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격화된 '현실의 미추'를 '관념의 미추'로 전복하다

[홍상현의 인터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EFFFF 아시아영화상 수상작 <만리키> 시미즈 야스히코 감독

  • 기사입력 2019.09.18 07:38
  • 최종수정 2019.09.19 04:57
  • 기자명 홍상현
“See you now, Your bait of falsehood take this carp of truth”
― Act 2, Scene 1 of William Shakespeare's “Hamlet”

“‘진리’라는 잉어를 낚아 올리는 허구의 미끼”.

현대 영어로 그 뜻을 풀어 써보면 대략 “Make sure your little lie brings out the truth.” 정도로 풀이되는 『햄릿』의 대사를 ‘판타지’를 설명하는데 가져다 쓴 이는 프로이트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소망들이 성취되는 장소이자 양식(예술). 판타지가 허구인 것은 그 안에서의 사건이 객관적 사실과 무관해서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내, 판타지가 현실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장애물이 아니라 진리를 성립시키는 구조적 조건임을 깨닫는다. 결국 판타지를 구성하는 것도 ‘어느 날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실재(real)의 파편에 다름 아니라는 것. 고대 그리스의 판타시아(phantasia)에서 유래, 영국의 페어리 테일, 독일의 메르헨 등을 아우르며 뿌리를 뻗어가던 판타지는 19세기 말 상징주의라는 자양분을 받아들이다 1960년대 이후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만개기(full bloom stage)에 접어든다. 사회의 지배적 질서와 권위에 거스르는 일면이 68혁명의 시대상과도 맞아 떨어짐으로써 젊은 독자층의 폭발적 지지를 얻은 까닭이다.

이런 문화사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어서인가, 매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에 초청되는 유러피언 시네마는 어떤 작품 하나를 고르기 어려울 정도의 수작으로 채워진다. (물론 프로그래머인 김영덕의 역할이 가장 크겠지만) 브뤼셀판타스틱영화제(벨기에)와 시체스영화제(스페인) 등의 주도로 결성된 지 올해로 33년째를 맞는 유럽판타스틱영화제연맹(EFFFF)도 전 세계 관객들에게 압도적인 무게감을 지닌다. BIFAN은 아시아의 장르 영화제로서는 유일하게 이 연합체에 소속되어 있기에 아시안 시네마의 초청작 중 한 편을 골라 EFFFF 아시아영화상을 수여한다. BIFAN이 아시아의 신진 영화인들에게 ‘꿈의 제전’으로 손꼽히는 큰 이유 중 하나다.

올해 수상작인 <만리키>가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 하나 있다. 지난 8월 29일(현지시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은 판타지 영화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개그맨인 각본가가 자신의 희극적 재능을 발휘해 시나리오를 쓰고, 광고와 뮤직비디오로 실력을 다져온 감독의 조형감각이 빛나는 <만리키>는 아방가르드 작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적인 이미지에 기괴한 유머가 뒤섞는 알모도바르의 작풍(idiom)과 궤를 같이 한다. 스토리도 관객의 흥미를 자극한다.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모델지망생이 성형외과를 찾는다. 하지만 의사는 엽기적인 취향을 가진 사이코패스였다. 영화는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규격화된 미의 기준을 공작기계인 바이스로 풍자하며 되묻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장편영화로는 신인이지만 그간 광고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탄탄한 실력을 다져온 시미즈 야스히코 감독은 <올드보이>와 <괴물>을 ‘베스트 한국영화’로 꼽는다. 아내와 함께 한국 드라마를 보는 일이 삶의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고. 사진 제공: ⓒ2019 MANRIKI Film Partners

 

 

홍상현:

첫 장편영화가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수상까지 하며 화려한 데뷔전을 치렀다.

시미즈 야스히코:

우선 가족에게 감사한다. 제작에 관여한 스태프, 작품을 봐 주신 관객, 그리고 BIFAN 관계자 및 심사위원 여러분께도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설마 제가 만든 영화를 제가 발 딛고 선 공간을 벗어난 세계의 많은 분들께서 봐주시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홍상현:

BIFAN에 오신 건 처음이지만, 한국영화를 무척 좋아하신다고 들었다.

시미즈 야스히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와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좋아한다. 아내와 함께 한국 드라마를 보는 일은 제 삶의 큰 즐거움이다. 재벌가를 배경으로 한 비극, 멜로드라마, 사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배어나오는 특유의 분위기가 좋다.

 

홍상현:

장편영화의 감독으로서는 신인이지만 단편으로는 이미 상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밖에 업계에서 충분히 인정받는 영상디렉터였는데 굳이 영화감독 데뷔를 할 필요가 있었나?

