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8.01.0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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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 이어서>

영화 <1987>의 드라마 부분은 6월 10일 6월항쟁이 막을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후는 실사다. 전국적으로 펼쳐진 6월항쟁을 거쳐 6월 9일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의 장례식의 100만 인파에 이르는 장엄한 역사의 퍼레이드는 어느 드라마보다도 극적이고 어떤 시나리오보다도 감동적이다. 회사 후배가 영화를 보고 와서 물었다. “진짜로 저랬어요?” 대답은 간단했다. “영화보다 더했어.” 1987년 6월 대한민국이 내뿜었던 빛과 열기의 세계로 잠깐 돌아가보자.

모든 역량은 민정당 전당대회일 6월 10일에 집중

2부에서 얘기한 대로 1987년 5월 23일 종로에서는 결사적인 연와시위가 있었다. 학생들은 대오를 형성하여 행진하거나 경찰과 싸우는 대신 날 잡아가라는 듯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데모하는 사람도 울고 지켜보는 이들도 눈물 흘리며 발 동동 굴렀던 가두시위가 벌어지던 바로 그날 오전, 종로구 연지동의 기독교회관에는 기나긴 이름의 모임이 열렸다. ‘박종철군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범국민대회준비위원회’. 박형규 목사, 송건호, 성래운 등 쟁쟁한 재야인사 134명이 모여들어 결정한 것은 “온국민의 분노를 현 정권에 똑똑히 보여 주기 위해 오는 6월 10일 범국민규탄대회를 개최할 것을 선언”한다는 것이었다. 굳이 그날을 지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집권당이던 민주정의당의 전당대회 날이었던 것이다. 육사 11기 동기였던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가 ‘임무 교대’를 공표하는 잔칫날, 대놓고 재를 뿌리겠다는 의도였다.

영화 <1987>에서 재야인사 김정남의 은신처이자 감옥에 갇혀 있던 진실의 ‘뻐꾸기’가 함세웅 신부에게 넘어가던 곳은 ‘향림교회’다. 이는 ‘향린교회’를 살짝 비튼 것이다. 향린교회에서 함세웅 신부가 ‘뻐꾸기’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향린교회에서는 6월항쟁의 태동이라 할 사건이 벌어진다. 5월 27일 재야 인사와 단체들이 총집결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 단체는 그 후 6월 내내 6월 항쟁의 구심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래저래 6월 10일은 건곤일척, 불퇴전의 외나무다리가 돼 갔다. 운동권 학생들에게는 ‘가두투쟁 금지령’까지 내려졌다고 한다. 6월 10일을 위해 쓸데없는 ‘병력 손실’을 막자는 뜻이었다. 학교마다 교문 앞, 또는 광장 입구에 대문짝만한 숫자들이 날마다 교체됐다. “결전 5일전” “결전 4일전” 3일전..... 마침내 1일 전. 6월 9일.

다음날 행사가 열리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이미 경찰이 몇 겹을 둘러싸고 있었다. 일찌감치 들어가 있던 몇 몇 재야인사가 있어서 6.10 대회의 깃발이 가냘프게나마 오를 예정이었지만 경찰의 방패는 만리장성 같았고 방석모와 녹색 군복의 전경 6만명이 총동원됐다. 그 뿐이 아니었다. 정권은 해외 토픽에 넉넉히 실릴 기발한(?) ‘원천봉쇄’를 자행했다. 국민운동본부는 대중교통 운행자들에게 경음기 시위를 요청하고 있었는데 이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택시와 버스의 경음기를 빼 버렸다. 가슴에 검은 추모 리본을 다는 사람들은 ‘불법부착물’ 혐의로 잡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 뿐이면 말도 안한다. 교회와 사찰의 종을 치지 말아달라는 ‘협조 요청 공문’이 전국의 교회와 성당과 사찰에 날아갔다. 도심의 각급 학교에는 단축 수업이 실시됐고 도심의 고층 빌딩들에는 “학생들의 점거와 투신”을 예비한 대책 수립을 세우라고 아우성을 쳤다. 더할 나위 없이 찌질하고 그럴 수 없이 무식했던 정권.

