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고의4구'가 경기시간 단축시킬 순 없겠지만…

  • 기자명 최민규
  • 기사승인 2018.03.09 02:3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메이저리그는 지난 시즌부터 자동 고의4구 제도를 도입했다. 고의4구는 투수가 타자와 승부하지 않고 치지 못할 코스로 볼을 네 개 던져 1루를 밟게 하는 플레이다. 주로 점수 차가 적은 접전에서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있지만 1루가 비어 있을 때 시도된다.

타석에 엄청난 강타자가 있다면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드물게 고의4구가 나온다.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에선 모두 10차례 이런 고의4구가 나왔다. 10번 중 4번은 통산 고의4구 1위(688개) 배리 본즈가 기록했다. 본즈는 1998년 5월 25일 주자 만루에서 고의4구를 얻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딱 6번만 나온 기록이다.

어떤 경우든 투수는 고의4구를 위해 최소 공 4개를 던져야 했다. 하지만 바뀐 규칙에서는 감독이 수신호로 심판에게 고의4구 사인을 내면 타자는 곧바로 1루로 걸어나갈 수 있다. ‘4구’지만 투수에겐 투구 수가 기록되지 않는다. 한국야구위원회(KBO)도 지난 5일 규칙위원회를 열고 2018년 시즌부터 자동 고의4구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일본프로야구(NPB)는 이에 앞선 지난 1월 같은 결정을 했다. 취지는 경기 시간 단축이다.

고의4구 규칙 변경에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세 나라 모두 마찬가지다. 고의4구를 위해 멀리 던진 공을 타자가 펄쩍 뛰다시피하며 배트를 휘둘러 안타를 만들거나, 고의4구가 폭투가 돼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는 진귀한 장면은 이제 볼 수 없다. 

무엇보다 룰 개정으로 얻는 시간 단축 효과가 적다.

2015년 5월 14일 잠실구장에서 NC 투수 이민호는 8회말 LG 이병규를 고의4구로 걸려 보냈다. 이민호가 이병규에게 첫 볼을 던지고 다음 타자 잭 핸너핸에게 초구를 던지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딱 40초였다. 지난해 KBO리그 전체 720경기에서 고의4구는 185회만 기록됐다. 경기당 0.26개다. 즉 규정 변경으로 단축되는 시간은 리그 전체로 2시간 3분, 경기당으론 10.3초에 불과하다. 실익이 없다.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 결승 한일전에서 8회말 김재박이 고의4구에 대응해 '개구리 번트'를 했다.

한 분석에 따르면 KBO리그에서 경기 시간이 늘어나는 가장 큰 원인은 투수들의 투구 간격이 길기 때문이다. 투수와 타자 모두 공을 던지거나 칠 준비를 하는 데 있어 메이저리그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벤치에서 작전 사인도 많이 나온다. 고의4구는 큰 변수가 되지 못한다. 워싱턴포스트는 메이저리그가 기존 ‘4구 고의4구’를 폐지한 직후 이를 비판하는 분석 기사를 실었다. 제목은 “고의4구를 죽인 메이저리그, 전통을 잃고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였다.

물론 스포츠 팬들이 현장이나 TV 중계에서 느끼는 속도감은 물리적인 시간과는 다소 다르다. 잘 만든 러닝 타임 세 시간 영화는 못 만든 한 시간짜리 영화보다 훨씬 덜 지루하다. 그리고 고의4구가 나오는 상황은 대체로 관객들의 몰입도가 높아지는 ‘승부처’다. MBC SPORTS+는 지난해 자동 고의4구 룰이 적용된 메이저리그 경기를 중계했다. 송재우 해설위원은 “공 네 개를 던지지 않고 바로 다음 타자로 이어지니 몰입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임영환 PD는 “제작자 입장에선 고의4구 상황에서 투수와 타자의 표정, 긴장한 대기 타석 타자의 눈길 등 시청자들에게 흥미를 줄 수 있는 요소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긍정론과 부정론이 섞여 있다.

