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비트코인 히어로는 왜 '귀축'이라 불리나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8.02.08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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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일본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체크 열풍’의 주인공 와다 고이치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화제가 될 만 했다. 경쟁사인 비트플라이어를 이끌던 국제금융기업 모건스탠리 출신의 가노 유조보다 14살이나 어렸고(27세), 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문대 도쿄공대 재학 중에 세계 최대 레시피 사이트 쿡 패드(cookpad)가 주최한 어플리케이션 콘테스트에서 우승했다. 2012년 개발한 SNS 스토리즈가 상한가를 치던 순간 홀연히 학교를 떠난 점도 드라마틱했다. 하지만 새해를 맞이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코인체크의 서버가 해킹당하면서 그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26만 명의 피해 고객에게 총 462억 엔(약 5700억원)을 보상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코인체크 최고경영자 와다 고이치로(왼쪽)와 최고운영책임자 유스케 오츠카가 거래소 해킹에 대해 기자회견에서 설명하고 있다. 화면 캡처

정확한 보상시기도 밝히지 않았고 그가 실제로 얼마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게 다는 아니다.

‘비트코인 히어로’ 와다의 별명은 귀축

답은 일본 최대 검색엔진 야후재팬을 통해 간단히 찾을 수 있다. 검색창에 와다의 이름을 넣으면 경력, 자산 그리고 트위터라는 연관검색어가 뜬다. 이름과 더불어 그가 개발한 SNS인 스토리즈가 아니라 트위터가 등장하는 이유가 있다. “귀축(鬼畜)”이라는 단어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아귀와 축생을 아울러 이르는 이 말에는‘잔인하고 인정머리 없는 자’를 가리키는 비유적 의미가 있다. 

와다의 별멸은 귀축이다. 인정머리가 없다는 의미다.

 

네티즌들이 와다에게 이런 섬뜩한 닉네임을 붙인 것은 그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올린 두 개의 트윗 때문이다. 우선 2016년 7월 30일 오전 6시 57분, 도쿄도 시부야구에서 투고한 것으로 되어있는 첫 번째 트윗을 보자.

“도켄자카(道玄坂, 시부야 역 서쪽에 위치한 번화가)에 사람이 쓰러져있다 했더니 홈리스 아줌마였다... 걱정해서 손해 봤다.”

 

무더운 여름날 아침, 거리에 쓰러져있는 사람을 본 와다는 순간적으로 그의 상태를 걱정하지만, 이내 (정신적으로) 손해를 봤다고 푸념한다. 그에게 노숙인은‘사람’이 아니라서다.

다음으로 약 3주 뒤인 8월 21일 오후 10시 49분에 업데이트된 트윗을 보자.

“안전한 사무실 안에서 바깥의 곤란해 하는 사람을 보며 카이지 놀이를 하고 있다.”

 

일요일 밤, 와다는 사무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자신의 상황을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도박묵시록 카이지>에 빗댔다. 거액의 빚을 진 주인공이 악덕 금융업자의 주선으로 도박선을 타게 된다는 내용의 만화를 떠올리는 그에게, 거리의 사람들은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조연에 불과했다.

 

'자산가'와 '살인마'의 공통점은 약자 혐오

사적 공간의 특징을 가지지만 자칫 설화(舌禍)의 무대가 될 수 있는 SNS에서 약자에 대한 혐오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청년 사업가. 문득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와다가 첫 번째 트윗을 올리기 나흘 전인 7월 26일. 도쿄 근교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에서 일어난 참극이다. 새벽 2시경 지적장애인 복지시설에 잠입한 범인은 흉기로 19명을 살해하고 26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전후최악의 대량 살인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이 학살의 주범, 우에마쓰 사토시는 경찰의 조사에서 “장애인이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장애인 시설에 침입해 19명을 살해한 우에마쓰 사토시는 경찰에 검거된 이후에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우에마쓰와 와다의 사이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1990년생이며 수도권 공업 지역(사이타마현 이루마시와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1991년 3월부터 1993년 10월 사이, 일본경제는 1973년 12월부터 이어지던 비정상적인 활황기, 즉 버블의 붕괴와 함께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저성장 시대를 맞이한다. 경기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노동자들의 임금도 하향곡선을 그렸다. 가장 큰 충격은 국가가 다하지 못하는 사회보장의 기능을 기업이 나눠 부담함으로써 전후 일본 사회의 근간을 형성했던 종신고용이 무너진 것이다. 이른바‘구조개혁’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이 살던 도시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사가미하라가 내륙공업도시로 불리던 시절, 일본의 고도성장을 견인했던 대형공장들은 폐업을 면치 못했다. 일본 굴지의 공업지역인 무사시공업단지가 있는 이루마시라고 형편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거나 회사가 필요로 하는 동안에만 일하다 용도 폐기되는 불안정고용을 선택해야했다.

신자유주의라는 경제ㆍ사회적 변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변동을 촉발시킨 적자생존의 논리는 학교조차 소외와 갈등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일본에서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빈부차가 확대된 1990년대 후반은 교육현장에서 학원폭력이 급증했던 시기와도 겹친다. 사고력 향상과 경험을 중시하던 여유(ゆとり)교육도 ‘학력저하의 원인’으로 폄하되었다. 경쟁교육은 고이즈미 정권에서는 경제재정자문회의, 제1기 아베 정권의 교육재생회의를 통해 아이들을 덮쳤다.

우에마쓰는 잃어버린 20년을 전후한 시기를 철저한 패배자로 살았다. 비명문고에 비명문대에 출신으로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다 결국 끔찍한 범죄의 주인공이 되었다. 와다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불의의 사고로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한때 일본의 블록체인기술 발전을 주도했던 기업의 CEO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를 출세가도에 올려놓은 스토리즈의 논픽션 콘텐츠 제목이 “학년 꼴찌 소녀가 1년에 편차치 40을 올려 게이오대에 현역 합격한 이야기”임을 상기해보더라도 자신이 ‘승자그룹’에 속한다는 와다의 자기 확신은 단 한 순간도 흔들린 적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결국 강자를 동경하는 만큼 약자를 혐오하는 본질을 가진 동전의 양면에 불과했다. 다만 그 가치관의 실현을 위한 방법이 달랐을 뿐.

IMF 외환위기 이후 온 나라의 가치기준이 돈을 중심으로 재편되던 기간 동안 태어나 성장한 아이들이 20대가 되어있는 있는 요즈음, 우리 사회가 눈여겨 봐야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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