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하는 '식민사관'이란 무엇인가

[이문영의 유사역사학 체크] 유사역사학이 주장하는 식민사관 주요 개념

  • 기사입력 2019.09.23 06:55
  • 최종수정 2020.07.29 12:13
  • 기자명 이문영

사관이란 무엇인가?

유사역사학에서는 우리나라 역사학계를 가리켜 식민사관을 따르는 식민사학이라 부르는 것을 즐겨한다. 그런데 정작 식민사관이 무엇이냐 물으면 별다른 답변이 없다. 이들은 대개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식민사관이다, 임나일본부가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식민사관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면 식민사관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말하면 식민사관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것은 유사역사학이 역사학이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가 된다. 이들은 ‘사관’이라는 것이 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 ‘사관’이란 무엇인가? 역사학자 차하순은 사관이라는 말은 다른 대부분의 근대용어와 마찬가지로 일본 학계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말한다. 독일 베른하임(1850~1942)의 저작들을 번역하면서 역사관(Geschichtsanschauung)이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유물사관(materialistische Geschichtsanschauung)이란 개념이 사용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관이란 말이 학술용어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사관이란 무엇인가>, 청람, 1980)

차하순은 사관이란 역사 인식, 또는 역사철학이나 역사 해석의 태도 등을 내포하는 신축성 있는 개념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막연히 ‘역사를 보는 눈’, ‘역사에 대한 식견’ 혹은 역사의식이라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즉 사관이란 역사를 해석하는 가치관의 문제인 것인데, 낙랑의 위치나 임나일본부의 실존, <삼국사기>와 <환단고기>의 사료 비판 문제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가지고 사관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유사역사학이라는 것이 역사학의 껍데기를 빌려다 위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식민사관의 정의

흔히 식민사관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 말은 식민주의사관의 줄임말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식민주의사관이란 “일본제국의 식민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생각해낸 왜곡된 한국사관”(이기백, 반도적 성격론 비판, 한국사시민강좌 제1집)이다. 사관이 역사를 보는 눈이라고 할 때, 식민사관이란 일제의 시각으로 역사를 보는 눈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이 된 지 74년이나 되었는데 역사학계가 일제의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말이다. 역사가들이 일제의 시각을 따를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이런 주장을 하려다 보니까 스승의 주장을 제자들이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말을 한다. 불가능한 이야기다. 역사학계에는 끊임없이 과거의 해석에 도전하는 새로운 주장들이 올라온다.

유사역사학에서는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한국사를 폄하한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그것을 식민사학이라 부르는데, 그에 따라서 고대국가의 영광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면 식민사학이 되고, 한국사에서 침략받은 이야기를 하면 식민사학이 되어버린다. 한국사는 일체의 과오가 없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 매몰되다보면, 결국은 한국의 역사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땅에서 전개되었다는 망상의 수준에까지 도달하고 만다.

반면에 역사학계는 현재 식민사관의 문제는 근대역사학의 문제이며 근대역사학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방법으로 식민사관을 넘어서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민족주의적 시각을 벗어나 근본적인 방식으로 역사인식 체계 전반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중이다. 문제는 유아적인 시각의 유사역사학적 부르짖음과 고차원적인 새로운 역사학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이 지금껏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역사학계는 너무 앞서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역사학자가 왜곡한 한국사”를 지칭하는 용어로써 “식민주의 역사학”이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식민지사관(학), 식민주의사관(학)이라는 말도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용어의 정의는 인문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매우 지루하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혼란스러운 것들이기도 하다.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의 문제라는 의미에서 본 글에서는 식민사관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에 맞춰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이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사용한 관점, 즉 식민사관이 무엇인지 알아보는데부터 시작한다.

 

식민사관 정의의 발전

1961년 역사학자 이기백은 <국사신론> 서문에서 처음으로 탈식민주의 선언을 내놓았다. 이기백은 여기서 식민사관의 다섯가지 유형을 말했다. 반도적 성격론(지리적 결정론), 사대주의론, 당파성론, 문화 독창성 결여론, 정체성론이다.

