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엔 한국에서 건너간 '친구'가 있다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7.10.23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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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市)에 갔었다. 하기는 정한론을 주창한 요시다 쇼우인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요시다는 일본의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요즘 아베 총리와 일본의 우경화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명분이야 일본의 자위권을 위해서라지만, 태평양전쟁 패전 후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평화헌법 9조를 고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 국가로 돌아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시다 쇼우인 초상화 (야마구치현 문서관 소장).

요시다 쇼우인과 '정한론'의 고향 일본 하기시

요시다의 생가에는 지금도 ‘쇼우카손주쿠’라는 그의 서당이 보존돼 있고, 생가와 신사, 역사관 등이 있고, 멀지 않은 곳에 그의 묘도 있다. 쇼우카손주쿠는 산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교육시설임에도 지난 2015년 군함도를 비롯한 여러 산업시설들과 함께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의 유산’ 중 하나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바람에 하기시 어딜 가나 자랑스럽게 펄럭이는 유네스코 깃발을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타카스기 신사쿠, 쿠사카 겐즈이, 키도 타카요시, 야마카타 아리토모, 이토우 히로부미 같은 유신의 지사들을 길러낸 요시다 쇼우인을 메이지유신은 물론 메이지 산업혁명의 뿌리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산업시설이 아닌 서당을 억지로 끼워 넣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유네스코 문화유산 심사위원회에서는 이게 공장인지 탄광인지 서당인지도 몰랐을까?

하기시는 작지만 흥미로운 곳이다. 야마구치현 북쪽 변두리에 위치한 이곳이 주목을 받는 것은 역시 요시다 쇼우인 때문이라고 해야겠지만, 본디 이곳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정한론으로 인한 악연도 깊지만, 한국과 아주 가깝다는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오랜 옛날부터 양쪽 간의 교류가 활발했다.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서북쪽으로 건너면 곧 부산과 울산이다.

한국에서 건너온 '친구'란 단어 사용

울산시하고는 1968년 자매결연한 후 청소년, 민간, 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하고 있는데, 그때부터 친해졌다기보다는 오래 전부터 울산과 하기가 가깝고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자매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하기시에서 만난 시민들은 친절했고, 한국인이라고 하면 더욱 상냥하고 따뜻한 태도를 보였다.

시내 곳곳에 있는 관광시설에는 어디에나 해설사들이 예의 바르게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요시다 쇼우인이 강단에 섰었다는 옛 명륜당에서 만난 해설사는 예로부터 울산에서 어부들뿐만 아니라 상인들도 많이 내왕했다면서, 하기에도 ‘친구’라는 말이 있다고 했다.

“친구라니요? 한국어 친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일본어로는 ‘토모다치’지만, 하기에서는 ‘친구’라는 말도 씁니다. 친구는 한국에서 온 것이지요. 40~50대 이상은 지금도 친구라는 말을 써요.”

사진 맨 아래 ‘한마디’에서 ‘한국어의 친구와 같은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어를 조금 공부했고, 학원에서 만난 일본인 선생님들도 여럿이고, 일본을 오가면서 꽤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일본어에 한국어에서 건너간 ‘친구’란 낱말이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물론 하기 방언이지만, 일본에서 한국어 ‘친구’가 그 모습 그 뜻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명륜당을 나와 타카스기 신사쿠의 저택에서 만난 아주머니에게 ‘친구’란 말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그럼요, 친구는 토모다치죠.”라고 대답했다.

한국에서 친구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을 말한다.

친구: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순간 준태에게는 그녀가 오랜 친구 사이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조해일, 왕십리≫ 
- 표준국어대사전

그런데 일본어 사전에서도 똑같은 표현이 나온다.

ちんぐー/ちんぐう(친구): 友達(토모다치: 친구)、親友(친우) “あいつとはちんぐーじゃけぇ!(그 녀석하고는 친구야!)”

하기는 요시다 쇼우인이 정한론을 주창한 곳이다. 그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발판으로 대만과 조선을 침략했다. 우리는 고통을 받았고, 그들은 가해자였다. 역사가 주는 교훈에는 계승할 것도 끊어내야 할 것도 있다. 전쟁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역사다.

하기에서 발원한 정한론과 하기에서 쓰는 ‘친구’란 말은 동전의 양면처럼 느껴진다. 침략과 식민지배로 이어진 정한론은 한국인들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친구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이’를 뜻하고 ‘서로 돕는 관계’ 또한 의미한다. 요시다 쇼우인에게는 반드시 사과를 받아야 하지만, 친구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하기의 보통 사람들, 즉 보통 일본인들과는 진심으로 서로 돕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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