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혐오의 시대, <60일, 지정생존자>가 돋보이는 이유

  • 기자명 박현우
  • 기사승인 2019.08.09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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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남성들은 여성을 인격을 가진 존재로 대하기보단 성적 대상으로 대한다. 이는 자칭 예술업계에서 일하는 한국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한국 남성'이라고 콕 집을 수 있는 이유도 있다. 미국과 영국, 유럽의 예술인들은 각성하고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모습을 여러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한국-중국, 일본-의 대부분 자칭 예술인들은 여성을 대하는 촌스러운 렌즈를 바꿀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고 ‘표현의 자유'라는 단어를 남용하면서 당당하다는 듯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드라마, 예능, 게임, 문학, 음악, 전시, 사진 등 예외는 없다. 

이 예술업계의 남성들은 여성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예외 없이 성적으로 대상화하고는 하는데, 유독 집착적으로 성적으로 묘사하는 직업군도 있다. 그 중에서 비서는 정말 흔하게 성적으로 묘사된다. 흥행적으로나 작품적으로나 이렇다할 성과를 못 거둔 영화인 변혁의 <상류사회>(2018)는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교보재다. 이 영화를 연출한 변혁은 비서에게 딱 달라붙는 정장과 짧은 스커트를 입혔고, 뒤에서 카메라로 비서의 몸을 훑었다. 심지어 비서는 본인의 상사인 의원을 유혹하고 관계를 맺기도 하는데, 둘의 관계 역시 대단히 에로(!)하게 연출된다(‘에로'란 철지난 단어는 분명 촌스럽지만 그렇기에 이 영화에 더 잘 어울린다). 

애초에 이런 에로한 연출을 위해 중년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섹시한 비서 캐릭터를 만들고, 이 캐릭터의 노출신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한국 정치판에서 보기 힘든 젊고(1) 잘생기고(2) 똥배 나오지 않은(3) 의원 캐릭터를 만든 게 아닐까도 싶다. 나는 이 의심이 결코 과하지 않다고 자평하는데, 변혁은 에로한 연출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옆나라 일본의 뽀르노 배우를 섭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에로에 대한 고증, 비서-정장 페티시에 대한 장인 정신은 투철했으나, 정작 이 영화가 애초에 보여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은 여의도 정치판은 영화에서 전혀 확인할 수 없다. <상류사회>는 한국이라고 똥고집은 부리지만 전혀 한국처럼 보이지 않는 가상의 국가를 상정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이들-의원을 유혹하는 섹시한 정장 차림의 비서, 잘생긴 국회의원-을 투입하고 그들이 섹스를 하게 만든 뒤, 그 장면에’만’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비서 페티시, 정장 페티시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이 영화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은 성적대상화됐고, 애초에 보여주려고 했던 한국 정치의 현실은 다뤄지지도 못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아주 유명하고 비싼 배우들이 나오는 에로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대부분 에로 영화, 포르노의 설정도 섹스 장면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서만 존재하니까.

한국 정치를 다룬다면서 엉뚱한 것에 집착한 <상류사회>에 심하게 데인 상태인지라 2019년에 방영을 하기 시작한 JTBC의 <보좌관: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하 <보좌관>)이나 tvN의 <60일, 지정생존자>는 보기 전부터 긴장한 게 사실이다. 다행히(?) <보좌관>은 여성을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상류사회>와 비슷한 문제는 공유했다. 앞서 언급했듯 <상류사회>는 ‘그 장면들'을 그럴듯하게 보여주기 위해 한국이라기엔 대단히 어색한 가상의 국가를 상정한 뒤 이야기를 풀었다. 한국이 아닌데 한국이라고 우기니 극에 이입이 되지 않았고, 캐릭터들에게 몰입하기도 쉽지 않았다. 더 큰 큰 문제는 극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이 대단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느껴졌다는 거다.

이 지점에서는 <보좌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보좌관> 역시 배경이 한국이란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지만, 정작 극 내의 모든 요소들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마주하는 한국과는 거리가 멀다. 정치권의 비판이 두려웠던걸까? 특정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의 비판이 두려웠던 걸까? 정당이라고 등장하는데 그 당들은 민주당을 상징하지도, 자유한국당을 상징하지도 않는다. 등장하는 정당 간의 정치적 차이도 확인하기 힘들다. 또, 낙태를 금지해야한다며 신민아 배우에게 계란을 던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여성들로 구성되어있다.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위해 낙태 허용을 그 누구보다도 지지하는 단체가 여성으로 이루어진 여성단체들인 것이란 걸 고려할 때, <보좌관>은 정치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자가 연출을 했거나, 남성이 출산하고 대다수의 여성들이 낙태 금지를 주장하는 평행 우주 속 한국을 다뤘다고 볼 수 있다.

또, <상류사회>나 <보좌관>은 모든 면에서 전형적이다. <상류사회>는 한국 정치판은 다 썩은 놈들 뿐이 없다는 정치혐오자들의 메세지를 반복하고, <보좌관>도 크게 다르지 않다(사실 요즘 한국 영화나 드라마들이 대부분 정치혐오를 조장한다). 정치혐오자들의 전형적인 메세지는 자연스럽게 진부한 연출에까지 반영되는데, 두 작품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은 <하얀거탑>의 의사들이나 <부당거래>의 경찰, 검사들, <신세계>의 경찰, 조폭들과 딱히 다르지 않다. 작품 속 인물들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도-음모, 협박, 힘을 통한 해결 등으로 비슷하다. 

