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집착+안전불감증, 1421명 사망자 냈다

  • 기자명 김준일 기자
  • 기사승인 2019.07.24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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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23일 ‘가습기살균제 2차 수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유해한 가습기를 제조 판매한 SK케미컬 홍지호 전 대표 등 8명을 구속기소, 26명을 불구속기소했습니다. 업무상 과실치사로 재판에 넘겨진 기업은 총 6곳이 됐습니다. 그동안 가습제 살균기로 공식 확인된 사망자 1421명, 피해자는 6476명입니다.

2011년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사망사고가 공식 확인된 뒤 2차 수사결과발표 및 기소까지 8년이 걸렸습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가습기 살균제 2차 수사결과 발표> 이 뉴스의 행간을 살펴보겠습니다.

연합뉴스 유튜브 캡처.

 

1. '세계 최초’란 비극

1994년 유공(현재 SK이노베이션)은 ‘가습기메이트’라는 가습기살균제를 개발했습니다. 제품 출시에 앞서 서울대 연구팀에 동물실험을 의뢰했고 보고서는 1995년 7월에 나왔습니다. ‘실험대상 쥐에게 병변이 발생하고 백혈구 수치가 감소돼 추가 시험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하지만 보고서가 나오기 8개월 전인 1994년 11월 제품을 그냥 출시했습니다. 가습기 메이트는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았습니다. 이후 2011년 판매가 금지될 때까지 17년간 각종 가습기살균제 제품은 980만통이나 팔렸습니다. 안전불감증에 더해 세계 최초 타이틀 집착이 초래한 비극입니다.

한국기업은 유독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에 집착합니다. 지난 4월 국내 이동통신사들은 세계 최초로 5G 상용화를 발표했지만 기지국이 10% 정도만 설치돼 ‘오지게 안터지는 5G’란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도 4월 폴더블폰을 세계 최초로 출시했지만 불완전한 성능으로 공식 출시를 연기한 상태입니다. 그동안 한국 소비자들은 세계 최초로 출시되는 제품에 기꺼이 테스트베드가 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안전문제에 있어서 타협이 있어선 안됩니다.

 

2. 지연된 처벌

검찰의 수사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첫 수사발표는 2016년에 있었습니다. 이미 2011년 피해자 발생 뒤 5년이나 걸렸습니다. 2014년 3월 폐손상 조사위원회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확실하다고 발표한 사례가 127건이었습니다. 경찰은 2015년 9월 가습기 살균제 업체 8곳을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검찰은 2016년에 가습기 살균제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제대로 된 수사에 착수했고 기업들은 그제서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절차를 마련했습니다.

검찰 1차 수사는 가습기 살균제 성분 중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를 포함한 제품을 생산한 옥시와 롯데마트 등에 집중됐습니다. 반면 당시 동물 실험에서 유해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SK케미칼, 애경, 이마트 등이 판매한 CMIT, MIT 성분의 가습기 살균제는 처벌을 피했습니다. 2019년 조사에는 이들 기업도 기소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검찰 수사발표 뒤 사회적참사위원회는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2016년 검찰 수사 당시 미흡하다고 지적됐던, CMIT와 MIT 성분으로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업체들의 과실을 인정했다는 점을 주된 성과로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들 업체는 조직적 증거인멸까지 시도했습니다.

결국 이번 수사는 2016년 1차 수사에서 이뤄져야 했던, 불법화학제품 판매업체에 대한 기소와 단죄가 3년이나 늦춰진 것으로 봐야 합니다. 늦게라도 제대로 됐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당시 박근혜 정부와 검찰의 직무유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정부는 면피

이번 수사결과의 아쉬운 점으로 가습기살균제 화학물질 인허가 문제와 제품 출시 과정에서의 정부 과실 문제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점입니다. 제조 판매한 기업의 책임은 명확해 졌는데, 부실수사하고, 제대로 관리 감독 못한 정부의 책임은 불명확하다는 겁니다. 사회적참사 특조위도 “정부 책임 부분이 수사대상에서 빠졌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지난달 25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단체 등으로 이뤄진 '안전·공정·행복 연대 행동회의'는 김상조 전 위원장 등 공정위 관계자 16명을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바 있습니다. 공정위가 과거 가습기 살균제 관련 표시광고법 위반 처분 과정에서 광고 표현 등에 대한 실증 책임을 묻지 않았고, 실험 자료 또한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다는 취지입니다.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환경부, 늑장 수사 논란의 검찰, 과장광고를 방치한 공정위 등 국가 기관의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부분은 형사/민사소송을 통해서 밝혀질 것으로 보입니다.

피해자 지원 확대 역시 계속 논란이 될 전망입니다. 현재는 가습기 살균제로 유발된 폐질환과 천식, 태아피해만 질환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특조위는 가습기 살균제 관련 질환자 모두 피해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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