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치욕, 진짜 원흉은 따로 있다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7.11.28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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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첫 번째 이야기>에 이어서...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몽진했으니 각도의 수령방백은 관내 군병들을 모아 속히 근왕(勤王)하라는 소식은 팔도에 퍼졌다. 팔도의 감사와 병사(兵使, 병마절도사)들은 장정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했고 머릿수가 채워지는 대로 남한산성을 향해 행군하기 시작했다. 남한산성 농성을 시작한 지 2주일가량 뒤 드디어 강원도 근왕군이 남한산성 근처 검단산에 올라 횃불을 밝힌다. 남한산성 안에서도 북을 올리며 환호했다. "이제 뭔가 되어 가는가보다." 실제로 그랬다. 충청도 병력은 죽산까지 와 있었고 경상도 군대도 문경새재를 넘고 있었다.

청나라는 조선의 유일한 전략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청나라 군은 지방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요로를 차단하고 '모로가도 남한산성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진군해 오는 조선 근왕군을 각개격파한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연합 작전은커녕 상호 간 연락도 제대로 취하지 않는 개별 부대가 청나라의 대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각도 감사가 이끄는 군대를 통솔하고 작전을 짜야 할 도원수는 태반의 병력을 잃고 헤매는 중이었고 남한산성 조정은 전령을 보내는 일조차 버거울 정도였으니 조선군에게 머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팔다리는 방향을 모르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경기 광주 쌍령에 집결한 경상 4만 군사

강원도 근왕군과 충청도 근왕군은 청나라군에 가볍게 격파된다. 뒤를 이어 남한산성 인근으로 육박한 것이 경상도 군이었다. 이 경상도 군대 규모는 정확하지 않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4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다른 도의 병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 하지만 그만큼 땅도 넓고 인구도 많았던 경상도 병력이었으니 조선 조정과 백성들의 희망을 짊어진 군대였다. 경상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의 근왕군은 해가 바뀐 정축년(丁丑年) 정초 남한산성 인근 쌍령에 도착한다.

이 소식은 청나라 진영에도 전해지고 남한산성을 포위한 10만 청군 가운데 일부가 쌍령으로 남하한다. 그런데 이 긴장감 흐르는 상황에서 어이없는 대목 하나. 조선의 희망이었던 경상도군의 지휘관이었던 경상 좌병사 허완은 다음과 같은 인물이었다.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 사람들을 보면 울기부터 했다." <연려실기술>  

조선의 운명을 건 결전을 지휘할 사람이 겁에 질려 질질 짜면서 사람들의 위로를 받을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이 겁많은 대장은 부대 배치부터 기이하게 전개한다. 진 외곽에 훈련이 덜 된 조총 부대를 배치하고 그 다음으로 정예 사수를, 그리고 창검으로 돌격해서 싸우는 살수 부대를 맨 후방에 배치한 것이다. 승리를 위한 군대 포진이 아니라 숫제 군대를 자신의 경호 부대로 치부하는 배치였다. 이에 까무라치게 놀란 부하 장수들이 항의하자 허완은 이렇게 대답한다. "안돼. 정예 사수들이 얼마 없지 않나." 그럼 맨 앞의 초보 사수들은 무엇이 되는가. 칼밥이 되라는 것인가 화살받이가 되라는 것인가.

더하여 임진왜란 이래 조선군 장수들의 고질적 문제가 또 한 번 불거졌다. 정보전의 부재. 경상도군은 쌍령에 이르는 동안 척후병 하나 내보내지 않았다. 청나라 군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기동하는지 알 필요가 없다는 듯 꾸역꾸역 남한산성 앞으로만 부르짖으며 쌍령에 진을 친 것이다. 쌍령 앞을 흐르는 개천을 해자(垓字)로 삼고 산을 등지고 목책을 둘렀는데 청나라군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조선군을 엄습했다. 산등성이를 타고 남하해서 고지대로부터 짓쳐들어와 조선군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청군 수백명 vs 조선군 4만, 그 결과는?