이후 역사학자 김용섭, 이만열, 조동걸 등에 의해 식민사관의 요소가 좀더 구체화되어갔다. 이기백의 유형에 타율성론, 만선사관, 일선동조론, 임나일본부설 등이 추가되었다. 이것들을 더 큰 카테고리로 분류하기도 했다.

식민사관은 일사불란한 하나의 체계가 아니다. 일본 역시 이 시기에 근대역사학을 막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그것을 배워나가기에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역사학이 제국의 이익에 봉사하고 식민지배에 유용하게끔 사용되어야 하는 때였다. 그런데 손에 익숙하지 않은 도구에 낯선 남의 나라 역사를 다뤄야 했으므로 일사불란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일본 역사가들 입장에서 <국사>는 일본사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일본사’ 안에서 ‘조선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일본사 안에 조선사를 넣으려했고, 누군가는 중국과의 관련 하에서 조선사를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식민사관 중 일선동조론은 일본 국학의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외무성, 육군, 도쿄제대 국사학출신들이 주도했다. 반면 만선사관은 시라토리 구라키치로 대표되는 동양사학 쪽에서 주도했다. 식민사관 중 타율성론은 조선이 독립국가가 될 수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 생겨난 것으로 사대주의론, 국민성론, 지리적 결정론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한마디로 조선인은 홀로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본제국의 지도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본 글에서는 일선동조론, 타율성론과 만선사관, 정체성론, 당파성론, 사대주의론에 대해서 사펴보고 오늘날 역사학계에 이와 같은 주장들이 살아남아 있는지도 알아보기로 한다.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①일선동조론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는 것이 바로 일선동조론이다. 그들은 일본이 본가이고 한국이 분가이므로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을 내놓았던 것이다.

일선동조로는 1974년 역사학자 이만열에 의해서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이때만 해도 식민사관 중 하나로 여겨지지 않았다. 1979년 이만열은 일선동조론을 식민사관의 하나로 주장했고 이후 역사학계는 그 견해를 받아들였다.

일선동조론은 원래 일본이 제국의 야망을 드러내기 전부터 일본 안에서 제기되던 가설이었다. 이때 일본과 조선이 원래 혈연과 문화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조선이 일본에 흡수되어야 한다는 “당위”는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가 가치판단이 없는 것이지만 후자는 해석에 속하는 것이다.

일제가 만들고자 하다 실패했던 <조선반도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편찬 원칙은 식민사관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1.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족인 사실을 밝힐 것.

2. 상고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군웅의 흥망기복과 역대의 역성혁명으로 인해 민중이 점차 피폐해지고 빈약에 빠진 실황을 서술하여 금대에 이르러 성세의 혜택으로 비로소 인간의 행복을 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세히 서술할 것.

 

한국사 편찬의 제1원칙이 일선동조론이었다. 제2원칙은 정체성론이다.

일본의 일선동조론은 내선일체라는 구호로 표현되었다. 둘은 동족이므로 일본은 조선을 침략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다고 조선인을 일본인처럼 대우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일본 안에서도 좋아하는 주장이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이등신민으로 남아야 하는데 내선일체라고 하면 같은 권리를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식민사가들마다 입장도 달랐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일선동조론에 반대했다. 그는 순수한 일본인의 피에 조선인의 피가 섞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조선사로 박사 학위를 최초로 받은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도 일선동조론을 부정했다.

이런 태도는 조선총독부에도 존재했다. 조선총독부는 교과서 안에서 일본과 조선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조선반도사> 편찬요지에서는 “강역이 서로 인접해 있고 인종이 서로 같으며...”라고 써서 동족의 개념을 같은 인종이라는 것으로 바꿔놓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일선동조론을 적당한 수준에서 이용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②타율성론과 만선사관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도리야마 기치(鳥山喜一)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대국에서 본 조선반도>(1935)에서 한반도는 중국, 만주, 일본의 영향을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교토대의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는 <조선사개설>(1940)에서 ‘조선사의 타율성’이라는 항목 아래 이렇게 기술했다.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에 가까이 부착된 이 반도는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반드시 대륙에서 일어난 변동의 여파를 받음과 동시에, 또 주변 위치 때문에 항상 그 본류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여기에 조선사의 두드러진 특징인 부수성이 말미암는 바가 이해될 것이다.