시미즈 야스히코:

다양한 분야의 영상연출이 제 주업이니 당연히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순간순간 제가 발 딛고 선 사회의 분위기와 엇갈리는 생각이 밀려든다. 이러한 사고를 좀 더 강하게 표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달할 기회를 모색한 끝에 다다른 종착점이 영화다.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모델지망생(코이케 쥬리안)이 성형외과를 찾는다. 하지만 의사는 엽기적인 취향을 가진 사이코패스였다. 영화는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규격화된 미의 기준을 공작기계인 바이스로 풍자하며 되묻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사진 제공: ⓒ2019 MANRIKI Film Partners

 

홍상현:

그간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해 와서인가, <만리키>에서도 기발한 연출이 돋보였다. 평소 어디서 시각적 영감(visual inspiration)을 얻는지 궁금하다.

시미즈 야스히코:

어린 시절부터 특히 좋아하는 만화나 개그, 음악, 그리고 인터넷 문화에서 많은 자극을 얻는다. 패션도 좋아하고. 오히려 영화 이외의 장르에 많은 재능을 가진 이들이 모여드는 분위기가 제게 자양분이 된다. <만리키>도 개그맨인 나가노, 뮤지션인 가네코 노부아키, 그밖에 촬영ㆍ의상ㆍ헤어ㆍ메이크 등, 다양한 분야의 탤런트(talent)가 융합해 태어난 결과물이다.

 

홍상현:

방금 언급하신 내용은 제가 <만리키>라는 영화에서 특히 매력을 느끼는 지점이기도 하다. 각본을 쓴 개그맨 나가노, 화제의 신작 <신 울트라맨>에 캐스팅되는가 하면 올 가을 방영될 TV드라마 기대작 <최상의 명의>의 주연을 맡은 톱스타이자 뛰어난 감독, 사이토 타쿠미 등이 함께하는 크리에이터 그룹, ‘팀 만리키(Team MANRIKI)’가 제작이 주축이었다.

시미즈 야스히코:

전부터 다들 사이가 좋았지만 <만리키>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기분으로 의기투합했다. 저 자신은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겠지만, 시나리오 작가인 나가노는 희극의 귀재, 사이토는 새로운 세대를 주도하는 영화인, 음악감독을 맡은 가네코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멤버들이 나가노의 콩트를 원작으로 하는 단편 <손에서 빛을 내는 생선장수>를 찍다가 ‘야, 이거 괜찮겠는데?’ 하며 의견을 모았다.

 

홍상현:

작품의 타이틀인 <만리키>는 공작기계인 바이스를 의미하고, 실제로 영화 속에서도 성형외과 의사로 분한 사이토 타쿠미가 시술에 사용한다. 확실히 메스보다 강렬한 느낌이다.

시미즈 야스히코:

작품의 착상단계에서 “바이스로 얼굴을 교정한다고 설정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 건 시나리오작가인 나가노다. 성공적인 아이디어였다. 덕분에 중량감을 주는 모티브인 바이스를 등장시켜 현대인의 미의식을 다른 각도로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만리키>의 주연배우 사이토 타쿠미는 2017년 당시 초청작인 <13년의 공백>의 감독으로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았다. 그를 기억하는 한국 관객에게 <만리키>는 “시미즈 야스히코의 영화”인 동시에 “사이토 타쿠미의 영화”이기도 하다. 사진 제공: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홍상현:

동의한다. 테마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1부에서는 얼굴 크기에 콤플렉스를 가진 모델지망생(코이케 쥬리안)을 중심으로 외모지상주의를 풍자하다가 2부로 넘어가면서 주제가 확장된다.

시미즈 야스히코:

단순한 비판을 넘어, 포괄성 띨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 아닐까 한다. 확인해드리면, <만리키>의 테마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이미 아름답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겠는데, 일반적으로 ‘미추(beauty and ugliness)’란 외모를 가리키지만, 우리는 좀 더 본질적인 부분을 파고들고 싶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정신의 미추, 명암, 선악, 그리고 시비라는 양극단의 가치관 사이에서 사물 본연의 자세는 늘 흔들린다. 여기서 어느 쪽으로 기울기보다, 오히려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진정한 아름다움 아닐까,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이미 아름답다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 것이다. 말로 풀자니 너무 재미없지만. (웃음)

물론 말씀하신 대로 ‘풍자’의 측면도 강하다. 그렇지만 또한 우리는 이 작품을 모든 인간의 개성을 인정하는 인간찬가(人間讚歌)로 만들고 싶었다. 이를테면 ‘다들, 있는 그대로도 괜찮아, 변해도 괜찮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아?’ 정도의 메시지를 담은.

 

홍상현:

단편영화 시절부터 지금까지 장르상 코미디로 분류되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판타지를 더한 희극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나.