그렇게 많은 수도 아니었다. 불과 수백 명이었고 그 중에도 수십 명이 사납게 덤벼들었건만 전방의 초보 사수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총을 난사해서 적에게 제대로 된 피해도 주지 못한 채 화약이 바닥나고 말았다. 몇몇 용감한 사람들이 앞에 나가서 활을 쏘며 독전했지만 이미 총알 사라진 쇠막대기의 무용함을 아는 군중은 격하게 흔들렸다. 그들의 머리 위로 청나라군의 돌격이 시작된다. 경상 좌병사 허완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는다.

조선군은 높은 데서부터 밀고 내려오는 청나라군에 쫓기면서 넘어지고 엉키며 서로가 서로를 밟아 죽이게 된다. 목책을 넘어야 살 길이 보였으니 일시에 낮은 지대의 목책으로 몰렸고 그 중 힘없는 자들은 넘어지고 힘있는 자들은 그들의 몸을 짓밟고 목책에 매달렸다.

막상 올라서고 보니 목책 바깥 쪽은 또 까마득했다. 꾸역꾸역 뒷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올라오는 상황에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목책에 오르다가 밟혀 죽고 목책에서 뛰어내려 머리 깨지고 허리 부러져 죽은 시신들이 목책 안팎에 산처럼 쌓이고서야 살아남은 병사들이 그들을 디딤돌 삼고 계단 삼아 목책 넘어 도망갈 수 있었다고 한다. 

"흩어진 병사들이 목책에 도달했으나 목책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면 그 뒤로 계속 시체가 쌓였고, 목책을 넘은 병사는 목책 밖이 험준해 추락해서 죽었다" (남급의 <병자일기> 중)

 골짜기가 구릉이 되도록 시체가 쌓였다는 말도 있으니 얼마나 참담한 패배였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밟혀 죽은 사람 가운데에는 경상좌병사 허완도 있었다. 청나라군은 경상우병사 민영의 군대로 돌격했고 민영은 웬만큼 싸우는가 했으나 화약 분배 와중에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쌍령 전투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참패였다. 척후병 하나 제대로 내보내지 않음으로써 적의 위치와 상황을 파악하는데 실패한 정보력의 부재, 훈련 안된 군중을 머리 수 하나만 믿고 정예병 앞에 들이미는 우매함, 그나마 있는 전력을 '지도부' 사수를 위해 써 버리는 비겁한 아둔함, 지휘관 스스로 통제력을 상실하고 도망치다가 밟혀 죽는 참담함. 그리고 청나라 군이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수를 스스로 밟아 죽인 조선 병사들의 얼굴에 가득했던 비루함. 역사 교과서에 싣기도 싫을 만큼 황당한 참패를 그려낸 요소들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한편, 청나라군은 남한산성 외 조선의 급소라 할 강화도를 공략한다. 강화도에는 세자빈과 왕자들이 피난해 있었다. 저 무서운 몽골군도 감히 넘보지 못했던 강화도라는 믿음 때문이었을까, 강화도 방어를 책임진 강도검찰사 김경징은 천하태평이었다. 그러나 요동을 장악한 청나라는 요동 지역의 명나라 수군을 활용할 수 있었다. 명나라 출신 장수 상가희, 경중명이 강화도 침공 작전을 전개하는데 후일 청나라를 뒤흔든 '삼번의 난'을 일으키는 거대한 세력가로 출세하게 되는 이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수전(水戰) 실력은 만주족과는 차원이 달랐고 강화도 수비군은 느닷없는 청나라 함대의 '강화 상륙 작전'에 허를 찔리고 만다.

하루만에 점령당한 강화도, 그 원인은?

청나라 함대가 몰려왔을 때 이를 처음 맞아 싸운 것은 충청수사 강진흔이었다. 강진흔이 적선 몇 척을 격침시키며 분전하는 가운데 주사대장, 즉 강화 지역 수군 사령관 장신이 조선군 본함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청나라 함대 몇 척이 새로이 출현한 조선군 함대에 맹렬하게 돌격해 들어가자 주사대장 장신은 바로 뱃머리를 돌려 도망가고 말았다. 강진흔은 격노했다. "장신! 네가 나라의 은혜를 그리 두텁게 받았으면서 이럴 수가 있느냐. 너를 베어 죽이겠다." 그러나 장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망갔고 심지어 부하 장수들이 강진흔을 돕고자 한 시도조차 막았다. 청군의 진격을 저지하던 유일한 방해물이었던 바다가 뚫렸다. 강화도는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함락되고 말았다. 검찰사 김경징은 나룻배를 타고 탈출해 장신의 배에 오른다. 김경징의 부인, 어머니, 며느리는 3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건만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의 강압에 의해서라고도 한다) 강화도 방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진 김경징과 장신은 그렇게 도망쳤다.

