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원, '빨갱이' 이육사의 시를 읊다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7.12.14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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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의 역사 팩트체크]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사상과 인생

자유한국당 장제원 의원이 MBC 최승호 신임사장의 행보에 날을 세웠다. 지난 11일 장 의원은 최승호 사장이 인사를 단행하여 각지에 ‘유배’됐던 이들을 복귀시키는 한편 구 김장겸 사장 체제 하의 주요 보직자들을 물러나게 한 데 대하여 “가히 점령군답다. 블랙리스트가 작동하고 있나 보다”라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이 인사는 ‘피의 숙청’이요 ‘공포의 보도 개입’이며 ‘보도국 기자들을 입맛에 맞게 줄 세울 수 있는’ 만행(?)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실 어안이 벙벙하다. 지난 정권 내내 제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스케이트장으로 연수원으로 기타 등등으로 쫓겨간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요, 정권에 밉보인 나머지 아예 직장에서 목이 잘려 나간 사람도 지천인데 지금 누구의 입에서 ‘피의 숙청’ ‘공포의 보도 개입’ 류의 언사가 방출된단 말인가. 하물며 장제원 의원이라. 한때 “새로운 보수의 길로 가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가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뜁니다.”라며 기염을 토하다가 그 뜨거워진 심장이 식기도 전에 자유한국당으로 도로 날아온 철면(鐵面)의 철새 장제원이라니.

다시 한 번 여기까지만 해도 어금니 깨물고 혀를 차며 참아 줄 수 있다. ‘내로남불’ 즉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개념이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승화되고 있는 대한민국 아닌가. 더구나 정치인으로서 말도 안되는 말(言)도 말이 되는 말로 만드는 능력 또한 출중하실 것이니 한 귀로 흘릴지언정 다른 한 귀로 들어 줄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의 다음 행동에서 그만 필자는 파안대소(破顔大笑), 박장대소(拍掌大笑), 가가소소(呵呵笑笑),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합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글쎄 장제원 의원이 이육사의 시 <절정>을 비장하게 읊지 않았겠는가.

시인이자 명사수였던 독립운동가 이육사

내친김에 잠깐 이육사의 생애를 더듬어 보자. 많은 영화 속에서 시인은 대개 창백한 낯빛에 뿔테 안경을 쓰고 섬세한 성품에 쉽게 상처 받으며, 비쩍 곯아서 맨 날 줘 터지지만 깡다구는 있어서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그러다가 더 두들겨 맞는, 유약하지만 예민한 캐릭터로 그려질 때가 많다. 물론 시인도 사람 따라 개차반부터 성인군자까지 천차만별이겠지만 보통의 이미지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모든 법칙에 예외가 있듯, 이 판에 박힌 이미지를 벗어나는 시인도 있다. 바로 그가 이육사라는 사람이었다. 시인이면서 명사수였고 글쟁이이면서도 폭탄을 다루며 그 무섭다는 침투 훈련까지 마스터했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일본과 중국 유학 후 1927년에 귀국한 이원록은 조선은행 대구 지점을 날려 버리려던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1년 7개월의 첫 옥고를 치른다. 하지만 그가 이 의거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눈이 뒤집힌 일본 경찰이 그야말로 저인망으로 훑어서 감방에 처넣은 결과일 뿐, 재판에서도 나온 판결은 “혐의 없음”이었다. 그 뒤 신문기자로 활동하다가 《조선일보》에 처음 시를 발표하는데 이때만 해도 ‘이활’이라는 필명을 썼다. 그런데 광주학생운동의 후폭풍으로 일어난 대구 격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또 옥살이를 한다. 이 투옥 이후에야 그는 스스로를 이육사라 일컫기 시작한다.

이육사와 그의 시집

그의 수인번호 ‘264’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는 말이 정설로 여겨지지만 그 속내는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역사를 도륙낸다’는 뜻의 육사를 썼고 다음에는 ‘고기 먹고 설사한다’라는 뜻의 육사를 썼다. 전자가 자신이 겪어야 했던 현실에 대한 분노라면 후자는 ‘그래봐야 별 수 없다’는 냉소가 아니었을지. 그러다가 한 친지가 “역사를 도륙낸다는 건 혁명의 뜻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니 평평한 육지로 만든다는 이름을 써라”고 권유하면서 우리가 아는 그 육사로 스스로를 일컫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역사를 평탄케 하는’ 노력에 몸을 던진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쟎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 이육사 〈꽃〉중에서

 

그는 툰드라 속에서 제비 떼 오기만을 기다리는 시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단한 행동파였다. 그는 의열단원 윤세주의 주선으로 중국 난징으로 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다녔고 이때 사격술, 변장술 등 무장투쟁에 필요한 훈련까지 몸에 익혔다. 시와 글이 무기였던 그의 손은 방아쇠와 폭탄 던지기에도 익숙해졌다. 아울러 그는 오늘날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장제원이 들으면 기겁을 하고 눈을 시뻘겋게 뜨고 덤빌 만한 이념을 수용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1933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 1기 졸업기념 연극 <지하실>은 그야말로 사회주의 선전물 그 자체였다. 어디 그뿐인가. 의열단장 김원봉 앞에서 이육사는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나는 도회지 생활이 길어서 도회지인의 심리를 잘 이해하고 있으므로 도회지에 머물러 공작을 할 생각이다. 곧 도회지의 노동자층을 파고들어서 공산주의를 선전하여 노동자를 의식적으로 지도 교양하고, 학교에서 배운 중ㆍ한합작의 혁명공작을 실천에 옮겨 목적을 관철한다.” 
(<증인 이원록 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1) 