시미즈 야스히코:

개그맨인 나가노와의 협업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웃음’이라는 감정은 ‘아름다움’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게 제 생각이기도 하다. <만리키>를 연출하면서 이점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홍상현: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일본영화의 제작스태프에는 ‘비주얼 슈퍼바이저(Visual Supervisor)’라는 포지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리키>의 경우, 일상의 공간과 비일상의 공간이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되고, 특히 관념의 세계를 표현할 때의 조형미가 대단히 뛰어나다.

시미즈 야스히코:

시나리오 작가와‘ 어떤 연출이 되던 이 장면이 재미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테마나 시나리오를 채워가자’는 대전제를 세우고, 본질적인 부분이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또한, 스태프와 이 내용을 철저히 공유했고. 그랬더니 오히려 현장에서는 다함께 즐겁게 어울려 노는 느낌이 들더라.

 

<만리키>는 인기 개그맨인 나가노(왼쪽)가 시나리오를 쓰고, 현역 뮤지션인 가네코 노부아키(오른쪽)가 음악감독을 맡았다. 두 사람은 영화의 스토리텔러로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사진 제공: ⓒ2019 MANRIKI Film Partners

 

홍상현:

앞의 질문과 연관된 이야기인데, 필자 개인적으로 영화 곳곳에서 보이는 강렬한 퍼플 컬러가 인상적이었다.

시미즈 야스히코:

팀에서 일단 테마 컬러를 정하기로 결정한 뒤 고른 것인데, 미추의 언밸런스를 상징한다.

 

홍상현:

<만리키>의 시나리오를 쓴 나가노는, 작품에 직접 등장해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시미즈 야스히코:

역할을 한정하지 않고, 제작에 관여한 이들 모두 스스로 원하는 방향에서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자는 게 팀의 목표였다. 다른 작품과 차별화된 우리 나름의 느낌을 추구하기도 했고. 그래서 모든 스태프가 한 가지 분야에 얽매지 않고 의욕적으로 다양한 일에 힘을 모았다. 시나리오를 담당한 나가노와 음악감독인 가네코는 영화의 스토리텔러(storyteller)로 등장한다. 감독으로서 어떤 설정에 설명이 필요할 때, 누군가 나서서 이야기를 해 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영화 곳곳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홍상현:

<만리키>는 시미즈 야스히코의 영화, 나가노의 영화인 동시에 사이토 타쿠미의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사이토는 단순히 주연배우 이상의 역할을 했다.

시미즈 야스히코:

개인적으로 ‘영화는 프로듀서의 것’이라는 인식이 있는 까닭에 ‘사이토 타쿠미의 영화’라고 말씀해주시니 울림도 있을뿐더러, 무척 영광이다. 이 작품이 첫 장편영화였던 저와 나가노는 사이토가 아니었다면 아마 작품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했거나, 했더라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을 거다. 그러니 사이토는 우리에게 영화를 가르쳐준 은사였다고 할 수 있다. 생물학적 연령은 동갑이지만. (웃음) 그의 재능이 장차 영화계를 보다 풍요롭게 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줄 것이라 믿는다.

 

2부 주인공인 칸노 미스즈는 영화의 주제를 시각적 미추에서 관념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킨다. 1992년 연극 <그랜 벤치>를 통해 데뷔한 그는 <만리키>의 그 어떤 캐스트보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데뷔작을 연출하느라 긴장해있던 시미즈 야스히코 감독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사진 제공: ⓒ2019 MANRIKI Film Partners

 

홍상현:

<만리키> 주연배우로서의 사이토는 어땠나?

시미즈 야스히코:

그는 미의 상징으로 등장해 추의 상징으로 끝을 맞는다. 허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외견적인 미에서 관념적인 미로 변화한다고 할 수도 있다. 표현하기 어려운 캐릭터를 프로듀서이기도 한 그가 책임지고 맡아 열연을 보여주었다. 이전에 그가 보여준 어떤 역할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대본과 즉흥연기를 절묘하게 뒤섞는 영감도, 테크닉도 훌륭했다.

 

홍상현:

오늘 인터뷰 내내 스태프의 재능을 강조하셨다. 하지만 서로 강한 개성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작품의 경우, 서로간의 조화가 깨져 오히려 평균 이하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만리키>는 그렇지 않았지만. 역시나 감독이 훌륭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 아닐까.

시미즈 야스히코:

대단히 감사합니다. (웃음) 캐스트, 스태프 할 것 없이 죄다 개성이 강하다 보니 힘든 면도 있었지만, 무척 즐겁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중재자 역할을 나름 충실히 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중요한 내용을 제작진 모두가 확실히 공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별한 방법이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저 서로간의 대화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나가노, 사이토와는 도합 2년에 걸쳐 우리 나름의 방침ㆍ내용 등을 정리했다. 워낙 기발한 사람들인지라. (웃음) 그들의 아이디어를 실현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영상화하기 힘든 아이디어도 많았다. 자신의 아이디어로 어떻게든 보충해 영상화가 가능한 것들만을 골라 간신히 완성한 영화다.

