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 스위스에서 '스쳐간' 독일 2018년에 다시...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7.12.05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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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계속>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이 열렸다. 2차대전 후 유럽에서 처음 열리는 월드컵이었다. 그리고 사상 최초로 아시아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에 나선 대회이기도 했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인도네시아) 팀도 있었으나 정식 국가의 대표팀으로는 사상 첫 도전이었다. 그 영광스런(?) 도전의 주인공이 바로 한국팀이었다. 

월드컵 극동 예선에는 한국 대만 일본이 편성돼 있었다. (오늘날의 중국, 즉 중공은 국제 스포츠무대에 나서지 않을 때였다.) 대만은 예선에 출전하지 않았고 결국 월드컵 티켓은 한일전의 승자로 좁혀진다. 그런데 "강력한 반일감정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팀의 입국을 강력히 반대한다. 일장기가 한국 땅에 휘날리는 것이 싫다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 대표팀은 어웨이 경기로만 두 경기 예선전을 치러야 했다.

앞서 1편에서 소개된 바 1948년 런던 올림픽 때 선배의 부상으로 엉겁결에 골문을 맡았던 홍덕영 골키퍼는 주전 골키퍼로 월드컵 예선전에 나서게 된다. 그의 회고다. “당시 한국대표팀이 영등포에 있던 동아여관에 묵고 있었어. 떠나기 전날 밤 할머니 한분이 여관 문을 두드리시더니 "꼭 이겨달라"고 하시며 짚으로 만든 달걀 꾸러미 5개를 건네주더라고. 가슴이 뭉클했지….” (2005년 9월 14일 일간스포츠 홍덕영 인터뷰 기사) 그 할머니의 마음이야 미루어 짐작이 가지 않는가. 21세기에도 일본에 깨지면 복장이 무너지는데.

1954년 3월 7일 한국축구 대표팀은 일본 도쿄 메이지신궁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5골을 넣어 일본을 꺽었다. 출처: 축구역사문화연구소

선수들 역시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심경이었을 게 뻔하다. “만약에 진다면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는 결사의 각오를 내비치고 현해탄을 건너간 한국 축구팀은 일본을 한 번은 대파하고 한 번은 비겼다.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 선수들과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 몰려든 재일교포들에게 일장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이는 모습은 또 하나의 감동이었을 것이다. 1954년 월드컵 대회의 아시아 몫 티켓은 당당히 한국의 것이 됐다.

그런데 스위스가 어디인가. 지구본만 돌려봐도 아득한 거리다. 더구나 그때는 ‘국적기의 스위스 직항’ 따위는 꿈에서도 나타날 때가 아니었고, 국내 항공사 자체가 없을 때였다. 미 국 군용기를 빌려 탄 대한민국 축구팀은 일단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서 방콕으로 건너가서 방콕에서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잡아타려고 했는데, 해외여행이란 우주 유영만큼이나 희귀하던 시절, 관계자의 업무 처리 미숙으로 예약이 제대로 되지 않는 바람에 비행기표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함께 갈 수도 없어서 일단 1진을 먼저 출발시키고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그나마 두 자리가 펑크가 났다. 이 사태에 망연자실한 군상들을 본 영국인 신혼부부가 "월드컵에 가는데 비행기 표가 없어서 못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그들 자리를 양보해 주어 (오 신혼부부여 부디 그 인생 행복하셨기를) 선수단은 낙오자 없이 방콕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이때 날짜가 6월 12일, 스위스 월드컵 개막일은 6월 16일, 한국팀의 첫 상대인 헝가리와의 대전 날짜는 6월 17일이었다.

방콕에서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은 6월 13일. 그나마도 직항이 아니었다. 방콕을 거쳐 인도 캘커타를 지나 로마를 찍고서야 취리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캘커타 지날 때는 프로펠러가 고장나서 국수를 삶아먹으며 허기를 견뎠고 로마에서는 그래도 전쟁 갓 치른 아시아의 선수들이 유럽에 왔다 해서 기자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말 그대로의 장도(壯途)를 거쳐 헝가리전이 열린 취리히에 도착한 건 6월 16일, 경기 전날 밤이었다. 시차 적응이고 컨디션 조절이고 말을 꺼내기가 민망한 상황에 상대해야 할 팀은 마자르 군단 헝가리였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금메달을 딴 이래 무패의 가도를 달려 오던 세계 최강팀이었다.