 

역사학자 이기백은 이런 사고를 ‘지리적 결정론’이라고 불렀다. 일제의 식민사가들은 한반도에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역사는 그 주변의 세력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필연적으로 만주와 조선의 역사는 하나라는 만선사관과 연결이 된다.

만선사관은 시라토리 구라기치(白鳥庫吉)와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로 대표된다. 이들은 고구려가 강국이 된 이유는 요동과 압록강 하류 지방을 지배했다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일본도 요동반도를 확고하게 지켜야 한반도를 경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일제 식민사가들의 주장을 반박한 사람이 중국의 푸스녠(傅斯年)인데 그는 만주 지방이 원래 중국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유사역사가는 푸스녠의 주장을 좋아하는데 그가 무슨 주장을 한 것인지도 이해를 못하는 코미디를 보이고 있다. 일본 주장을 반박했다고 해서 우리나라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중화적 입장에서 자기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푸스녠의 주장을 오히려 일본의 야노진이치(矢野仁一)가 만주 지방에는 부여, 고구려 등이 있어서 중국 땅이 아니었다고 반박을 하고 나서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만선사관에서 고구려가 야만적인 말갈족을 개화시켜 발해가 만들어진 것처럼 일본은 만주국을 개화시켜 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만선사관 안에 들어있었다. (박찬흥, <만선사에서의 고대 만주 역사에 대한 인식>, 한국고대사연구 76집)

만선사 안에서 조선과 만주는 동등한 형태가 아니라 만주가 중심이고 조선은 종속된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은 주체적일 수 없는 위치에 놓여있는 타율적 존재로 자신만의 역사를 간직하지 못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타율적 존재로서 한반도 남부는 임나일본부에 의해서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 주장의 근거는 <일본서기>에 따른 것이며 <일본서기>는 위조된 내용이 많아서 인용에 극히 주의를 해야 하는 사서라는데 한일 역사가들의 견해가 일치해 있다. 임나일본부를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믿는 역사학자는 한 명도 없으나 유사역사학에서는 역사학계가 임나일본부를 그대로 믿고 있다는 거짓 선동을 하고 있다.

유사역사학에서는 만주를 차지해야 한다고 고토 회복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일제가 내놓은 지리적 결정론에 사로잡힌 때문이다. 만주를 차지해야 민족사의 영광이 되돌아온다고 생각해서 자꾸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③정체성론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는 <한국의 경제 조직과 경제 단위>(1904)에서 조선의 사회 경제 상태는 일본의 10세기 때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즉 일본보다 천 년을 뒤진 상태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낙후한 조선을 근대화 시킬 책무가 일본에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이 정체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후쿠다는 조선이 정체되어 있는 이유가 봉건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서양과 일본의 봉건제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조선에 적용하려고 한 것이다.

경성제국대학의 시카타 히로시(四方博) 교수는 <조선에 있어서의 근대자본주의의 성립과정>(1933)에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력으로 이루어진 타율적인 것이며 그것은 물론 조선이 낙후 정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조선은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 사람의 특징은 파벌을 짓는 파벌성에 있다는 말도 했다.

일제의 식민사관에서는 조선의 후진적인 측면만을 찾아내고 강조하여 조선이라는 사회를 죽은 것처럼 정체되어 있는 사회로 묘사했다.

오늘날 유사역사학에서는 조선을 극히 혐오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것은 일제가 뿌려놓은 식민사관의 영향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오항녕 교수의 <조선의 힘> 같은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④당파성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조선을 당쟁 때문에 망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일제 식민사관이 뿌려놓은 해독이다. 또한 유사역사학의 조선 폄하에서도 흔히 이용해먹는 레퍼토리에 속한다.

