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런던에서도 붙었던 멕시코ㆍ스웨덴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7.12.04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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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러시아 월드컵 조편성이 끝났다. 우리는 F조, 상대는 자그마치 독일, 스웨덴, 멕시코다. 어느 한 팀 만만한 팀은 커녕, 어떻게 해 볼 엄두가 돋지 않는 상대들이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은 망했구나 암담한 맘으로 우리와 상대할 팀들의 면면을 들여다보자니 슬며시 까마득한 옛날 기억과 사연들이 뭉개뭉개 피어오르기도 한다. 독일, 스웨덴, 멕시코는 대한민국 축구의 초기 역사에 저마다 특이한 추억의 고리들을 걸어 놓은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그 사연들을 잠시 역사 속에서 끄집어내 보자. 

2018 러시아월드컵 조추첨 결과. 한국은 F조에서 전 대회 우승팀 독일, 유럽예선에서 이탈리아를 집으로 보낸 스웨덴,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와 승부를 겨루게 됐다.

첫 출전 런던올림픽에서 만난 멕시코ㆍ스웨덴 축구

한국팀이 우리나라가 태극기를 들고 처음 출전한 올림픽은 1948년 런던 올림픽이다. 이때 국명은 물론 영어로 Korea였겠지만 당시 선수들은 ‘대한 건아’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었고 미군정하에 있는 ‘조선’ 대표였으니까 말이다. 정식 독립 국가가 서지 않았으니 IOC도 그리 흔쾌하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미 군정의 협조 없이는 올림픽 참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올림픽 후원회다 뭐다 돈을 끌어 모아 봤지만 출전 경비는 태부족이었고 그걸 달러로 바꾸는 일부터 교통편까지도 간단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7종목에 50명의 조선 선수단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 당시 조선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과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제패한 서윤복을 배출한 마라톤 강국이었다. 런던 올림픽에서도 최윤칠 등을 내세워 내심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복싱, 역도, 여자 투포환, 농구 등 다양한 종목에 선수들을 출전시켰지만 금메달은 따내지 못하고 복싱과 역도에서 동메달 두 개를 따내는데 그쳤다. 그런데 이 50명의 선수단 가운데는 축구 선수단도 끼어 있었다.

당시 조선 축구의 위상은 꽤 높았다. 일제 강점기 경성축구팀과 평양축구팀이 벌인 경평전의 열기는 대단했거니와 1935년에는 전일본축구대회에서 경성팀이 우승을, 그 다음 해에는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라 할 보성전문이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식민지 백성의 한을 통쾌하게 날려 준 것이 축구였다. 해방 후에도 그 위력은 여전하여 1947년 조선 축구팀은 상하이를 방문하여 동북아 최강을 자랑하던 ‘동아족구단’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던 것이다. 동아족구단은 그 충격으로 해산까지 했다고 한다. (경향신문 1965년 2월 13일자) 이렇듯 아시아에서는 축구깨나 한다는 조선 선수들이었지만 세계 무대에 나선 건 그야말로 ‘살이 떨리는’ 일이었다. 일례로 잔디 구장조차 처음 밟아 보는 선수들이 많았다. 그들은 맨발로 융단 밟듯 잔디 위를 걸으며 신기해했다.

런던 올림픽이 개막됐다. 그런데 돌발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한국 주전 골키퍼가 허리 부상을 당한 것이다. 대안은 주전 골키퍼보다 10살이나 어린 홍덕영 골키퍼였다. 홍덕영 골키퍼는 엉겁결에 한국 골문을 책임진 수문장에 등극하는데 이는 그에게 인생 최고의 명예이자 최악의 경험의 서막이었다.

1948년 런던올림픽 한국과 멕시코 축구 경기 사진. 출처: FIFA

한국축구, 강호 멕시코 5대3 승리 '이변'

런던 올림픽 축구 예선이 시작됐다. 조선 축구팀의 역사적인 첫 A매치 상대가 바로 멕시코였다. 제 1회 월드컵부터 출전 경력이 있으며 프로리그를 운영하던 북미의 강자. 홍덕영 골키퍼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멕시코가 문전으로 쇄도하면서 슛을 날린 것을 받아내자 대선배인 김용식 (일제 강점기 때부터의 전설적인 축구 스타다)이 “덕영이 잘했어!”라고 격려했고 이때부터 홍덕영은 긴장 따위 벗어던지고 훨훨 날면서 멕시코팀의 공격을 막아냈다고 한다. 한국팀 공격수들도 뜻밖의 저력을 발휘하며 듣도보도 못한 나라 축구팀을 한 수 가르치려던 멕시코 선수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이때 멕시코 팀이 약자였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2년 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하여 브라질이나 유고슬라비아 등 축구 강호들과도 대등하게 맞서 싸우게 될 팀 멤버 대부분이 뛰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북미의 강호가 한국 축구팀에게 ‘말리고’ 말았다. 일본 축구 대표팀 경력의 노장 김용식 등 30대 노장들이 대활약한 한국팀은 멕시코를 5대3 스코어로 격파했다. 한국 축구 사상 첫 A매치를 승리. 그것도 강팀 멕시코를 상대로! 조선팀도 놀랐고 멕시코팀은 주저앉았다. 스탠드에 앉은 멕시코 응원단은 울음을 터뜨렸다. FIFA 관계자도 기함을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도깨비들인가. 아직 제대로 된 정부도 없는 나라의 축구팀이 멕시코를 깨다니!”