6.10항쟁 전날, 이한열이 스러지다

서울 시내 거의 모든 대학에서는 6.10 대회 참가를 결의하고 기말고사를 거부하는 학생집회가 열렸다. 연세대학교에서도 그랬다.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2000여명의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학내 집회가 끝난 후 교문으로 진출했다. 그들 앞에 선 플래카드의 내용은 이랬다. “4천만이 단결했다. 군부독재 각오하라.” 당연히 최루탄이 터졌고 학생들은 학교 안으로 후퇴했다. 그런데 후퇴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한 학생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이한열을 도서관학과 학생 이종창이 부축하면서 처연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순간.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 로이터 통신 정태원 기자였다.

“경찰이 삼면에서 최루탄을 쏘자 학생들이 학교 안으로 도망쳤고 나도 학생들을 따라가면서 촬영을 했다. 뿌연 연기 사이로 한 학생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고 다른 학생이 그를 일으키고 있는 걸 찍었어. 부축하던 학생이 힘이 부쳤는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데려가는 모습까지 찍고 (회사로) 들어왔지.” 회사에는 이미 연세대생이 최루탄을 맞아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식이 전해져 있었고 확인 결과 ‘뇌사’ 상태였다. 로이터는 6월 9일 오후 6시 30분 연세대생 시위 도중 사망 소식을 사진과 함께 세계에 전달하게 된다.

이 사진이 국내 신문에 처음 실린 것은 중앙일보였다. 이창성 사진부장은 시원찮게 나온 중앙일보 기자들의 사진을 두고 고민하다가 로이터 통신에 사진 협조를 의뢰했고 표준렌즈로 찍은 작은 사진 하나를 받는다. 바로 이종창이 이한열을 부축하는 그 사진. 순간 이창성은 결단한다. “이 사진을 키워서 낸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보안대에 끌려가도 내가 끌려간다.” 그것은 기자의 근성이자 육감이었을 것이다. 이 사진 하나가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도 있다는. 다음 날 이한열의 사진은 중앙일보에 실렸고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들게 된다.

이한열의 소식이 전해지자 연세대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공수부대, 해병대를 위시하여 육군과 전경 출신의 예비역들이 군복을 입고 ‘전략적인’ 시위에 나섰고 여행 동아리, 종교 동아리 등 별반 운동권과 관계없던, 오히려 사이가 나쁘던 이들까지도 세브란스 병원에서 밤새 이한열의 시신을 지켰다. 6월 9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사람 가운데에는 내무부 장관 고건도 있었다. 참여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그는 치안의 책임자로서 6월 9일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치안본부에서 밤을 새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에게도 당연히 이한열의 소식은 전달되었을 것이다. 경찰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하필이면 이런 악재가 6.10을 앞두고.

한낮의 뜨거운 기운은 밤이 되어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되레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 내일 두고 보자.” 1987년 6월 대한민국에서 잠 못 이룬 사람들은 참으로 많았다. 다음날 대통령 후보가 될 꿈에 부풀어 있던 노태우부터 성공회 성당에서 안절부절하며 6월을 기다리던 사람들, 경향 각지 대학의 학생들, 세브란스 병원에서 한열아 한열아를 부르짖던 연세대 만화사랑 동아리 학생들, 혹여 내일 보안대에 끌려가더라도 의연해야지 다짐했을 중앙일보 사진부장, 내무부 장관 고건, 방패 부여잡고 밤을 지새던 전경들 모두 다.