1900년에 학정참여관으로 한국에 온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는 <한국정쟁지>(1907)라는 책을 낸다. 그는 조선의 정파는 주의주장을 가지고 대립하는 공당이 아니어서 이해를 가지고 서로를 배척하며 사적으로 다툰다고 이야기했다. 그 대립이 바로 당쟁이라고 말한 것이다.

조선의 붕당은 선조 때 발생해서 세도정치 때 그 힘을 잃어버리는 것인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조선 전반에 걸친 문제로 확대하고 심지어는 조선사람의 피에는 특이한 검푸른 피가 있어서 정쟁이 여러 대에 걸쳐 지속된 것으로 결코 고칠 수 없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왔다.

이 식민사관은 조선의 멸망이라는 책임 문제와 함께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도 설득력이 있었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1922)에서 이런 관점을 수용했고, 심지어는 일본인들보다 한 술 더 떠서 당쟁의 기원을 고려초로 잡는 사람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식의 전파 때문에 해방 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합이 안 된다는 비하적 발언을 쉽게 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이 말기에 와서 국가를 유지하는 각종 시스템이 망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붕당 때문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한 가문이 전유하는 세도정치 때문이었다.

원인과 결과를 뒤섞고 그것을 민족성으로 환원해서 원래 못난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식민사관이 원하는 것이었다.

 

⑤사대주의론

일선동조론에 따라 한국인은 일본인과 같은 종족이었다. 그런데 왜 근대에 와서 이렇게 달라졌을까? 이것을 설명하는 이론 중 하나가 사대주의론이다. 일본과의 친화성은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완전히 박탈되는데 그것은 중국을 사대하면서 고유성, 즉 일본적인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대라는 것은 사대교린정책으로 주변 나라들과 평화를 유지하는 외교 정책을 의미한다. 조선은 건국 이후 중국을 지배하던 명나라와 전쟁 없이 지냈다. 이것은 조선의 사대 외교의 성공이다. 사대를 요구했던 청을 거부하자 전쟁이 일어났다. 교린의 정책에 따라 일본과도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상정할 수 없는 변수가 등장한 뒤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런 외교 정책에 “주의”를 붙여서 강한 쪽에 빌붙는다는 부정적 요소를 덮어씌운 것이 사대주의라는 용어다. 불행히도 오늘날까지도 상당히 자주 등장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식민잔재 청산은 바로 이런 용어를 버리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유사역사학에서 말하는 식민사관

유사역사학에서는 우리나라 주류 역사학계가 식민사관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증거를 제출하라고 하면 바로 말이 바뀐다.

주류 역사학계는 명시적으로 식민사관을 표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역사학계는 늘 식민사학 극복을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역사학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거짓말이라는 증거는 어디 있는가? 그러면 개별적 사안들을 들고와서 그것이 자기들 주장과 맞지 않으므로 식민사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단군신화라는 말을 하면 단군을 부정한다고 과대해석해서 선전선동한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사료비판을 하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한다고 선전선동한다. <환단고기> 사료비판을 하면 민족의 지보를 폄하한다고 선전선동한다. 임나일본부가 나오는 <일본서기>를 분석하면 <일본서기>를 인정한다고 선전선동한다. 낙랑군의 위치를 고증하면 민족주체성을 훼손한다고 선전선동한다.

낙랑군이 어디에 위치했다는 것은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유사역사학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말하면 식민사학이라고 매도한다. 심지어 정말 그렇다면 덮어버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는 실정이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한국사가 식민지로부터 출발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에 식민사학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 주장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낙랑군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나라가 설립한 군의 이름이다. 즉 낙랑군 이전에 “나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사가 그들이 말하는 “식민지”에서 출발하게 된다는 걸까? 이쯤되면 고조선을 지우려는 사람들이 누군지 명백해진다. 한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에서 시작하지 낙랑군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유사역사학자들과 토론을 통해서 자세히 사료비판의 결과를 들려주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요”라고 일축하고 지엽말단적인 이야기만 한다고 폄하한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면 주류학계는 토론에 응하지 않는다고 선전선동한다. 박근혜 정부 시절 여러 차례 토론이 벌어졌었다.

