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지다’라는 표현은 고급스러운가?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7.11.05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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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교통방송(TBS) 라디오 「유쾌한 만남」에 출연했다.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뉴스에도 자주 등장한 김미화 님하고 나선홍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 특강 코너 ‘고급진 강의’에서 내 책 ‘큐우슈우역사기행’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거였다. ‘블리 사건’으로 심신이 피곤할 텐데, 옛 정을 잊지 않은 김미화 후배의 의리가 눈물 나도록 고마워서 열일 제쳐놓고 달려갔다.

지난 10월 12일과 19일 2주에 걸쳐서 2시간이나 얘기했는데도, 최익현 선생과 윤동주 시인, 군함도 그리고 일본의 시니세(오래된 점포) 정도만 소화할 수 있었다. 카고시마 심수관요와 조선궁, 미야자키의 백제마을, 일본 건국 신화의 무대인 타카치호에 관해 소개하고 싶었지만 다 할 수 없었다. 하긴 방송에서 다 얘기하면 누가 책을 사 볼까?

얼숲(페북)에 ‘고급진 강의’에 나갔다고 짤막한 글을 하나 올렸더니, ‘방송 잘 들었어요.’라는 여러 얼벗(페친)들의 댓글 속에 다음과 같은 의견이 있었다.

고급진강의, 이런 표현은 고급스럽지 못하네요 ㅜㅜ 어떤 영화에서 나온 대사가 인구에 회자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런 저급한 조어는 가급적 사용을 피했으면 합니다~~

이 얼벗께서는 ‘고급진’이란 표현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한마디로 ‘저급한 조어’라고 단언했다. 그러고 보면 ‘고급지다’와 같은 표현은 과거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고급진 강의’에 출연하느라 졸지에 ‘고급진 강의’를 하는 ‘선생’이 되었지만 (방송에 나가니 김미화 님과 나선홍 님께서 모든 출연자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쓴다면서 ‘정재환 선생’이라고 불러주었다 ) 나 역시 단 한 번도 ‘고급지다’라는 표현을 써 본 적이 없다.

‘고급진 옷을 입고 고급진 친구와 함께 고급진 식당에서 고급진 음식을 먹고 고급진 후식까지 고급지게 챙기는 고급진 생활은 내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나와 위 얼벗을 뺀 많은 이들이 ‘고급지다’ 열풍에 빠져 있는 듯한 상황인데, 도대체 이런 창의적인 표현을 언제부터 시작하게 된 것일까?

KBS 개그콘서트 '누려' 코너의 박지선(왼쪽)과 이희경. 헤럴드POP 제공

위 얼벗께서는 ‘영화’를 언급하셨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들을 꼼꼼히 검토하니, ‘빽아저씨’로 통하는 백종원 님께서 이 말을 버릇처럼 자주 쓰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이분이 원조는 아닌 것 같고, 2013년 방영한 한국방송공사 「개그콘서트」의 ‘누려’에서 이희경과 박지선이 이 표현을 유행어로 밀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14년 11월 10일 SBS 라디오 「컬투쇼」에 최우식과 가수 뮤지가 출연했을 때에도, 최우식이 “‘뿌리깊은 나무’에서 수염을 붙이고 출연했는데 하하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정찬우와 김태균은 “하하보다 고급지다”라고 응수했다.

이 같은 흐름을 보면 이희경과 박지선의 목적은 99% 성공적으로 달성된 것 같다. 문제는 위 얼벗처럼 여전히 ‘고급지다’라는 표현에 ‘저급하다’고 느끼거나 ‘틀린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 강렬한 저항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다는 것인데, 과거에 쓰지 않던 표현이며 문법이나 어법에 어긋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고급지다’라는 표현을 놓고 ‘써도 된다, 안 된다’는 갑론을박이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런 걸로 국론이 분열되지는 않겠지만, 시비를 따질 필요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고급지다’를 검색하면 아무런 결과도 볼 수 없다. 포털 사전에서 검색하면, ‘고급지다’는 ‘고급스럽다’의 잘못된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틀린 말이라는 건데, 의외로 국립국어원의 의견은 이와는 정반대다.

 

접사 ‘-지다’, ‘-하다’가 있으므로, ‘고급지다’, ‘고급하다’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수는 있습니다. 다만, ‘고급지다’, ‘고급하다’라는 단어는 현재, 두루 쓰이는 말은 아닙니다.

 

포털보다 국립기관을 존중해야 한다면 ‘고급지다’는 그다지 문제가 없는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돌이켜 보면 ‘-지다’라는 접사는 ‘찰지다, 기름지다, 값지다, 멋지다, 세모지다’와 같이 주로 한자말이 아닌 순우리말과 어울려 썼다. 반면에 ‘당황’, ‘복’, ‘경망’, ‘조잡’ 그리고 문제의 ‘고급’ 같은 한자말 뒤에는 ‘-스럽다’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당황스럽다, 복스럽다, 경망스럽다, 조잡스럽다, 고급스럽다, 자연스럽다!

언어는 습관이어서 이런 표현에 익숙한 분들에게 ‘고급진’은 충분히 어색하고 파괴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살펴보면, ‘-지다’ 앞에 반드시 한자말만 오는 것은 아니다. ‘거북스럽다’, ‘자랑스럽다’는 ‘거북’과 ‘자랑’이 한자말이 아님에도 자연스럽게 ‘-스럽다’가 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급’ 뒤에 ‘-지다’도 붙을 수 있다.

말은 나고 자라고 변하기도 죽기도 한다. ‘골 때리는 짬뽕이야’ 같은 표현은 1990년대에 유행했지만, 요즘 이 말을 쓰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무지하게 매너가 나쁘다는 뜻의 ‘무지개매너(무지+개매너)’, 나이가 많은 것을 앞세워 무조건 우대해주길 바라는 사람을 뜻하는 ‘나일리지’나 남아서 공부나 하라는 뜻의 ‘남아공’ 같은 유행어는 과거에는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말들이 100년 후에도 계속 쓰일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고급지다’의 운명 역시 제아무리 ‘고급진 두뇌’의 소유자라 해도 쉽사리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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