<보좌관>은 그저 한국식 흔한 연출에 ‘보좌관'이라는 껍데기를 입힌 작품일 뿐이다. 제목에 붙는 부제도 이런 점에서 대단히 무의미하고 전형적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니? 어떤 직업에나 다 갖다붙일 수 있는 말이잖나? 국회의원은? 기자는? 대통령은? 노동자는? 정규직은? 비정규직은? 플랫폼 노동자는? 완벽함은 뺄 것이 없는 상태다. <보좌관>이라는 제목만으로는 홍보에 자신이 없어서 뒤에 사족을 붙인 게 아닐까 망상을 펼쳐본다.

이런 맥락에서 <60일, 지정생존자>는 한국의 영화, 드라마판에 있어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일단, 감정 이입도 잘 되지 않는 가상의 정치판을 그려내지 않고 한국의 정치판을 있는 그대로 다룬다. 제목에서부터 이런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다. 원작 <Designated survivor>(이하 <지정생존자>)은 미국 정치를 다루는데, 미국에선 대통령 등이 사망하는 등 더이상 임기를 지낼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 시점부터 다음 계승 자격이 있는 자가 대통령이 되어 남은 임기를 지낸다. 한국에서는 법이 다르다. 대통령이 탄핵되거나 사망하면 그 시점부터 권한이 있는 자가 대통령직을 ‘대행'한다. 드라마의 제목이 <60일, 지정생존자>인 이유는 지정생존자가 대행을 맡은 직후부터 60일 내에 대통령 선거를 치뤄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대통령으로 선출된 자는 새로 5년의 임기를 가진 채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또, <60일, 지정생존자>는 한국의 진보와 보수를 상징하는 정당들을 만들었다. 극초반부터 진보정당의 의원들은 폭탄과 함께 사망해서 그들이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때 사망한 대통령이나 서울시장은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 등 민주당쪽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지방 분권에 관심이 많고, 소외된 계층의 교육권에도 힘 썼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보수정당 역시 자유한국당처럼 북한을 경계하고, 북한에 대한 지원 정책(햇볕정책)에 상당히 비판적이다. 미국이나 북한 역시 그럴듯하게 재현되어있다. 단순히 모든 정치인은 나쁘다며 모든 인물들을 악마화하지 않고, 왜 그들이 그런 입장을 가지게 됐는지 최소한 설명이라도 하려고 한다는 게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국내에 실재하는 탈북자 문제도 가감 없이 다뤘고, 탈북자를 청와대 대변인으로 내세우는 과감함도 보였다. 원작인 미드에서도 국회의사당이 폭파된 상황에서-무슬림이 테러리스트로 의심 받는 상황에서-인도계 인물을 백악관 대변인으로 세우기는 한다. 하지만 tvN은 한글 패치하는 과정에서 원작의 설정을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었다. SBS가 멀쩡히 존재하는 일본 <심야식당>의 동성애 캐릭터를 한글패치 과정에서 삭제했듯이 말이다.

<60일, 지정생존자>는 단순히 원작의 설정을 따오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 설정을 한국 정치 상황에 맞춰 훌륭히 재창조해내면서 온전한 하나의 작품이 됐다. tvN이 <안투라지>와 <크리미널 마인드>의 실패로 드디어 교훈을 얻은걸까? 미국에서 흥행한 두 작품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안투라지>와 <크리미널 마인드>는 이 글에서 일일이 풀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작품성을 보여줬다. 원작을 보기는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고, 원작의 설정을 한국에 어울리게 버무리는데도 실패했다.

<60일, 지정생존자>는 달랐다. 한국에 실재하는 정치 지형을 재현해낸 덕에 시청자들은 극에 더 몰입할 수 있었고 그 덕에 ‘선출되지 않은 자가 권력을 얻으면 국가는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도 더욱 그럴듯해졌다. 만약 <상류사회>나 <보좌관>에서처럼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정치 지형을 상정한 뒤 <지정생존자>의 설정을 입혔으면 이 정도의 몰입감은 가져다주지 못했을 거다.

 

한국의 정치 구조를 설득력있게 재현하려는 노력 때문인지 ‘쓸데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여성을 성적으로 묘사하는 장면도 찾기 힘들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 의원과 여성 보좌관들은 상사나 부하를 유혹하지도 않고, 몸에 달라붙는 불편한 정장을 입지도 않는다. 카메라 역시 여성들을 음란하게 훑으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보좌관>에서처럼 대놓고 연애 대상으로 취급되지도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러블리한 장면을 찍지도 않는다.

<60일, 지정생존자> 속 여성들은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본인들 임무를 수행한다. 남성들처럼, 아니,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평범한 직업인들처럼 권력욕도 충만하고, 일에 대한 소신과 자부심도 있고,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했을 때 실망도 한다. 최윤영 배우가 연기한 정수정 보좌관 캐릭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정수정 보좌관은 기대하던 비서실장 자리를 얻지 못했을 때 크게 실망했다. 이때 비서실장 자리를 얻은 동료 남성이 치맥을 하자며 들이대는데, 정수정은 단칼에 거절한다. 치맥을 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고 위로 받고 싶지도 않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만약 같은 장면이 <상류사회>나 <보좌관>을 연출한 자들에 의해 연출됐다면? 정수정은 치맥을 거절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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