하이힐, 넥타이부대가 동참하다

마침내 6월 10일이 밝았다. 이한열의 소식까지 전해들은 학생들은 전에 없던 규모로 몰려들었다. “하이힐에 양산 들고 주름치마 입은 여학생들까지 과 깃발을 찾아 스탠드를 뒤뚱거리면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며 뭔가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한양대학교 경우는 운동권과는 강 두어 개는 놓여 있었던 오케스트라가 운동가요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우는 바람에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 임종석을 포함한 운동권 문예패가 주눅이 들기도 했다. 학생들은 일찌감치 거리로 나갔다. 항쟁의 신호탄은 정부가 쏘아 올려 주게 돼 있었다. 오후 6시의 국기하기식에 방송되는 애국가가 신호였으니까. 마침내 애국가가 울려 퍼졌을 때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서울 거리는 요란한 클랙슨 소리로 뒤덮였다. 6월항쟁의 시작이었다. 영화 <1987>의 엔딩이다.

최루탄을 피해 달아다는 6월항쟁의 넥타이부대

2017년의 촛불시위는 서울 집중 양상이 두드러졌으나 1987년의 6월은 전국적이었다. 전국의 대도시에는 최루탄 가루가 함박눈처럼 내렸고 서로 다른 사투리를 쓰는 학생과 시민들의 목소리가 ‘독재타도 호헌철폐’로 모아져 전국에 메아리쳤다. 그 뒤 이어진 명동성당 농성과 전국 곳곳의 사연들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미 많은 이들의 경험담으로 전해지고 있고 동어반복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광주를 짓밟았던 전두환 정권은 왜 계엄령이나 기타 군사적 수단으로 항쟁에 대처하지 못했을까? 하는 질문을 해 온 후배가 있었다. 기실 그런 위기가 없지 않았다. 6월항쟁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는가.

역사에 가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만 IF라는 단어는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날 이랬다면 어땠을까, 이 날 그 사람이 이렇게 생각을 달리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6월 항쟁 가운데 가장 긴박했던 하루를 꼽으라면 6월 19일이었다.

1987년 6월 18일은 최루탄 추방대회 날이었다. 세계 언론은 이날을 기점으로 한국에서 뭔가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확신을 가지고 양미간을 좁히게 된다. 외신 기자들이 무더기로 건너와 호텔방을 동나게 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서울 신세계 백화점 앞 수십 명의 전경들이 수만 명의 시위대에 포위되어 무장 해제됐다. 방독면을 빼앗긴 채 자신들이 쏜 최루탄 연기 속을 눈물을 흘리며 걷는 전경들의 모습은 곧 공권력의 한계 상황을 웅변처럼 드러냈다. 그 가운데 핵심은 부산 시위였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 시위를 취재중인 외신 기자들

한 일본 기자는 부산 시위를 이렇게 특징지었다. "일단 오래 끈다. 시작하면 며칠 밤 새는 건 기본이다. 그리고 시민들이 격정적이다. 비가 오면 우산 쓰고 시위하고 옥상에서 구경하던 시민들이 경찰에게 물건을 집어던지면서 항의하기도 했다." 이 지구력과 격정성이 하이라이트에 달했던 것이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부산역 앞을 장악하고 있던 시위대가 새로운 목표물을 잡았다. KBS! 땡전뉴스의 본산, 어용 보도의 상징. 수만 명의 시위대는 밀물처럼 KBS를 향해 들이닥쳤다. 국가주요시설물인 KBS는 시위대에 완전히 포위됐다. 그때 그 안에 들어 있던 사람들의 심경은 어땠을까. 실로 궁금하다.

KBS를 지키던 것은 불과 경찰 6개 중대. 그들도 필사적으로 시위대를 막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전두환이 19일 치안본부장 염복경에게 전화해서 "막을 수 있겠나"라고 애타게 물은 것 역시 부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염복경에 따르면 그는 단호하게 막을 수 있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군 출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없어하면 군이 출동할 태세였다는 것. 염복경은 자신의 보고가 군 출동을 막았다고 믿고 있다.

1987년 6월항쟁의 상징적 사진 중 하나. 부산의 한 시위 참가자가 최루탄을 쏘지 말라려 경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실 18일 밤 부산 사태를 본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고명승에게 군 출동 준비령을 하달했다. 지역 사단으로 안되면 전방의 부대라도 빼라는 것이었다.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은 철도청에 군 수송 협조를 요청했고 이종구 2군 사령관도 부산과 마산에 출동할 채비를 마친다. 2010년 공개된 작전명령 제 87-4호 (군사2급비밀) 제하의 비밀 문건에 따르면 11군단장을 부산·경남 지구, 9군단장을 충남북 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이미 사실상 계엄 체제에 돌입하기 직전이었다.

