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무능한 보수', 역사는 반복된다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7.11.13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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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밖에서 벌어진 사건들 ①

영화 <남한산성>만큼 화제가 된 영화도 드물 것이다. 개봉 때부터 화제를 모으더니 호평과 혹평이 엇갈리며 댓글란을 채웠고 저마다 지닌 역사적 지식을 동원하여 영화를 분석하고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점이 잘 되었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한 이들이 수도 없었으니까. 화려한 말잔치가 그에 필적하는 흥행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아쉬우나, 영화를 통해 재연된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의 역사가 또 한 번 양강(兩强)의 틈바구니에 끼어 전쟁의 위협에 수시로 시달리고 있는 한국인들의 입천장을 간지럽힌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다.

기실 남한산성 안의 이야기는 소설과 영화를 통해 모두에게 낯익다. 그러나 남한산성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애초에 조선군은 왜 초기 방어에 실패했고 이후 방어전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 실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 번 남한산성 바깥의 역사를 들춰 보자.

귀주대첩과 삼전도 굴욕, 그 차이는 어디서?

전쟁 발발 후 청나라 군대의 기동성은 실로 대단했다. 청군의 선봉대는 압록강을 건넌 뒤 5일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그래서 강화도로 향하던 어가는 준비 안된 남한산성으로 향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전격전’이 전혀 새로웠던 전술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북방 민족의 기병대들은 기동력을 활용하여 상대의 심장부를 직격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다. 몽골도 그랬고 거란도 그랬다. 고려 시대 거란의 3차 침공에서 거란 장수 소배압은 역시 고려의 지방 수비군을 팽개친 채 고려군의 수도 개경만을 바라보고 돌진했다.

그러나 2차 침공 때 지방으로 피난 다니며 무진 고생을 했던 고려 왕 현종은 개경을 떠나지 않고 도성사수를 외치고 있었다. 전격전을 펼쳐 개경 앞에 이르렀던 거란군은 단 한 번 소규모 접전에서 패배한 뒤 말머리를 돌린다. 이들과 고려 주력군이 들판에서 정면으로 맞부딪친 것이 귀주 대첩이었다. 고려군 20만, 거란군 10만, 무려 30만의 대군이 격돌한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대회전(大會戰)에서 거란군은 괴멸됐다. 소배압의 거란 군이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보다 전력이 약해서였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왜 귀주대첩의 영광과 삼전도의 굴욕의 천양지차로 나타났을까. 우선 국경 지대의 방어 태세가 너무 달랐다. 고려는 오늘날의 평안북도 지역 곳곳에 성을 쌓아 요새화하는 한편 지방군이 저항하는 동안 중앙군을 편성, 투입했는데 거란군은 이미 이 국경 지대의 접전에서 상당한 힘을 상실하고 있었고 개경을 향해 전격전을 펼치기는 하지만 그 뒤통수는 여전히 따가웠다. 고려의 대군이 진격로의 배후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조선의 서북면에는 방비랄 것이 없었다.

그나마 힘을 쓸 만한 병력은 국경 지대 아닌 서울과 강화 등 수도권 일대에 집중됐다. 12년 전인 1624년 이괄의 난을 겪은 인조와 서인 정권은 국경 방어에 앞서 자신들의 권좌를 지키는 일에 더 집중했던 것이다. 1627년의 정묘호란 때 평안도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평안 병사 남이흥은 안주성에서 결사항전하다가 화약고에 불을 당겨 자폭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것이었다. “내가 지휘관이 되어 한 번도 습진(習陣)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슬프다.”

