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는 경쟁속에서 뒤죽박죽 일어난다

[박재용의 진화 이야기] 의인화 하지 않고 진화 설명하기

  • 기사입력 2019.09.23 07:21
  • 최종수정 2019.12.09 14:40
  • 기자명 박재용

흔히 진화과정을 이야기할 때 의인화하여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쓰기에도 편하고 읽기에도 좋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마치 개체가 진화를 의도적으로 하는 인상을 받기도 하고, 실제로 그렇게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가령 다음 글을 한 번 보죠.

봄이 되면 제주에는 유채가 한철입니다. 들판 여기 저기 온통 유채로 노랗게 물들지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채꽃 사이 빨갛고 희거나 보라색의 꽃들도 가끔씩 눈에 띱니다. 이런 꽃들에겐 고민이 있지요.

보라색 제비꽃이 벌이며 나비를 꼬시려고 꿀을 만듭니다. 벌이며 나비가 날아와서 열심히 꿀을 빱니다. 그 와중에 꽃가루가 몸통이며 날개에 묻지요. 식물의 목적이 그거니까요. 그런데 이 벌이며 나비가 꿀을 다 빨고선 다른 꽃으로 날아가는데 아뿔싸 주변이 온통 유채입니다. 당연히 드문드문한 다른 제비꽃으로 가기보단 유채꽃으로 가기가 더 쉽겠지요. 거기서도 꿀을 빨며 여기저기 꽃가루를 묻힙니다. 그 다음에라도 제비꽃으로 가면 좋으련만 또 날아간 곳은 유채꽃일 확률이 높지요. 그러니 제비꽃 입장에선 난감합니다. 열심히 꿀을 만들고 꽃가루를 묻히면 뭐합니까. 엄한 곳으로 가버리는 걸요.

그래서 이런 꽃들은 두 가지 전략을 세웁니다. 하나는 시기를 달리하는 것이지요. 유채가 피기 전에 잽싸게 먼저 피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나비나 벌이 한 제비꽃 다음에 또 다른 제비꽃으로 가는 확률이 높아지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제비꽃만 하는 게 아니어서 유채가 피기 전 시기에도 서로서로 경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또 그 경쟁을 피해서 조금 더 앞선 시기에 꽃을 피웁니다. 물론 개화시기를 더 늦추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몇 천 만년 지속되다보니 꽃을 피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한 겨울을 제외하곤 늦겨울에서 초겨울까지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온대 몬순기후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전략은 꽃가루를 해줄 곤충을 가리는 것입니다. 아무 벌이나 나비에게 꿀을 주지 않고 특정한 곤충하고만 거래를 하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꽃들은 형태와 색을 자기만의 고유함으로 꾸밉니다. 노란색, 빨간색, 흰색, 주황색, 보라색 등등 녹색만 아니면 다른 꽃과 구별되는 다양한 색으로 자신을 보이죠. 형태도 각양각색이 됩니다. 또 꿀이 있는 곳까지를 깊게 만들거나 독특한 구조로 만들어 특정한 종류만 통과하도록 꾸미기도 합니다. 여기에 맞춰 곤충들도 진화를 하지요. 이렇듯 식물끼리의 경쟁이 촉발시킨 진화는 결국 꽃에 곤충이 맞추고, 곤충에 꽃이 맞추면서 엄청난 다양성을 만들어냅니다. 현재 전 세계 동물 종 중 절반 이상이 곤충인 이유이고, 전 세계 식물 종 중 80%이상이 꽃이 피는 식물인 이유입니다.

자 이제 이 글을 제대로 다시 적어보겠습니다.

