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은 5.18을 '헌법 수호'라 불렀다

  • 기자명 최윤수
  • 기사승인 2017.10.16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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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수의 법률 팩트체크

2017년 첫 번째 천만 영화 '택시운전사'는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1980년 5월 광주를 취재, 보도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5.18 민주화운동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막상 계엄군이 시민을 잔인하게 구타하고, 발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참담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4월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 계엄군이 시민을 조준 사격한 사실이 없고, 5.18은 폭동이라고 적었다. 그의 측근 민정기는 영화 '택시운전사'가 날조라고도 했다. 광주지방법원은 2017년 8월 4일 전두환 회고록이 5.18을 왜곡한다는 이유로 출판 및 배포금지가처분결정을 하였으나, 아직도 “5.18은 폭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5.18 광주 민주화항쟁을 폭도로 묘사한 당시 일간지.

하지만 5.18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법적 판단이 내려졌다. 판결문은 그 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우선 5.18 이전 상황을 살펴보자.

"김재규는 내란, 12.12는 반란"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다음날 계엄령이 선포됐고, 김재규는 내란목적살인, 내란수괴미수 등으로 기소됐다. 형법 상 내란(內亂)은 "국토를 참절(僭竊)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가담자 중 수괴와 내란목적으로 살인한 사람은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형법 제87조제88조). 김재규는 박정희 암살은 민주회복을 위한 것이지 내란 목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1980년 5월 20일 몇몇 대법관은 내란 목적을 부정했으나 다수의 대법관은 김재규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면서도 내란목적을 인정하여 유죄를 확정했고(대법원 80도306 전원합의체 판결), 김재규는 나흘 뒤 사형집행됐다.

박정희 대통령 살해 현장 검증중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이었는데, 1979년 12월 12일 계엄사령관인 국군참모총장 정승화가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통해 병력을 동원, 최규하 대통령에게 체포 재가를 강압하고 진압군을 제압하여 군 지휘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정승화는 내란을 방조한 사실이 없었고, 전두환이 군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해 체포한 것이므로, 12. 12. 사태는 이후 군형법 상 반란으로 인정됐다(대법원 96도3376 판결).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증가하자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사태를 감안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사태에 있다는 이유로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아울러 집회, 시위 등 모든 정치활동 중지, 언론 사전 검열, 대학 휴교,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 금지, 유언비어가 아닐지라도 전현직 국가원수를 모독 비방하는 행위, 북괴와 동일한 주장 및 용어를 사용 선동하는 행위, 공공집회에서 목적이외의 선동발언을 금지하면서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여 엄중 처단한다고 포고하는 한편 수도권, 부산, 대구, 광주 지역 등 진압 목적으로 공수부대를 준비시키고, 권력형비리, 사회혼란 조성 등 배후 조정 혐의를 씌워 김종필, 이후락, 김대중, 문익환, 고은 등 26명을 연행했다. 김영삼은 가택 연금됐고, 시위 참가 및 주동자로 학생 다수가 체포됐다.

"5.17 비상계엄은 내란"

당시 비상계엄을 선포할 사유가 있었을까. 비상계엄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시 적과 교전(交戰)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攪亂)되어 행정 및 사법(司法) 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에 군사상 필요에 따르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선포한다(계엄법 제2조 제3항).

1980년 5월 18일자 경향신문. 5.17 비상계엄 소식을 1면에서 다뤘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북한이 소수의 간첩을 10여 회 남파한 사실, 중앙정보부 2차장이 북괴 남침 위협에 관한 첩보를 제공한 사실, 대규모의 학생시위가 있어 사회질서가 상당한 정도 교란된 사실은 인정되나, 당시 침투한 간첩들은 조기에 섬멸되거나 다시 북상 도주했고, 일본내각조사실의 첩보에 대하여는 1980.5.11.경 육본 정보참모부에서 분석한 결과 "북괴의 군사동향은 정상적인 활동수준으로서 특이한 전쟁징후는 없고 5월 남침설과 전방 병력 배치완료설은 그 신빙도가 희박하며 이는 우리의 국내정세 추이에 따른 북괴 남침방책의 일반적 가능성을 추측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시위학생들은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통솔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정치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반대하고 비상계엄의 해제와 민주화 일정의 촉진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비상계엄을 확대할 법률상 요건이 명백히 구비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서울고등법원 96노1892 판결). 