자동 고의4구로 메이저리그나 KBO리그가 얻을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잃을 것도 많지 않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나가시마 시게오는 1960년 한 시즌에 세 번 고의4구를 노리고 던진 공을 때려 안타로 만들었다. 나가시마의 기록이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는 ‘세 번’이나 해냈기 때문이다. 배리 본즈의 만루 고의4구처럼 한 시즌에 한 번도 일어나기 어려운 플레이다. 야구의 ‘재미’에서 매우 부차적이다.

‘얻을 것이 많지 않은데 왜 바꿔야 하는가’와 ‘잃을 것이 많지 않은데 왜 바꾸지 못하는가’라는 입장 중 어느 편이 맞는지를 판단하는 건 늘 쉽지 않은 일이다. 스포츠의 중요한 본질은 규칙의 존중이며, 그래서 선수나 지도자 뿐 아니라 팬과 언론도 규칙 변경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금은 야구의 전통으로 받아들여지는 고의4구는 원래 야구에서 환영받지 못한 플레이였다. 포수는 투수가 공을 던질 때까지 캐처스 박스 안에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 지금 캐처스 박스는 4각형이지만 1919년 이전에는 아랫변이 긴 삼각형이었다. 면적은 현재보다 훨씬 넓었다. 포수는 강한 타자가 나오면 삼각형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타자가 칠 수 없는 코스로 공을 요구해 볼넷으로 걸리곤 했다.

피터 모리스의 저서 <A Game of Inches>에는 1910년대 고의4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소개된다. 1913년 아메리칸리그 회장 밴 존슨은 고의4구에 대해 “야구에서 가장 인기없는 플레이”라며 이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 겸 선수 휴이 제닝스는 1914년 경원구에 대처하기 위해 타자가 타석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1916년 저널리스트 윌리엄 피트는 고의4구가 나오면 타자와 주자에게 2베이스 진루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20년 메이저리그는 실제로 고의4구 자체를 금지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의견이 엇갈려 금지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 캐처스 박스가 오늘날과 같은 모양으로 축소되고 고의4구 때 포수는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까지 캐처스 박스에 머물러야 한다는 현행 규칙이 확립됐다. 1920년 이후에도 고의4구를 금지하거나, 타자나 주자에게 어드밴티지를 줘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건 여러 차례다.

당시 ‘고의4구가 야구를 망친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아마 지금 ‘전통주의자’의 고의4구 옹호론에 당혹스러울 것이다.

자동 고의4구 자체는 경기 속도를 크게 줄이지 못한다. 하지만 당초 메이저리그 커미셔너 사무국의 계획에서 고의4구는 스피드업을 위한 여러 조치 가운데 일부였다. 투구 인터벌 축소, 감독, 코치의 마운드 방문 제한, 스트라이크존 상향 등이 사무국이 갖고 있는 방안이다. 그러나 경기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 선수노조는 이에 반대하고 있다. 롭 만프레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지난해 2월 선수노조의 소극적인 자세를 비난하기도 했다.

강준호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스포츠 산업’이라는 용어를 ‘스포츠 시장’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업자들이 모인 스포츠를 조선 산업이나 자동차 산업과 같이 분류하기는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강 교수는 스포츠 시장은 본원 시장과 파생 시장으로 나눈다. 프로야구에서라면 유료경기가 본원시장에 포함되며 여기에서 중계권, 구장 시설, 용품, 정보, 관광 등 파생시장이 형성된다.

본원시장이 활성화되면 파생시장은 더 큰 규모로 성장하는 게 스포츠 시장의 특징이다. 강 교수의 집계에 따르면 여자프로골프 KLPGA의 2014년 본원시장(입장료) 규모는 15억이었지만 파생시장 규모는 그 57배인 882억원이었다.

강 교수는 “최근까지 문화체육관광부는 용품제조업의 성장에 방점을 뒀다. 하지만 용품업은 본원 시장, 즉 경기를 관람하거나 직접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성장한다. 본원 시장 기반이 약한데 파생 시장을 지원하는 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르면 프로야구에서도 본원시장이 형성되는 경기장에서 더 재미있고 팬들을 즐겁게 하는 경기가 펼쳐지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