산하여 우수 면장으로 선정되었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는 주택개량사업이었으나, 일제의 녹을 먹는 것에 회의를 느껴 1912년 사직했고, 1920년 경성으로 이주해 근대식 부동산개발회사 ‘건양사’를 설립하여 대규모 한옥단지 개발에 착수했다.

 

건양사 한옥단지, 숫자는 주택 수 추정치(사진 출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1920년대 경성은 산업도시화가 시작되어 도성 밖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빈민들이 모여 사는 토굴들이 늘어났고, 성 안쪽에서는 증가하는 일인들이 주거지 확장에 나서 종로 이남 남촌을 점거하는 상황에서 정세권이 한옥단지를 건설할 수 있는 곳은 종로 이북 북촌 일대였다. 정세권은 일제하에서 가세가 기운 왕족의 종친 이혜승 소유의 누동궁(익선동 166번지)과 고종의 서자 완화궁의 사저(익선동 33번지) 등을 매입해 한옥단지를 건설했다.

99칸짜리 덩치 큰 한옥은 시대에 맞지 않았다. 정세권은 크기는 작지만 기능이 개량되어 편히 살 수 있는 집, 한옥의 멋을 유지하면서도 크기를 줄이고 똑같은 구조를 지닌 집, 일반인들이 적정한 가격으로 매입하여 살 수 있는 한옥을 대량으로 건설했다. 1920년대 경성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고, 집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에서 정세권의 저렴하고 편리한 신식 한옥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북촌 진입 후 10년도 안 되어 조선을 대표하는 부동산업계의 거물로 성장하며 큰 부를 축적했다. 정세권은 시대와 시장의 변화를 읽었으며, 사람들이 어떤 집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간파했던 것이다.

건축왕으로 성공한 정세권은 민족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가 발족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서울지회를 설립하였고, 1927년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의 연대로 탄생한 신간회에도 참여하였다. 대자산가로 성장하던 정세권은 자신의 재력을 민족을 살리는 운동에 사용했고, 조선어학회와의 인연 또한 이들 활동을 통해 맺어졌다.

조선물산장려회 회의가 있던 어느 날, 정세권은 이극로에게 포부를 물었다. 이극로는 “한 민족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통일된 말이 없으면 문화 민족이 아니요, 통일된 말이 있어도 통일된 글이 없으면 문화 민족이 아니요. 통일된 글까지 있어도 사전이 없으면 문화 민족으로 행세할 수 없다고 하는데 우리 민족은 말과 글이 오래 전부터 있지마는 통일되지 못하였고 사전이 없으니 나는 이 점을 깊이 느끼어 말과 글을 통일하여 사전을 완성함으로써 일생의 사업으로 하겠소.”라고 답했다.

‘사전 완성을 일생의 사업으로 삼았다.’는 이극로의 비장한 각오에 공감하면서도 처음에는 ‘사전 만들기’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조선어 사전을 만드는 것이 필요는 하겠지만, 조선인들의 삶에 아무런 경제적·실질적 도움도 줄 수 없는 학자들의 이상론으로 보았다. 생각이야 좋지만 경제적으로 곤궁함을 겪으면 대장부의 포부도 일생의 사업도 흐지부지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정세권의 선입견이 바뀐 것은 수표동에 있는 조선어학회를 방문한 자리에서였다. 조선교육협회 구석 단칸방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던 조선어학회를 찾은 정세권은 휴일도 없이 사전 만들기에 전념하고 있던 편찬원들을 만나 큰 감명을 받았다.

 

수표정 교육협회의 한 간 방에는 매양 일요일이면 광목두루마기에 고무신이 섞인 차디찬 선생님 몇 분이 모여서 정답게 속살거리기도 하고 화중이 나서 싸우기도 하기를 하루도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거의 하루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줄곧 속살거리고 싸우는 목표에는 돈이나 명예나 권리란 털끝만큼도 없었습니다. 다만 민족 만대의 문화 곧 말과 글을 통일하여 사전을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나가도 그들의 속살거림과 싸움은 변하지 않고 십 년이 지나고 그의 속살거림과 싸움은 더욱더 열중하면서 차디찬 선생님의 수만 점점 늘어갔던 것입니다.
- 정세권, 「큰사전 완성을 축하함」, 『한글』 122호, 한글학회

 

 

누동궁 68채의 한옥단지(사진 출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사전 편찬원들의 우직하고도 강직한 열정에 감복한 정세권은 화동 129번지를 매입해 학회 회관을 지어 기부하고 사전 편찬에 필요한 예산 등 각종 활동비를 지원했다. 다른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전 편찬이라는 외길을 선택한 한글학자들과 기꺼이 동행이 되어 준 정세권을 비롯한 후원자들이 있어 어느 덧 사전은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1940년 3월 7일 학회는 사전 원고 일부를 총독부 도서과에 제출하였고, 일부 내용에 대한 정정과 삭제 등을 조건으로 3월 12일 극적으로 출판 허가를 받았다. 1942년 9월에는 어휘 카드 대부분의 초벌 풀이를 끝내고, 전체 체계 잡기도 완성 단계에 이르러, 주해를 완료한 낱말이 약 16만이고 미완료가 약 5천이었다.

그러나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사전 편찬 사업은 중단되었다. 10월 1일 이중화,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 이희승, 정인승, 한징, 권승욱, 이석린 등을 시작으로 모두 33명이 검거되었고, 조선물산장려회, 신간회, 조선어학회 후원 등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아오던 정세권 역시 1942년 11월 홍원경찰서에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가 15일 만에 풀려났다. 1940년대 들어 정세권은 여러 방면에서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1942년 11월에 한 차례 옥고를 치렀고, 1943년 6월 동대문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시기에 성동구 자양동 일대의 토지 35,000여 평을 강탈당함으로써 건양사의 사세도 급속히 기울었다.

기농 정세권

 

1945년 해방이 되자, 학회는 활동을 재개했다. 1947년 『조선말 큰사전』 첫 권을 펴냈고, 한국전쟁으로 잠시 편찬 사업이 중단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야기한 한글간소화파동으로 또 한 차례 편찬 중단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결국 1957년 1-6권까지 전권을 완성했다. 1929년 사전편찬회를 조직한 지 28년이 되는 해였다. 조선문화사의 금자탑 『큰사전』을 직접 편찬한 것은 학회였지만, 사전 편찬은 모든 피압박 조선인들의 독립을 향한 의지와 열망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정세권을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의 헌신적인 조력과 희생이 있었다.

 

1957년 10월 9일 완간된 큰사전 1-6권.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우리 글의 사전이 큰책까지 완성됨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우리 민족은 다 같이 기뻐하며 축하합시다. 이 사전이 완성됨으로써 우리 민족이 완전한 문화 민족이 되고, 인류 평화의 건설에 적지 않은 공헌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 만족은 다 같이 기뻐하며 축하하자는 것입니다.
- 정세권, 「큰사전 완성을 축하함」, 『한글』 122호, 한글학회

 

*참고문헌

김경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박용규,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

정재환, 『한글의 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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