계엄령 직전까지 갔던 1987년 6월

하지만 6월 19일을 넘기지 못하고 전두환의 군 동원 계획은 철회되고 만다. 이 결정에는 많은 '썰'들이 존재한다. 앞서 언급했듯 염복경 치안본부장은 자신의 결연한 보고가 군 출동을 막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특전사령관 민병돈에 따르면 자신이 주도하여 몇 명의 지휘관들이 출동에 강력히 반대했고, 그 반대의 배후에 "듣지 못할 말은 죽어도 안듣는" 자신이 있음을 안 전두환이 명령을 거둬들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작용을 한 것은 미국이지 싶다. 미국 CIA는 판세를 읽은 후 주한미군에서 탱크 5대를 지원받아 특전사, 수방사 등의 한국군 부대 정문 앞에 가서 고장이라도 난 듯 버티고 세워 놓았다고 한다. 즉 "나오지 마라"는 시위를 한 셈이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주한 미국 대사 릴리였다. 그는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력을 동원하지 마십시오... 레이건 대통령의 뜻을 거슬러 군대를 동원한다면 80년 광주에서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재발될 겁니다." 한 나라의 대사가 주재국의 대통령에게 할 소리 수준은 넘어 있었다. 하지만 릴리는 이 한 마디를 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군바리야. 정말 그러면 너도 죽어."

IF! 전두환이 그 특유의 고집을 부려 군대를 출동시켰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광주의 재판이 되어 시민들의 피로 얼룩진 거리를 청소하는 것으로 항쟁이 마무리되었을까. 이미 계엄령이든 위수령이든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목숨을 걸고 유서를 써 두며 시위에 나섰던 학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출동한 군인들은 총부리를 학생들에게만 겨누었을까. 과연 전두환은 살아서 청와대를 나올 수 있었을까. 88올림픽은 치러질 수 있었을까. 과연 지금까지 전두환이 29만원 재산으로 골프를 치고 경호를 받으며 호의호식하고 그 아들은 대한민국 유수의 출판재벌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 기억해야 할 것. 전두환이 또 한 번 계엄령을 내리고 군인들로 하여금 살육을 벌이지 못하게 발목을 잡았던 가장 큰 요인은 다름아닌 광주였다. 만약 1980년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권을 장악하던 당시 서울이나 기타 도시가 그랬던 것처럼 광주 역시 겁에 질려 양순히 계엄군을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전두환이 아무런 거침없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면 1987년 6월, 전두환은 또 한 번 거리낌없이 공수부대를 투입했을 것이다. 광주라는 역사적 경험이 전두환의 발목을 잡았다고나 할까. 광주의 피가 다른 도시의 피눈물을 막았다고나 할까. 끝내 1987년 6월 29일 독재정권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7년 전, 이한열의 고향 광주에서 속절없이 스러져 갔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한열 장례식에는 100만명의 인파가 모였다.

그렇게 뜨거웠던 87년 6월은 정권의 항복, 6.29 선언과 함께 저물었다. 그리고 6일 뒤 최루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 학생이 숨을 거두었다. 그 장례식은 1987년 6월의 하이라이트이자 에필로그였다. 100만 인파가 서울 시청 앞에 모여들었다. 노래와 구호, 색색의 만장이 어우러진 거대한 서사시가 펼쳐졌다. 사람들은 인근 건물들에게 조기 게양을 요구했다. 프라자 호텔이 조기를 걸었고 다른 곳들도 깃발들을 몇 뼘씩 내려 달았다. 서울시청은 고집스레 버텼지만 시민들이 몰려들어와 직접 조기를 내려 버렸다.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100만 인파 가운데 “청와대로 가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고 군중들은 이순신 동상 근처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전경들 앞으로 쇄도했다. 저 인파 앞에서는 전경이 아니라 군대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고 지켜보던 시민들이 중얼거리던 순간 수백 발의 다연발 최루탄, 속칭 ‘지랄탄’이 날았고 백만 인파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몇 천명의 숫자로도 곧잘 전경들을 무장 해제 시키는 전투력을 자랑하던 학생들이었건만 작정을 하고 덤벼드는 공권력 앞에서는 허무할 만큼 무기력했다.