유사역사학에서는 일선동조론도 따라한다. 그들은 일본의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갈라져나갔으므로 한국과 일본은 같은 민족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한다. 이런 주장의 결과가 한일합방을 옹호하게 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고 펄쩍 뛴다. 그들의 주장은 한국이 본가이고 일본은 분가이기 때문에 한국이 일본을 합병할 수는 있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국이 동족의 국가라는 건 기정사실이고 다만 누가 본가인가를 놓고 다투는 형국이다. 이런 주장은 결국 양국의 병합을 “우리의 소원은 통일” 급으로 격상시키게 된다.

역사학자 박찬흥은 일본 식민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를 분석한 바 있다. (박찬흥, 이케우치 히로시의 한국 고대사 시기구분과 고조선·한사군 연구, <제국 일본의 역사학과 ‘조선’>, 2018)

만선사관을 지녔던 이케우치는 단군을 부정하고 기자와 위만만 인정한다. 그래서 고조선은 철저히 중국 한족이 건설한 국가라고 말한다. 지배층만 한족이라는 것이 아니라 백성까지 모두 한족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 어느 한국인 역사학자가 고조선을 이런 식으로 보는지 말할 수 있는가? 이케우치는 낙랑군은 평안남북도, 황해도, 경기도의 4개 도였으며 진번군은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어느 한국인 역사학자가 이렇게 이야기하는가?

일제강점기 때 학교에서는 단군을 가르치지 않고 “중국에서 온 기자”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단군부터 이야기하며 기자는 아예 빼버린 상태다. 유사역사학에서는 걸핏하면 역사학계가 조선총독부 사관을 따라한다고 말하지만 벌써 여기서부터 아무런 접점이 없는 상태다.

다시 말하지만 사관이란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을 의미한다. 해석은 기본 사실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사역사학은 기본 사실을 왜곡한다. 자신들의 왜곡에 따르지 않으면 식민사관이라고 비난한다.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우리나라에 불리한 사실이라면 덮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민사관을 넘어서

일본의 식민사학이라는 것은 일본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근대역사학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일본의 역사학은 독일 역사가 랑케의 영향 아래서 성립했고, 우리나라의 실증사학이라는 것도 그 영향 아래 성립했다. 이 역사의 방법론이 과연 사관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가? 역사학자 정준영은 바로 사이비역사학(유사역사학)이 바로 이 점을 파고들어서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다고 분석한다. (정준영, 이마니시 류의 조선사, 혹은 식민지 고대사에서 종속성 발견하기, <제국 일본의 역사학과 ‘조선’>, 2018)

결국 식민사학은 그것을 운영하는 수단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라는 사관의 문제인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가들은 근대역사학의 방법론을 한국사에 먼저 적용시켜나갔다. 고전적인 비유를 들어서 말하자면 이렇다. 같은 물을 마시고 소는 우유를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 우리는 근대학문을 일제강점기에 습득했다. 그런데 식민철학도 없고 식민수학도 없는데 식민사학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에 식민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식민사관이란 식민지 치하에 있어야 성립한다. 유사역사학의 선전선동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해방된지 74년이나 되었다.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모는 프레임은 1960년대 등장해서 50여년이나 써먹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역사학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동네라 해도 이젠 좀 새로운 걸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이문영     최근글보기
작가이자 편집자, 게임기획자 등 다양한 직종을 거쳤으며 90년대부터 유사역사학에 대한 탐구를 '초록불의 잡학다식' 블로그를 통해서 발표해왔다. <유사역사학 비판>라는 유사역사학 연구서를 내놓고 한국고대사학회 주최 시민강좌, 계간 역사비평 등을 통해 유사역사학 비판을 계속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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