축구 종가라고 거드름피우는 잉글랜드를 7대1로 대파하여 그 코를 뭉개기도 했고 49년 동구권 대회에서는 북한이 헝가리한테 9대1로 깨진 적도 있었다. 그때 북한팀 선수로 뛰었고 전쟁 때 월남했던 박일갑이 전해 준 얘기가 한국팀이 헝가리에 대해 취득할 수 있었던 정보의 전부였다. 헝가리 팀에는 피렌체 푸스카스라는 전설의 인물이 있었다. "왼발의 달인"이라면 한국 축구팬은 하석주를 떠올리지만 세계 축구사에서 왼발의 달인의 칭호는 단연 이 푸스카스에게 돌아간다.

지쳐서 뛸 기운도 없는 한국 선수들과 전설적인 왼발의 달인 푸스카스가 이끄는 마자르 군단의 만남. 말할 것도 볼 것도 없는 경기였다. 9대 0이었다. 선수 교체가 없던 시절, 후반 나절에는 선수 4명이 나가 떨어져 7명이 11명을 상대하는 장관(?)을 연출했으니 9대0도 기적적인 스코어였다. 실제로 헝가리팀은 동구권의 소국 알바니아를 12대0으로 날려 버린 적이 있었다. 아홉 골을 먹었으나 그 이상을 막아낸 골키퍼 역시 6년 전 런던 올림픽에서 스웨덴에서 열 두 골을 먹었던 홍덕영이었다. 이어진 경기에서 한국팀은 터키에 7대 0으로 패배하고 짐을 싼다.

당시 같은 조에는 한 나라가 더 있었다. 그런데 당시 대회 규칙상 한 조에서 각 팀당 두 차례 경기만으로 조 1,2위를 결정했던 바, 터키는 헝가리와 경기를 치르지 않았고 한국은 또 하나의 팀과 맞붙지 않게 됐다. 그 또 하나의 팀이 바로 독일, 분단 국가 시대의 서독이었다. 한 조에 들었으나 어우러지지 않은 기묘한 인연.

한편 헝가리는 서독과 맞붙어 무려 8골을 집어넣는 괴력을 발휘한다. 8대3. 헝가리를 상대할 자는 없었다. 그런데 헝가리는 대진운이 좋지 않았다. 특히 브라질과의 대결에서는 경기가 끝난 후 난투극까지 벌이며 기력을 소진하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결승에 오르고 보니 상대는 예선전에서 여덟 골을 집어넣으며 맹폭했던 서독이었다.

이 시절 서독은 그 차원은 조금 다를지언정, 한국처럼 전쟁의 참화 속에서 헤어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던 불우한 나라였다. 전쟁과 패전의 상처는 독일 국민 전체의 트라우마였다. 한 예로 서독 대표팀을 이끈 주장 프리츠 발터는 한사코 비행기 탑승을 거부했다. 축구 선수로서 지녀야 했던 우수한 신체 덕분에 나치 독일군의 공수부대에 차출되었던 그는 공중 강하 직후 소련군의 저격을 받아 동료들이 피를 튀기며 즉사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고 그 후 심대한 정신적 충격과 비행공포증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는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그 축구 실력에 감탄한 헝가리인 감시원이 “독일 출신이 아니라 다른 지역 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해 준 덕에 가까스로 시베리아 행을 모면하기도 했다.

발터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선수들도 그 가족 중에 전쟁통에 죽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고, 전란의 고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그런데 이 암울한 상황에서 서독이 월드컵 결승에 진출했다. 서독 국민들로서는 열 일을 제치고 라디오 앞에 몰려들 수 밖에. 

1954년 월드컵 결승전 시작 전에 서독 선수들이 도열해 있다. 출처:AP

'독일병정'들은 독일병정들이었다. 선수 입장시 독일 선수들은 부동자세로 도열했고 프리츠 발터는 뒷짐을 지고 입장한다. 헝가리 선수들은 이걸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이 절도 있는 게르만 전사(戰士)들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수중전’이 펼쳐지면 선수들의 체력은 더욱 빨리 소진될 수 밖에 없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이 스웨덴에게 12대0으로 곡소리 나도록 깨졌던 이유도 체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특히 축구화가 문제였다. 그 당시의 축구화는 요즘의 농구화처럼 발목까지 감싼 형태였고 그 무게도 엄청났다. 등산화에 버금간다고나 할까. 거기에 빗물에 흠뻑 젖기라도 한다면 어땠겠는가. 서독팀 비장의 무기는 바로 아디다스사(社)가 개발한 축구화였다. 나일론을 재질로 하여 무게를 줄이고 탈착형 스터드 (축구화 징)를 장착한 신형 축구화는 수중전에서 서독 축구 선수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독일팀은 주장 발터의 지휘 아래 일치단결, 경기에 나섰고 마침내 베른의 기적을 일군다. 푸스카스가 이끈 마자르군단에게 4년만에 패배를 안긴 것이다. 결승골을 넣은 헬무트 란은 기뻐 날뛰며 발터를 끌어안았고, 독일 아나운서는 "벨트마이스터! 도이칠란트" 즉 세계챔피언 독일을 외쳤다. 가까운 스위스로 응원왔던 독일 응원단은 목메어 노래를 불렀다. 독일 국가. 하지만 전쟁 후 10년이 지났어도 “세계 최고 도이칠란트”를 부르짖는 독일 국가는 유럽 사람들에게 악몽이었다. 심지어 독일어를 쓰는 스위스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독일 국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커지자 스위스 라디오 방송국은 중계를 중단해 버린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3 중, 자작나무 출판사)

