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산업 디자이너는 누구인가

  • 기자명 김신
  • 기사승인 2019.09.05 09:3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디터 람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되었다. 영화에서 후카자와 나오토라는 일본의 디자이너가 독일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를 최초의 산업 디자이너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물론 역사적으로 최초의 디자이너를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영화의 메시지에 걸맞는 의미로 최초의 디자이너라고 했을 것이다. 그럼 정말 최초의 산업 디자이너는 누구인가?

디자이너는 공예가와 달리 대량생산을 전제로 그 제품의 재료와 형태, 색채 등을 디자인하고 결정하는 사람을 말한다. 대량생산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최초의 디자이너는 산업혁명과 함께 탄생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소규모의 대량생산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고대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국에 이미 틀에 넣어 찍어내는 동전이 존재했다. 사자가 새겨진 이 고대의 동전은 기원전 600여 년 전에 세상에 나온 것으로 추정한다. 이 동전은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동전 중 하나다. 그러니까 무려 기원전 600년 전에도 대량생산이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것을 디자인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 뒤로도 동전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누가 디자인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하찮은 일을 하는 기술자를 기록하지 않는다는 건 당시로서는 당연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동전으로 고대 리디아 왕국의 동전.

산업혁명 이전, 산업적인 규모로 대량생산이 최초로 이루어진 분야는 바로 인쇄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어떻게 활자를 대량생산할 생각을 했을까?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직장에 종종 나가서 그곳에서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가 일하는 곳은 바로 동전을 만드는 곳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구텐베르크는 대량생산이라는 첨단 기술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업적인 규모로 대량생산을 처음으로 이용한 요하네스 구벤테르크.

동전을 대량생산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장인은 펀치 장인이다. 그들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에 새겨지는 그림을 아주 딱딱한 강철 펀치에 새기는 기술자다. 펀치로 모형을 만들고 그 모형으로 동전을 대량으로 찍어낸다. 그러니까 펀치는 오늘날로 치면 설계 도면 같은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실질적인 생산이 불가능하다.

금속활자를 제작하기 위한 펀치와 모형. 오늘날의 산업으로 치면 펀치는 일종의 설계도이고, 모형은 금형이라고 할 수 있다.

구텐베르크는 바로 이런 펀치 장인을 고용해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그는 펀치 장인은 아니지만 그로 하여금 특정 글꼴을 디자인하도록 지시했다. 그가 선택한 글꼴은 중세의 책에서 가장 흔히 쓰였던 ‘고딕체’다. 그는 자기가 만든 책이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독자가 그렇게 착각을 하게 하려면 기존의 책과 그 디자인과 스타일이 똑같아야 한다. 책을 보는 사람들은 보수적이다. 뭔가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꼴은 당연히 새로운 기술에 어울리는 새로운 형식의 글꼴이 아니라 당시 독서가들에게 가장 익숙한 서체인 고딕체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디자인한 영문 최초의 활자체는 고딕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산업 디자이너는 구텐베르크일 지 모른다. 하지만 구텐베르크는 사업가이자 발명가에 가깝지 조형적인 감각을 지닌 디자이너는 아니다. 그는 촉수가 예민한 사업가로서 마치 스티브 잡스처럼 “글꼴은 고딕체여야 한다”는 걸 간파했을 뿐이다. 그 고딕체를 직접 디자인한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인쇄술의 요람기에 인쇄술과 책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출판인으로 베네치아 사람 알두스 마누티우스가 있다. 그는 구텐베르크처럼 사업가로서의 감각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인문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활자 디자인, 즉 글꼴의 중요성을 알았다. 그리하여 당대 가장 뛰어난 펀치 장인을 고용했다. 그의 이름은 프란체스코 그리포다. 프란체스코 그리포는 단순한 펀치 기술자만은 아니었다. 직접 글자를 디자인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알두스 마누티우스의 까다로운 요구 조건을 들어가며 글꼴을 디자인했는데, 그것을 오늘날 ‘벰보체’라고 부른다. 벰보체는 인쇄술의 요람기에 등장한 뛰어난 로만체로 평가 받는다. 