1948년 런던올림픽 당시 한국 대표팀 주장 김용식(왼쪽)과 멕시코 주장. 출처:대한축구협회

그 다음 상대는 스웨덴이었다. 한국 축구팀의 고참 김용식은 12년 전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선수들을 격려했을 것이다. “스웨덴 별 거 아니야. 1936년 내가 일본 대표팀으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을 때 일본이 스웨덴을 3대 2로 이겼단 말이야. 2대 2로 비기던 후반 40분에 일본이 페널티킥을 얻었어. 그런데 아무도 안차려고 하지 뭐야. 그래서 내가 차겠다고 했고 골을 넣어서 이겼어.”

그런데 당시 조선 팀에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앞서 홍덕영 골키퍼와 선배 골키퍼 간에 10년 가까이 나이 차가 난다고 했거니와 당시 김용식의 나이는 38세(1910년생)였고 그들 외에도 30대 노장들이 즐비했다. 이 대표팀이 구성되기까지 많은 진통이 있었다. 당시 일제 때부터 축구를 해 왔던 노장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것인가 상대적으로 젊은 선수들로 팀을 구성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첨예한 논쟁과 대립이 빚어졌다. 결국 16명의 엔트리 가운데 11명이 30대로 채워졌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젊은 대학생 축구 선수들이 대규모 월북을 해 버리는 어이없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그 북새통을 딛고 런던으로 날아온 노련한 노장들의 활약으로 멕시코를 잡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스웨덴은 한때 김용식의 발 아래 엎드렸던 왕년의 스웨덴이 아니었다.

1948년 런던올림픽 축구에서 우승을 차지한 스웨덴 대표팀. 출처: FIFA

수중전에 당황, 스웨덴에 역대 최악 12대 0 패배

스웨덴과 겨루는 날이 왔다. 그런데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를 머금어 미끄럽기도 하고 축구화가 빠질만큼 끈적끈적하게 된 잔디는 가뜩이나 잔디에 익숙지 못한 조선 선수들을 당황케 했다. 수중전이란 본디 체력전과 동의어다. 조선 선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던 바이킹의 후예들은 체력이 떨어져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조선의 노장팀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가장 분주했던 이는 골키퍼 홍덕영이었다. 후일 1954년 월드컵에도 출전하여 당시 헝가리 팀의 공격수 ‘전설의 왼발’ 푸스카스의 슛을 막아내다가 온몸에 멍이 들었다는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홍덕영 본인은 1954년이 아니라 1948년 런던 올림픽의 스웨덴전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그렇게 온몸에 멍이 들 정도로 스웨덴의 강슛을 막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골 네트는 열 두 번이나 출렁였다. 12대 0. 그 후로 70년 동안 한국 대표팀은 이 스코어 차이 이상으로 패배한 적은 없다. 천당과 지옥이라고나 할까, 멕시코를 5대 3으로 꺾는 파란 (지금 한국팀이 멕시코를 이긴다고 해도 대단한 이변이다) 다음에 조선팀은 스웨덴에게 불멸의(?) 12대 0 패배를 기록하며 올림픽을 마감한다.  스웨덴 축구대표팀은 런던올림픽에서 우승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해방 후 태극기를 왼쪽 가슴에 매단 축구팀의 최초의 A매치 두 번의 상대가 내년 월드컵에서 만나게 될 두 팀 멕시코와 스웨덴이라는 사실은 짖궂은 역사의 장난 같지 않은가. 당시 극동의 듣도보도 못한 나라에게 한 방 제대로 먹고 울음을 터뜨렸던 멕시코는 후일 그로부터 50년 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팀을 만난다. 한국팀 공격수 하석주가 선제골을 터뜨리는 등 또 한 번 멕시코를 잡는가 했으나 멕시코는 여지없는 반격을 펼쳐 IMF 사태를 겪는 와중에 월드컵에서의 선전분투를 고대하던 한국 국민들을 실망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당시 공을 발 사이에 끼고서 깡총 뛰어 한국 수비수 두 명을 바보로 만들었던 멕시코 선수 블랑코는 50년 전의 역사를 혹시 기억하고 있었을까.

왼발의 달인 하석주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에서 첫 골을 넣은 뒤 환호하는 모습. 그러나 환호는 잠시 뒤 백태클로 하석주가 퇴장당하면서 악몽으로 변했다. 출처:대한축구협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본팀의 일원으로 페널티킥 결승골을 기록한 김용식 때문에 땅을 쳤던 스웨덴. 1948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강팀으로 거듭났던 스웨덴은 ‘조선’ 축구팀을 12대 0으로 격파할 때 왕년의 호적수 김용식을 알아 보았을까. 기나긴 세월을 돌고 돌아 2018년 다시 잔디 위에서 만나게 될 세 나라의 조별 대진을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솔직히 한국이 어느 팀이든 이길 가능성을 따지기보다는 최선을 다한 명승부, 축구를 좋아하는 이들이 경탄하는 경기라도 이뤄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F조에는 한 나라가 더 남아 있다. 독일. 런던 올림픽이나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등 초기 한국 축구사에서 한국은 독일과 맞붙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인연이 전혀 없다고 볼 수도 없다. 어떤 사연일까.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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