광해군의 북인 실권 뒤 북방 수비 허술해져

과거 전투는 사극에서 향용 보듯, 장수고 병졸들이고 가리지 않고 칼 들고 돌격하여 좌충우돌하는 난전(亂戰)이 아니다. 진(陳)을 펼쳐 전열을 형성하고 지휘관의 명에 따라 훈련된 병사들이 집단으로 기동하는 양상의 전투가 일반적이었다. 즉 습진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는 것은 성에 틀어박혀 오는 적을 맞는 것 외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바로 ‘정권 안보’ 때문이었다. 이괄의 난 이후 강력한 군대를 변경에 배치하는 일은 금기가 됐다. 거기에 남이흥은 서인의 정적이라 할 광해군 시절의 집권당 북인(北人) 출신의 인물이었다. 북인이거나 북인과 가까웠던 무관들은 모조리 사찰 대상이었고 섣불리 군대를 훈련시켰다가는 무슨 속삭임에 걸려 목이 날아갈지 몰랐다. 남이흥은 서인 정권에 협력하여 북인 출신 무관들을 감시하는 역할까지 맡았으나 그 역시 무관으로서 정권의 감시와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휘하 군사들을 제대로 훈련시키지 못한 채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청 태종 홍타이치는 이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병자호란 직전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조롱하고 있다. “귀국이 산성을 많이 쌓았지만 나는 당연히 큰길을 통해서 곧장 서울로 향할 것인데 산성으로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귀국이 믿는 것은 강화도이지만 내가 만일 팔도를 유린하면 일개 작은 섬 가지고 나라를 이룰 수 있겠는가.”(<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숫제 자신들의 패를 까서 보여 주는 형국이었지만 그래도 조선은 이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전쟁할 결의”는 충만했다. 1633년 2월 인조는 후금(청나라 이전의 호칭)과 맺은 모든 맹약을 파기한다는 국서를 후금에 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정묘호란 이후 유지해 온 두 나라 간의 ‘형제’(兄弟) 관계를 ‘군신’(君臣) 관계로 바꾸려고 들며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 후금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이는 글자 그대로 선전포고였다. 국서를 든 사신 김대건은 부지런히 압록강을 향했다. 

기절초풍을 한 것은 도원수 김시양과 부원수 정충신, 즉 변방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 도원수 김시양은 사신 김대건이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그 뒷덜미를 잡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그리고 문신 출신의 도원수 김시양은 자칫하면 자신의 목이 떨어질 수도 있는 보고를 올린다. “오랑캐가 당치도 않은 공물을 요구하는 것은 그 일부만 취하자는 것입니다. 적당히 구슬리면 해결될 것인데 굳이 전쟁을 자초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 군대의 군량이 부족하고 군세가 약하니 강화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김대건이 지닌 국서를 고쳐 주십시오.” 

"전쟁불사" 외치며 수도방위만 증강한 조정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국서는 고쳐졌으나 도원수와 부원수는 결박당해 한양으로 끌려와야 했다. “감히 임금의 사신의 발목을 잡다니.” 그래도 서북의 방비 강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국력이 피폐한 탓도 있었을 것이지만 수어청이니 총융청이니 하는 수도 방위 부대들은 지속적으로 꾸려지고 있었던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대표적 매파로 알려져 있는 김상헌. 주전론을 주장했지만 결국 청나라의 포로로 끌려간다.

'까짓 거 전쟁합시다’는 목소리는 드높았으나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고 전쟁 나면 가장 먼저 강화도로, 남한산성으로, 시골로 튀어 버릴 자들이 가장 목소리를 높였으며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비겁하다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전쟁할 수 있는 결의’를 강요하는 상황, 그것이 병자호란을 맞이하는 조선의 현실이었다. 대륙의 반을 장악했던 거란의 정예 기병대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국왕 이하 백성들이 단결하여 수도 사수를 외쳤던 고려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어쨌건 전쟁은 시작됐다. 조선의 전략은 단 하나였다. 몽골 침략 때처럼 수군이 없는 후금 기병대를 피해 강화도로 들어가고 (강화도를 못가서 선택한 곳이 남한산성) 각지의 근왕군을 집결시켜 적을 요격하는 것. 실제로 각 도의 수령방백들은 예하의 장정들을 긁어모아 남한산성으로 모여들었다. 개인적으로 영화 <남한산성> 속에서 가장 몰입이 안되는 캐릭터는 대장장이 서날쇠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쇠를 녹이고 두들기는 대장간의 천민치고는 지나치게 잘생기고 품위 넘쳤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고창석이 맡으면 좋을 역할을 고수가 연기하고 있으니 어찌 영화 보는 이가 적응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각설하고 이 서날쇠에도 실제 모델이 있었다. 서흔남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남한산성에 거주하는 천민이었고 영화 속 서날쇠와 비슷한 일을 해 냈다. 근왕병을 호소하는 임금의 밀지를 품에 넣고 성을 빠져나가 청나라 군대를 돌파하여 각지를 누빈 것이다. 서흔남은 광인이나 거지 행세를 했는데 청 태종 가까이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앉은뱅이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무릎으로 기어가는 몰골을 보고 청 태종이 고기 한 점을 던져주자 그는 개처럼 받아 질겅질겅 씹다가 오줌을 싸 버려 청나라 군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였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도저히 고수가 맡을 캐릭터는 아니다.) 그는 도원수 김자점이나 지방군을 이끌고 올라온 장수들에게 임금의 격문을 전하고 답장도 받아 돌아온다. 여기서 질문. 실제 인물 서흔남의 노력은 왜 좌절됐을까. 근왕군들은 왜 패했는가. 물론 전력이 약해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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