식물은 같은 종류끼리는 같은 시기에 피는 것이 유리하다. 그래야 수술머리의 꽃가루를 다른 개체의 암술머리에 묻힐 확률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같은 종의 다른 개체와 개화시기가 달라지면 번식에 불리하니 그런 개체는 번식률이 떨어지고, 수 세대가 지나면 종 전체에서 그 비율이 감소하여 사라진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가 있다. 제주의 유채를 예로 들면 유채가 일제히 개화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피는 것이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채와 같은 시기에 꽃을 피우는 다른 식물들의 경우 꽃가루받이 확률이 감소한다. 곤충 중 꿀벌이나 나비의 경우 특정한 꽃을 가려 꿀을 빠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꽃 중 꿀을 빨기 용이한 어떤 것이든 상관하지 않는데 이들이 주로 꽃가루받이를 대행한다. 이런 경우 제비꽃에서 꿀을 빤 나비나 벌이 다음 차례에 같은 제비꽃에 갈 확률이 대단히 많이 줄어든다. 즉 번식률이 감소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생물이든지 돌연변이는 항상 나타나고 이 중 개화시기에 대한 돌연변이도 항상 있다. 어떤 제비꽃이 돌연변이로 인해 유채가 피기 일주일 정도 먼저 개화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보통의 경우 이런 돌연변이는 불리하다. 다른 제비꽃이 개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침 비슷한 돌연변이로 인해 일주일 정도 먼저 개화한 다른 제비꽃이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도 보통의 경우 불리하다. 제비꽃 수 백 개체가 일주일 뒤에 동시에 개화를 하게 되면 꽃가루받이의 확률이 확연히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채가 집단 군락을 이루어 일제히 개화하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일주일 먼저 개화한 제비꽃의 번식률이 일주일 뒤 유채와 같이 개화한 경우보다 더 높아진다. 물론 이 경우도 그 차이는 몇 퍼센트가 되지 않겠지만 그 몇 퍼센트가 지속적으로 몇 세대를 이어지면 커다란 차이를 낳는다. 마치 복리 이자가 단 1%의 차이라도 수십 년이 지나면 커다란 차이를 낳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로 제비꽃 무리 중 유채꽃보다 일주일 먼저 개화하는 개체의 비율이 늘어나면 다시 번식률도 높아지게 되어 점차 제비꽃 전체의 개화시기가 변경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변이는 제비꽃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유채꽃과 비슷한 시기에 개화하는 다른 식물종에서도 이런 개화시기의 변이가 일어난다. 따라서 제비꽃은 이제 유채꽃은 피했지만 다른 식물종과 다시 경쟁에 들어간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의 변이가 일어난다. (변이는 항상 일어나며 이는 확률적으로 필연이다.) 더 일찍 개화하는 녀석들이 나타난다. 이는 불리한 변이다. 변이는 항상 확률적으로 아주 소수에게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일주일 먼저 개화한 제비꽃들은 다시 아주 소수이기에 번식률이 낮다. 또한 이른 봄에 개화한다는 것은 꽃이 필 때까지 축적된 영양분이 적다는 뜻이고 이는 꿀의 양을 줄이고, 씨앗과 열매가 제대로 성장하기 힘들게 한다. 이렇게 여러모로 불리한 변이이기 때문에 전체 종에서 이런 소수의 돌연변이는 대부분 몇 세대에 걸쳐 그 비율이 줄어들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경쟁이 격화되어 원래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의 번식률이 이들 변이를 일으킨 개체들보다 줄어들면 이제 종 전체에서 변이를 일으킨 개체들의 비율이 늘어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식물들의 개화 시기는 경쟁이 덜한 쪽으로 퍼져 마침내 늦겨울에서 초겨울에 이르는 광범위한 시기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식물의 변이는 단지 개화시기만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다양한 변이 중 일부는 식물의 꽃잎 색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또 어떤 변이는 잎의 형태를 바꾸기도 한다. 물론 한 번의 변이로 노란색 꽃이 붉은 색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색소의 발현 정도가 조금 차이가 나서 기존 색깔로 아주 약간 다른 색이 나오는 것이다. 여러분이 뒷산에 가서 봄철 피는 개나리나 철쭉을 자세히 보면 대부분의 개체들과 아주 약간 다른 채도나 명도를 가진 개체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딱 그 정도다. 이런 변이 또한 불리한 변이다. 곤충이 색을 기준으로 자신이 선호하는 꽃을 찾는다면 이런 변이에 의해 덜 찾아와질 수 있고 그것은 번식률을 낮추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유채와 같은 노란색 꽃이라면 이런 변이를 통해 기존의 노란색에 대한 선호도가 덜한 곤충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고 그 곤충은 비슷한 변이를 한 다른 꽃을 찾아갈 것이다. 이런 곤충 자체가 드물 것이니 보통의 경우라면 불리한 경우나 유채와의 경쟁에서 지고 있는 경우 이런 변이는 번식률을 떨어뜨리는 대신 향상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따라서 몇 세대를 거치면서 약간의 색 변화를 가진 돌연변이 개체의 비율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변이들이 번식률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지면 계속되는 변이들이 자손에게 이어질 것이고 마침내 꽃잎 색은 기존 개체와 완전히 다르게 된다.

출처: KOSKELLA LAB AT UC BERKELEY

앞서의 글에서는 진화가 마치 개체의 의도에 따라 진행되는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 일어나는 진화는 뒤의 글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어떠한 진화도 누군가의 의도나 미리 정해진 방향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로지 변이가 생기고 그 변이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할 때, 그 조건에 따라 자연스레 다른 개체보다 종 내 비율이 늘어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박재용    chlcns@hanmail.net  최근글보기
과학저술가. <경계 생명진화의 끝과 시작>, <짝짓기 생명진화의 은밀한 기원>, <경계 배제된 생명의 작은 승리>, <모든 진화가 공진화다>, <나의 첫 번째 과학공부>, <4차 산업혁명이 막막한 당신에게>, <과학이라는 헛소리> 등 과학과 사회와 관련된 다수의 책을 썼다. 현재 서울시립과학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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