르네상스 시대 인쇄산업을 주도한 베네치아의 출판업자이자 인문학자인 알두스 마누티우스.

인쇄술의 요람기를 뜻하는 인쿠나불라(Incunabula)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1450년대부터 인쇄술이 유럽에서 확고하게 자리잡는 1500년 사이의 기간을 지칭하는 용어다. 이 인쿠나불라 시기에 이름을 남긴 여러 펀치 장인이자 글꼴 디자이너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미 언급한 프란체스코 그리포(Francesco Griffo)와 니콜라 장송(Nicolas Jenson)이다. 니콜라 장송은 그리포보다 조금 앞서 로만체를 디자인한 사람이다. 로만체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가장 일반적인 영문 알파벳 본문 서체다. 그렇다면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디자이너는 바로 이들 펀치 장인들일 것이다. 계속해서 클로드 가라몽, 윌리엄 캐슬론, 존 바스커빌, 지암바티스타 보도니 같은 뛰어난 펀치 장인이자 타이포그래퍼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서체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컴퓨터의 기본 서체로 장착되어 있다.

프란체스코 그리포는 벰보체를 디자인했다. 벰보체로 만든 <폴리필루스의 꿈>의 펼침면.
지암바티스타 보도니가 디자인한 활자의 펀치.

그 뒤 산업혁명 시기에는 오히려 디자이너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량생산을 주도한 영국의 공장 주인들은 돈을 아끼려고 정식으로 미술을 공부한 예술가나 공예가를 고용하지 않았다. 대개 엔지니어에게 맡겼고, 그들은 제품을 디자인할 때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공예품을 적당히 베꼈다. 그 바람에 19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생산된 상품의 디자인은 형편 없었다. 그런 싸구려 모조품 같은 대량생산품에 불만한 품은 일군의 비평가와 건축가, 공예가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예술비평가 존 러스킨와 공예가 윌리엄 모리스다. 윌리엄 모리스는 산업생산에 반대해 수공예로 돌아가자는 예술공예운동을 일으켰다.

최초의 디자이너라고 평가 받는 윌리엄 모리스.

오늘날 디자인 역사 책에서는 오히려 이런 윌리엄 모리스를 세계 최초의 산업 디자이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공장주들은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산품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 데 거의 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 결과 대중이 쓰는 생활용품은 오히려 추해졌다. 이에 반해 윌리엄 모리스는 귀족이 아니라 대중이 쓰는 바로 그런 하찮은 생활용품의 수준을 예술가들과 공예가들이 끌어올려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했다. 바로 이런 윌리엄 모리스의 생활예술 철학이야말로 20세기에 태어나는 본격적인 디자인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자양분을 제공했다고 보는 것이다.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제프리 초서의 작품집>.

실제로 윌리엄 모리스의 사상은 현대 디자인을 낳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독일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니 한번도 공장에서 대량생산을 주도한 적이 없는 윌리엄 모리스를 최초의 근대 디자이너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윌리엄 모리스가 기계 생산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몇 개의 글꼴을 디자인했고, 그 글꼴로 여러 권의 책을 인쇄 기술로 찍어냈다.

 

최초의 디자이너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인쇄술과 함께(16세기 인쇄술은 오늘날의 IT산업 이상의 당대 첨단 산업이었다) 그 단초가 시작되었고, 산업혁명 시기 윌리엄 모리스가 철학적 기초를 마련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윌리엄 모리스나 디터 람스, 또는 단체로서는 바우하우스 같은 기관을 최초의 산업 디자이너, 또는 최초의 산업 디자인을 탄생시킨 곳으로 말할까? 그것은 디자인을 단지 상품의 판매를 돕는 상업적인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상적인 디자인을 꿈꾸는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