근왕군은 그뿐이 아니었다. 산성 중심의 방어 전략에 따라 산성에 들어갔다가 청나라 기병대가 서울로 내달려버리는 낭패를 보았던 평안도 군사들도 움직였고 강원도 군도 선봉대가 패했을 뿐 본대는 건재했다. 도원수 김자점 휘하의 병력도 황해도 토산 등지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긴 했지만 여전히 조선군의 핵심 전력이었고 무엇보다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지녔다 할 함경도 근왕군도 남하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전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까.

청나라와의 전쟁 선포나 다름없는 국서를 가로막았던 도원수 김시양이 파직당한 뒤 그 뒤를 이은 인물이 김자점이었다. 이 도원수는 전쟁 초기 온갖 실수를 도맡아 저지른다. 전쟁 발발 이후 적의 동향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해 청나라의 전격전을 허용했고 청군을 추격하는 와중에서도 참패를 당했다. 또 한양 사수 임무를 맡았던 심기원은 북한산에 보루를 설치하고 적을 막아보려 했으나 실패하고 패잔병 수천명을 이끌고 한양을 떠난다. 김자점,심기원이 이끈 조선 관군의 주력과 강원도, 함경도 근왕군까지 합세한 2만여 병력은 오늘날 경기도 양평의 미원(迷原) 벌판에 집결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지역 근왕군과 연계하여 작전을 펼치려는 시도도 없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지방의 감사와 병마절도사들이 훈련도 안된 농민군들을 이끌고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하게 적군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산산조각 나고 남한산성의 포위는 더욱 강화되는 동안, 군대의 총사령관인 도원수와 수도방위사령관격의 유도대장은 조선에서 그나마 운용할 만한 군대를 보유한 채 요즘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은 삼전도의 치욕 속에 끝났다.

조선군 최고 지휘부 무능과 비겁함이 부른 참사

위에 등장하는 이들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주워섬겨보자. 전사한 사람들은 제쳐두면 김경징, 장신, 김자점, 심기원, 강진흔 등이다. 강진흔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의 실세이자 최고 지휘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 그들은 업무에 태만했거나 비겁했으며 무능했고 더하여 그 무능함으로 조선을 망치고 수많은 백성들의 피를 쏟았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이들에 대해 엄중히 처벌하고 사령관이 도망가는 어이상실의 현장에서도 열심히 싸웠던 충청수사 강진흔 같은 이는 포상을 받고 출세를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내몰고 왕이 된 사람이었다. 기존의 왕이나 후계자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인물로 조선 왕조에서는 인조 이전에 태종 이방원과 세조, 중종 등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항상 공신(功臣)들이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자신을 도운 공신들의 세력을 되레 약화시켰고 필요한 경우 숙청도 마다하지 않았던 반면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면서도 공신을 우대한다는 대전제를 포기하지 않았고 중종은 즉위 후 한동안 공신들의 입김에 이리저리 휘둘렸다. 인조의 경우는 태종이나 세조보다는 중종 쪽에 가까웠다. 공신들을 우대했고 권력을 그들에게 집중시켰다. 권력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인조는 그 책임을 적용하는 과정에서도 공신들에게 온화했다.