그러나 동료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고 일생을 유형지에서 보내야 할 위기에도 처했던 프리츠 발터에게, 헬무트 란에게, 아울러 두 번씩이나 패전국이 된 전쟁의 참화 속에서 “우린 안될 것이다”라고 좌절하고 있던 독일 국민들에게 그 경기는 "베른의 기적" 이상의 축복이었다. "독일에게 있어 그 경기는 독일인을 짓누르던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도 같았다. 어떤 관점에서는 독일 공화국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독일의 사학자 요아킴 페스트) 이 감격을 재현한 영화가 2003년 작 <베른의 기적>이다. 이 영화에서 한국은 딱 한 번 언급된다. “서독은 한국을 물리친 터키와 다시 붙는다.”

베른의 기적이 ‘라인강의 기적’으로 이어지고 독일이 다시금 일어서 유럽의 강국으로 거듭나는 것을 프리츠 발터는 묵묵히 지켜보면서 축구인으로서의 삶을 지속했다. 1956년 헝가리 반공 봉기가 일어났을 때 고국에서 쫓겨난 헝가리 축구 선수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며 과거의 은혜를 갚았던 그는 1958년 스웨덴 월드컵까지 독일팀을 지켰다. 이 천재적인 미드필더에게 욕심 내는 외국 프로팀도 많았지만 발터는 고향 클럽 카이저슐라우테른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서독 아니 통일된 독일 국민들도 발터를 잊지 않았다. 그는 독일 최고 훈장을 받았고 오늘날 카이저슐라우테른 홈 구장은 ‘프리츠 발터’ 스터디움으로 개명됐다.

대규모 전쟁의 직격탄을 받았던 두 나라, 독일과 한국은 그렇게 옷깃이 닿을 듯 말듯 스쳐 지나갔다. 그 중 하나는 세계 챔피언이 됐고 다른 하나는 기록적인 참패의 트라우마를 32년 동안 간직하게 된다. (한국의 월드컵 자력 진출은 그로부터 32년이 흐른 뒤였다)

1954년 세계 최고의 팀을 이끌던 프리츠 발터는 2002년 6월 17일, 신생국 한국이 헝가리에게 만신창이가 되던 그 날(1954년 6월 17일)로부터 정확하게 48년 뒤 세상을 뜬다. 며칠 뒤 열린 월드컵 8강전에서 독일 선수들은 검은 완장을 두르고 경기에 임한다. 하필이면 그 월드컵이 열린 장소는 48년 전 백넘버도 없는 유니폼을 입고 와서 백넘버를 자기들이 꿰매고 출전했던, 경기 전날에야 겨우 현지에 도착해서 시차적응 따위는 필요도 없이 뛰었던  어느 비참했던 나라의 한 도시, 울산이었다. 재미있지 않은가.

왼쪽이 서독의 프리츠 발터, 오른쪽이 헝가리의 피렌체 푸스카스.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의 총합이다. 축구공 하나, 그 공을 향해 몸을 던진 선수들의 발걸음 하나, 그들의 땀방울 하나에도 역사는 스며들어 있다. 이제 한 갑자가 훨씬 넘는 세월을 돌고 돌아 한국전쟁의 배후였던 나라 러시아에서 한국은 다시금 스웨덴과 멕시코, 그리고 독일을 다시 만난다. 이기고 지는 것이야 선수들의 실력과 운에 달린 일이겠지만 그들의 발놀림과 몸짓 사이에서는 어떤 역사가 피어날지, 무슨 이야기가 생겨날지 사뭇 궁금하다. 1948년 런던에서 한국팀을 만났던 스웨덴과 멕시코 선수들 가운데 살아 있는 이가 있다면, 1954년 스위스에서 한국 선수들을 지켜본 독일 선수가 생존해 있다면 이번 조 편성을 보며 이미 역사가 돼 버린 그들의 젊은 날의 기억더미를 뒤지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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