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을 불태운 것은 누구인가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7.10.0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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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3년 후인 1395년 완성되었지만, 정종이 즉위하여 도성을 잠시 개경으로 옮기는 바람에 주인 없는 궁이 되었다가, 제3대 태종 때 환궁함으로써 다시 주인을 맞았다.

경복궁이 정궁의 구실을 제대로 한 것은 세종 때였다. 세종이 경복궁 안에 집현전, 흠경각,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간의대 등을 설치하는 등 궁 안을 두루 정비함으로써 비로소 군주의 거처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분노한 백성이 경복궁에 불을 질렀나

그러나 경복궁은 비운의 궁이었다. 1553년 화재로 근정전 일부가 사라졌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또 한 번의 화마로 한줌의 재가 되었다. 문제는 혹은 궁금한 것은 ‘누가 이때 경복궁을 태워 없앴는가’ 하는 점이다.

1592년 일본을 제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여 만 군대를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부산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을 격파했다. 왜군은 중로, 좌로, 우로의 세 길로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이일이 상주전투에서 패하고, 신립마저 탄금대에서 패했다. 충주 ‘탄금대’는 신라 때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한 곳이어서 붙여진 아름다운 이름의 강변이지만, 또한 장렬히 전사한 신립 장군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4월 29일 신립의 패보를 접한 선조는 피난을 결심했다. 이산해, 김귀영 등이 도성사수론을 주장하고 유생들이 피난을 반대했지만, 선조는 세자와 조신들을 거느리고 몽진 길에 올랐다. 선조가 도성을 버리는 순간, ‘분노한 백성들이 경복궁에 방화했다’는 것이 일반의 상식이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는 순간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원망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다. 백성의 분노는 경복궁·창경궁·창덕궁의 방화와...” 
-이우성, <조선왕조사>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자 백성들은 피난 가는 임금에게 돌을 던지고 경복궁에 불을 지르며 항의하였다.”  
-박한용 외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
“왕이 궁을 떠나자 백성은 분개하였다. 노비들은 장예원에 가서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또한 형조의 각종 문서뿐만 아니라 왕이 거처하던 경복궁을 불태웠다.” 
-이우태 외, <대학생을 위한 한국사>

 

백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나선 왕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고, 성난 군중이 궁에 불을 지르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궁궐에 불을 지른 것이 정말로 성난 백성이었을까? 임란 당시 ‘성난 백성’이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는 것은 <선조수정실록>과 유성룡의 <서애집>을 근거로 한다.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28번째기사

역사는 노비와 난적들이 노비문서를 없애고 방화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쥔 서인들이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의 수정을 주장하여 인조-효종 때 완성되었다. 수정을 주도한 것이 서인이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실록’의 부정적인 서술은 정략적으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경복궁 방화에 대한 것은 당파성과는 무관한 것이겠지만, 왜적의 침략에 야반도주하다시피 한 지배층의 무능을 덮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당시 상황을 ‘직접 본 것이 아니고 전해들은 것’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왜군 점령 당시 경복궁은 온전한 것으로 기록

경주대 이강근 교수에 따르면, 유성룡이 불탄 경복궁을 목격한 것은 조명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인 1593년 4월 20일이었으므로 그 역시 방화 현장을 보지는 못 했다. 불타기 전 경복궁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이는 왜군과 함께 한성에 들어 온 종군승 석시탁(釋是琢)이라고 한다.

“북산 아래 남향하여 자궁(紫宮: 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 사방 벽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천장 사방 벽에는 오색팔채로 기린, 봉황, 공작, 난, 학, 용, 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단학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강근, <경복궁>

석시탁은 경복궁의 온전한 모습을 보았다. 왜가 남긴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석시탁의 증언에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지만, 그가 보지도 않은 것을 본 듯이 상세히 묘사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고, 그럴 이유도 없다. 자신들의 만행을 덮으려 했다면 ‘와 보니 왕궁은 이미 불에 타 없어졌고,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고 술회했을 것이다.

한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휘하 장수로 <조선정벌기>를 쓴 오제키(大關)도 ‘궁궐은 구름 위에 솟아 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나라 궁전의 장려함을 방불케 했다’고 기록했으니, 경복궁이 불탄 시점이 선조 피난 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교수는 평양성 전투 이후 패전을 거듭하던 왜군들이 퇴각하면서 종묘와 궁궐에 방화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경복궁 방화자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분노한 조선의 백성인가, 침략자 왜군인가? 분노한 백성이라는 주장은 <선조수정실록>과 <서애집>을 근거로 하지만, 이것은 당대의 기록이 아니다.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이성적인 사고가 아니다. 오제키가 그의 책에서 조선 위정자들의 무능과 타락을 비아냥거린 것은 전형적인 조선 멸시라 할 수 있지만, 경복궁에 대한 묘사는 아름다운 조선 궁궐에 대한 경탄일 뿐이다. <조선일기>와 <조선정벌기>의 기록은 목격자가 직접 쓴 것이라는 점, 특정한 사관이 작용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사실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사료를 읽는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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