남한산성 수비군보다도 많은 병력을 거느리면서도 양평의 들판에서 꼼짝하지 않았으며 근왕군을 집결시켜 전쟁의 분위기를 바꿀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던 도원수 김자점, 유도대장으로 서울을 지키지 못했고 과장된 승전보를 보내 남한산성을 하릴없이 들뜨게 했으며 김자점과 함께 들판에서 헤매기만 한 심기원 등은 잠깐 형식적인 처벌을 받은 뒤 이내 복귀하고 둘 다 영의정까지 지낸다. 김경징은 인조반정 1등 공신 김류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기도 전에 공신 칭호를 받았다. 하는 짓마다 우매하고 탐욕스러웠던 그는 자신이 책임진 강화도를 그 지경으로 만들고 도망쳤다. 강화도 앞바다를 책임졌으나 꽁무니를 뺐던 주사대장 장신도 공신이었다. 온 나라가 그들을 때려죽이라고 들끓었으나 인조는 이렇게 말한다.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고, 장신은 조수(潮水)가 물러감으로 인하여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법대로 처벌하는 것은 과할 듯 싶다." 인조는 자신을 왕위에 올린 반정 1등 공신의 아들이자 2등 공신 김경징과 3등 공신 장신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목숨 걸고 싸운 '흙수저' 군인들에게 참수형

하지만 김경징의 죄는 너무나 컸고 눈에 불을 켜고 대드는 신하들의 등쌀에 임금은 어쩔 수 없이 김경징에게는 사약을, 장신에게는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붙들려온 김경징이 사약이 내렸다는 소식에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옆에서 "어차피 죽을 것 체통을 지키시오" 하는 또 하나의 사형수가 있었다. 그가 바로 강화도 앞바다에서 피눈물 쏟으며 싸운 충청 수사 강진흔이었다. 강화도 앞바다에서 가장 열심히 싸운 그에게는 참수형이 떨어진다. 조선의 사형 제도는 죄의 경중에 따라 그 집행 방식이 달랐다. 사약이나 교수형, 즉 시신이 온전히 보전되는 사형 방식이 아닌 참수나 거열형(사지를 찢어 죽이는 사형)은 중죄인에게 해당됐다. 즉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이가 아니라 가장 열심히 싸웠던 최전방 지휘관에게 가장 무거운 처벌을 내린 것이다.

강진흔과 함께 참수된 사람은 강화도 갑곶을 지키던 하급 지휘관 변이척이었는데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가계(家系)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무슨 벼슬을 지낸 아무개의 후예요, 승지 벼슬을 한 아무개의 손자요, 어느 고을 사또 한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식의 소개 한 자락 없는, 양반치고는 별 볼 일 없는 '흙수저'였다는 뜻이다. 인조가 강진흔을 두고 한 말은 정말이지 기가 막힐 정도다. "강진흔은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나지도 못했다." 이 말은 수백 년 뒤에 등장하는 영화 <내부자들>의 대사 한 마디를 떠올리게 한다. '족보 없는 검사'에게 부장검사가 내지르던 말. "그러게 잘했어야지. 잘 태어나든가." 더 나아가 보면 경상도 병력을 단 한 번에 증발시켰던 무리한 작전의 지휘관 허완 역시 인조반정 후 벼락출세한 사람이었다.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들이 전쟁 불사를 외쳤고 그에 대비하면서도 국경 방비보다는 정권 안보에 더 신경을 썼으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써야 할 권한을 자신의 목숨을 보위하는 쪽으로 발휘했고,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서 나라 일을 그르쳤다. 그런데 그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고 온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저놈 죽여라를 부르짖은 뒤에야 임금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내린다. 오히려 가장 앞장서서 싸웠으나 ''빽도 없고 가문빨도 없는' 강진흔보다 훨씬 배려 받은 형벌이었다.

병자호란을 되새기며 오늘을 다시 돌아볼 제 가슴을 채우는 이 기묘한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 오늘날의 대한민국에는 공신들이 끼리끼리 뭉치고 임금마저 제 편으로 만들어 해먹을 대로 해먹는 일도 일절 없을 테고, 전쟁의 참화를 감당하지도 못할 주제에 "전쟁할 수 있는 용기"를 부르짖는 철부지도 도무지 눈에 띄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전쟁의 수뇌부가 될 리는 만무한데다가 누구든 과오를 저지른다면 법의 심판을 받는 데에 지위고하(地位高下)와 권력자의 총애 여부와는 아무 관계없이 공평하게 처벌받는 민주사회일 텐데 어찌 병자호란의 어리석은 과거 따위가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힐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병자호란이 터진 계절 2017년 겨울의 문턱, 왠지 마음이 스산하다. 결코 따뜻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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