대법원 역시 같은 입장에서 5. 17. 비상계엄확대 및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는 형법 제91조 제2호의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 즉 국헌문란 목적으로 한 폭동으로서 “내란”이라고 인정했다(96도3376 판결).

전두환의 내란이 시작된 다음 날인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서울고등법원 96노1892 판결은 그 날을 이렇게 묘사한다.

5월 18일 새벽 1시 10분 특전사 774명이 소총을 휴대하고 전남대와 조선대를 이미 점거한 상황에서 10시경 200여명의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하자 강제해산시키면서 진압봉으로 머리 등을 무차별 가격하고, 난폭하게 연행하여 학생들이 광주 시내 중심지로 이동 집결하여 경찰병력과 격렬한 공방을 벌이는 등 시위가 확산됐다. 

전두환은 광주 시위가 정국 장악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시위 확산을 방지하고,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회 및 행정부를 전복 또는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할 목적으로 계획한 국회해산과, 입법, 사법, 행정을 통제하는 비상기구의 설치 등의 조치를 계속 추진하기 위하여, 광주 시위 상황에 대한 언론보도를 통제하면서 강력한 진압이 예상되는 공수부대의 시내투입과 증파로 이를 조속히 제압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7공수여단 33, 35대대가 광주시내로 투입되어 오후 4시부터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시위대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시위대와 시민들을 구분 없이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심지어 머리를 가격하거나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 등을 벗기고 기합을 주기도 하는 등의 과잉진압을 실시하여 광주시민 405명을 연행함과 동시에 8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추가로 병력이 투입되어 5월 19일 00:50경 소총을 휴대한 군부대가 장갑차의 선도로 위력시위를 하고, 전날 부상을 입은 시민 김경철(남, 23세)이 사망한데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면서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5월 19일 오전 10시부터 시민들이 대규모로 가세하면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며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자, 이들을 소총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무차별 가격하고 심지어는 일부 부대원들이 대검을 사용하는 등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여 그 과정에서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고, 그 중 김안부(남, 34세)가 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했다.

5월 20일 3공수여단 병력 장교 255명, 사병 1,137명이 투입되었고,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중심이 되어 차량 시위가 전개되면서 트럭, 버스 등의 돌진 공격이 계속되자, 최루탄과 진압봉을 사용하여 진압을 계속하고, 5월 20일 자정 광주역 앞에서 3공수여단 12,15대대 장교들이 시위대의 차량 공격에 대응 발포하여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혔다.

5월 21일 오후 12시 경 전남대학교 앞에서 3공수여단 병력이 차량으로 공격을 시도하는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운전사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고, 오후 1시경 전남도청 앞에서 11공수여단 병력이 장갑차와 버스를 이용하여 돌진해 오는 시위대에게 발포를 시작하고, 이어 인근 건물 옥상에 배치된 병력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박민환(남, 26세)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는 등 상당수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시위대들이 광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경찰서, 지, 파출소 등에서 총기와 실탄을 확보하여 무장 저항을 시작하자,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도청 일대에서 이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폭동하였다.

"5.18은 헌정질서 수호한 정당한 행위"

즉, 먼저 전두환과 신군부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확대하면서 내란 범행을 시작했고, 이후 공수부대가 광주 시위대와 시민들 구분 없이 진압봉으로 머리까지 가격하여 시민이 사망하자 이에 격분하여 시위가 거세짐에 따라 진압 또한 강경해지던 중 계엄군이 발포하여 사망자가 발생한 이후에야 시민들이 총기를 확보하여 무장 저항에 나선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진압하는 계엄군

민간인이 무장했다고 다 폭도라고 할 수 있을까.

서울고등법원은 계엄군을 향해 발포하여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처벌받은 정 모씨에 대해서 “전두환 등이 1980. 5. 17. 비상계엄 확대 선포를 시작으로 1981. 1. 24. 비상계엄의 해제에 이르기까지 행한 일련의 행위는 내란죄가 되어 헌정질서파괴범죄에 해당하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한편 피고인의 원심판시 각 행위는 전두환 등의 이러한 헌정질서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 할 것이다.”라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광주 시민은 폭도가 아니다. 내란을 저지하고 반대함으로써 헌법을 수호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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