그것도 모자라서 육사는 한 수 더 뜬다. 청출어람인지 모르나 자신의 이념적 선배라 할 수 있을 김원봉에게도 그 불철저성을 근거로 날카로운 비판을 퍼부었던 것이다.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중국의 부르주아 계급과 야합하였고 사상이 애매하고 비계급적이다. 일국일당주의에 위반하고 조선인 자신이 조선의 혁명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혁명적 정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육사 평전>, 김희곤 저 , 푸른역사)

이는 ‘일국일당주의’를 내걸고 있던 코민테른 (Cominternㆍ제3인터내셔널)의 지령(?)을 철두철미하게 따른 관점이었다. 장제원 의원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물론 독립운동에 좌우가 있을 수 없고 공산주의든 민족주의든 무슨 ‘주의’가 되었든, 그 이념들은 조선 독립이라는 절대 과제를 위한 ‘도구’의 성격이 강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육사 역시 그런 분 중의 하나였다. 계속 궁금하다. 장제원 의원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걸 알고도 “빨갱이는 죽여도 돼” 방패를 든 일베 승려와 싱글거리며 사진 찍었던 MBC의 ‘뜻있는’ (장제원 의원의 표현) 기자들을 이육사의 시로 격려할 엄두를 냈을까?

'변절자' 처남을 용서 안했던 이육사가 '철새' 장제원을 봤다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울시가 '사회적 경제'라는 교과서를 만들어 초,중,고교에 배포된 경위를 사납게 따지며 이 교과서가 사회주의 편향적인 내용이 담겼다고 우기던, ‘사회’자만 들어가도 경기 일으키던 바로 그 장제원 의원이 한때 투철한 ‘빨갱이’였던 이육사의 과거를 알고도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를 읊었다면 우리는 그의 포용력을 인정해야 할까 아니면 갈피 잡히지 않는 혼미함에 당황해야 할까. 그래서 필자는 장제원 의원께 혹시 이육사의 과거를 아셨습니까 여쭙는 일이 두렵다. 만약 장제원 의원이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면 교육부총리 이하 교육감들을 찾아다니며 <광야>든 <청포도>든 이육사의 시를 다 빼 버리라고, 어떻게 빨갱이(?) 시가 자유대한의 아이들 교과서에 실릴 수 있느냐고 길길이 날뛰지 않겠는가 말이다.

한편 짧으나 불꽃같은 생을 살았던 저승의 육사가 자신의 시가 누구에 의해, 어떤 상황에서 비장하게 낭송되었는가를 안다면 무슨 심경이 들까도 궁금하다. 매국노 이완용이 <단심가>를 읊는 꼬라지를 목도하는 포은 정몽주 정도가 그 마음을 이해할까. 사회주의고 공산주의고 민족주의고를 떠나서 이육사는 자신의 모든 생애를 걸고 혹독한 제국주의의 ‘겨울’과 싸웠고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그러면 곧 일본도 끝장난다”고 되되며 <청포도>를 썼던 사람이었다. 그가 목놓아 바라던 해방된 나라에서, 해방으로부터 70년이나 더 흐른 뒤 벌어진 참혹한 국정농단과 부정부패의 아수라장을 굽어보았다면 그 가슴이 어땠을까. 그 시를 채 마저 읊조리지 못하고 울먹이지 않았을까. “아이야 우리 식탁엔......아이야 우리 식탁엔.......”

여기에 장제원이 유장하게 읊는 <절정>이 휘감아 돌면 육사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것 같다. 고문에 못 이겨 동지들의 이름을 불고 말았던 처남을 평생 용서하지 않았던 시인이자 투사이며 지사(志士)이자 혁명가였던 육사가 어떻게 그 상황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 모욕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 뒤틀림을 참아낼 수 있겠는가. 그를 상상하매 필자는 삼가 그의 시를 빌려 장제원에게 일갈하고픈 욕망을 누르기 어렵다. 먼 훗날 저승에서 육사에게 사죄하기로 하고 그의 시 광야(廣野)를 패러디하여 장제원 의원에게 헌정하기로 한다. 제목은 광야(狂夜), 즉 미친 밤. 

광야(狂夜) -김형민

까마득한 날에

촛불이 처음 켜지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빛들이

태양을 연모해 휘달릴 때도

능히 이 어둠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변함없는 흑암 속

부지런한 철새가 날았다 앉고

큰 돌대가리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제 눈 부시고

절망의 향기 벌써 아득하니

제원아 여기 쪼그라든 어둠의 씨를 말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유라가 있어

이 광야(狂夜)를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廣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켜지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廣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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