 

홍상현:

코이케 쥬리안과 칸노 미스즈는 각각 <만리키>의 전반과 후반을 맡아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다만, 스토리가 좀 극단적이라 연기의 난이도 또한 높았을 텐데.

시미즈 야스히코:

두 사람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코이케가 맡은 1부의 주인공은 관객을 영화의 주제로 이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중반에서 극적인 외모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까닭에,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는 배우가 연기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코이케는 연기와 극작, 연출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는 무대예술가다. 각본에 대한 이해와 표현이 모두 훌륭하고, 저와 마찬가지로 <만리키>가 첫 장편영화였던 까닭에 긴장감조차도 보조를 맞출 수 있어 좋았다.

칸노가 맡은 2부 주인공은 주제를 시각적 미추에서 관념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킨다. 흔히 생각하는 사회성(Sozialität)에서 일탈한 측면을 갖는 캐릭터(중년의 성매매 여성)라 능숙하고도 노블(noble)한 연기를 필요로 했는데 정말 잘해냈다. 아울러 다른 어떤 캐스트보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데뷔작을 연출하느라 긴장해있던 제게 안정감을 주었다. 물론 그 ‘여유’를 지나치게 의식한 제가 매 출연 장면마다 연출을 전환해 애를 먹기도 했겠지만. (웃음) 예컨대 리허설을 마치고 본 촬영에 들어가기 10분 전에 제가 갑자기 연출 방향을 바꾼 적이 있었는데, 그조차도 즐길 줄 아는 멋진 배우였다. 진심으로 감복했다.

 

홍상현:

다음 작품 계획은 있나?

시미즈 야스히코:

나가노와 <만리키>의 속편을 구상중이다. “보신 분들 모두를 실망시키거나, 1편이 나았다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만리키>가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 하나 있다. 바로 스페인의 판타지 영화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개그맨인 각본가가 쓴 시나리오에, 광고와 뮤직비디오로 실력을 다져온 감독의 조형감각이 빛나는 <만리키>는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적인 이미지에 기괴한 유머를 뒤섞는 알모도바르의 작풍과 궤를 같이 한다. 사진 제공: ⓒ2019 MANRIKI Film Partners

 

“이번 BIFAN 초청은 제게 너무나 좋은 기회였습니다. 한국 관객 분들의 영화 리터러시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영화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보면서 무척 놀랐어요. 영화인으로서의 인생을 막 시작한 제 입장에서 명확하게 ‘영화하길 정말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일본에서는 드문 일이죠.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투영하게 만들어주는, 혹은 세상과 감각을 공유하도록 해주는 존재잖아요. 개인과 대중 어느 쪽을 향하든,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지니는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만리키>는 특히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긴장감을 유감없이 표현하는데 역점을 둔 작품입니다. 언젠가 좀 더 많은 한국 관객 여러분께 영화를 보여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말처럼 한국의 관객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어서일까. 올 11월 29일 신주쿠 시너마트에서의 개봉을 앞두고 공개된 <만리키>의 홈페이지에는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EFFFF Asian Award 수상”이라고 크게 적혀있었다. 오픈 시기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국면이 극단으로 치닫던 얼마 전이었다. BIFAN의 스태프로서 뿌듯한 한편, 걱정스러운 마음. 상의 공신력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의 영화제에서의 수상을 자랑스레 내거는 일 자체에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신인 감독의 작품이라고는 하나, 인기영화배우 사이토 타쿠미와 개그맨인 나가노를 앞세우는 정도로 홍보에는 부족함이 없었을 테지만 물러서지 않은 것이다.

문득 BIFAN에서의 게스트 뷰(GV)가 있던 6월 29일(당시 폐막식의 결과를 알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출품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각본가에 감독, 심지어 프로듀서이자 주연배우인 사이토까지 한껏 들뜬 모습으로 상영관을 찾던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시큰해지던 순간. 지금의 상황에서 필자의 이 한 마디가 대체 얼마만큼 힘이 될지는 알 길은 없으나, 아무쪼록 그들 모두의 건투를 빈다.

홍상현 팩트체커  contact@newstof.com  최근글보기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ㆍ일 양국 매체에 분석 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시미즈 연구실 출신. 같은 학교 이미지인류학랩(IAL)의 네트워크 멤버였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 지면은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어쨌거나 괜찮아』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국내에 소개해 온 번역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비상근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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