찬란한 승리 6월항쟁, 그 뒤로 무엇이 바뀌었나

그보다 더 허무했던 일은 그 해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우습게도 전두환이 두리뭉실 정권을 넘겨 주려 했던 바로 그 사람, 전두환의 친구인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일이겠다.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 그 난리를 치고도 얻은 것은 쥐뿔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목숨 걸고 전두환 정권에 항거한 학생들에게 ‘정찰제’ 구형과 판결을 내리던 판검사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영감님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영화 <1987> 속에서 진실 편에 선 것으로 묘사되는 안유 보안계장은 6월항쟁 몇 년 뒤에도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전향을 강요하며 가혹행위를 불사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까지 운영됐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권인숙 성고문 사건을 조작했던 ‘관계기관대책회의’는 그 다음 정권 때에도 뻔질나게 열렸다. “뭐 쥐뿔이나 달라진 게 있어야지”라고 한 어느 시인의 절규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속을 상하게 했다.

6월항쟁은 분명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역사다. 수백만이 뒤엉켜 민주주의를 외치고 독재정권의 두 손을 들게 만든 그림 같은 드라마는 세계사적으로 희귀한 빛줄기를 뿜어낸다. 하지만 역사 속 여느 대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빛줄기의 끝에는 치명적인 한계와 뚜렷한 아쉬움이 그림자처럼 매달려 있다. 그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객관화라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휘황한 찬연함에 눈이 멀지 않고 그림자의 암울함에 눈 침침해지지 않는 노력. 영화 <1987>을 통해 과거를 추억하며 그때 그 젊음들의 죽음에 통곡할 수 있는 40~50대라면 오늘날 전철 스크린도어에서, 건설 현장에서, 배달 오토바이 위에서 목숨을 거는 젊은 청춘들의 아픔에도 공감하고 손을 마주잡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때 저 대열의 일원이었다며 자부하고 옛 전우(?)들 만나 술 한 잔 나누는 기쁨을 누린 이들이라면 젊은이들에게 막막한 세상을 만든 책임 또한 공유해야 할 터이다. 그럴 수 있을 때 1987년은 그 의미를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는 그런 장면이 나온다. 예루살렘을 목숨 걸고 지키던 십자군과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는 살라딘에게 기독교인 기사가 묻는다. “예루살렘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그러자 살라딘은 간단하게 대답한다. “Nothing." (아무것도 아니다.) 그로부터 몇 초 후 살라딘은 돌아서서 말한다. ”But everything" (전부이기도 하지) 따지고 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존재 자체로 가없이 소중하고 가슴이 뛰는 존재, 어쩌면 6월항쟁도 우리에게 그런 대상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영광으로만 남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으나 오늘날까지도 의미와 생명력이 간직되고 발휘된다면 엄청난 무게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어디 예루살렘 뿐이겠는가. 프랑스 혁명은 또 어떤가. 1789년 7월 14일 파리 민중들이 바스티유 요새를 습격했을 때 바스티유에 있었던 죄수는 단 7명, 사기꾼에 정신병자, 근친상간자 등이었다. 민중들이 수십 명 죽어가며 구출하고자 했던 정치범은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혁명은 수십 번의 배신과 그보다 더한 반동을 거쳤고 여러 명의 황제와 왕을 거치고서야 공화국에 이르렀으며 오늘날에도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잖은가. 따지고 보면 프랑스 혁명 별 것 아니었으나 전 세계 사람들 가운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의 1987도 그렇지 않을까. 낫씽 벗 에브리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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