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가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로 평가했다?

  • 기자명 최민규
  • 기사승인 2018.03.18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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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등 포털사이트 뉴스란에는 3월 17일 동아일보가 송고한 ‘[단독확인] 바그다드 함락 미 3사단, 한국 배치 완료’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 하단에서는 신동아 4월호에 출고된 외부 기고자의 기고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천재이거나 공산주의자” 영국 BBC 방송은 2월 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회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21세기 정치 도박(The political gamble of the 21st Century)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이어 북·미 대화를 중재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외교의 천재이거나 자신의 나라를 파괴하는 공산주의자 중 하나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의 북미 중재 노력이 실패하면 다시 벼랑 끝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전망도 뒤따랐다.

 

BBC 기사 '트럼프와 북한 대화: 21세기 정치적 도박" 캡쳐

이 기사가 인용한 BBC의 기사는 현지 시간 3월 9일에 자사 홈페이지에 게재됐다. 조선일보는 3월 12일 파리발 기사에서 이 기사를 인용하며 "BBC는 문 대통령에 대해 '외교의 천재' 또는 '나라를 파괴하는 공산주의자'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고 보도했다. 뉴데일리뉴스타운 등 극우보수매체도 BBC가 문 대통령이 공산주의자일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대한애국당은 '문재인 정권의 북한이용하기 음모를 경계한다' 논평에서 이 내용을 인용했다.

하지만 BBC가 문재인 대통령을 “천재이거나 공산주의자”로 ‘평가’했다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는 문장은 오역에 가깝다. 원본인 BBC 기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South Korean leader Moon Jae-in is either a diplomatic genius or a communist set on destroying his country and US President Donald Trump is either a master of brinkmanship or a pawn in a more devious game.

남한의 리더인 문재인은 외교적인 천재이거나, 자기 나라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자 둘 중 하나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벼랑끝 전술의 달인, 아니면 훨씬 기만적인 게임의 졸(卒)이다.

‘devious game’까지만 읽으면 문재인과 트럼프, 두 대통령에 대한 서술은 BBC의 평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사의 리드문인 이 문장은 몇 단어가 더 붙어서 끝난다. 

- depending on who you speak to.

“depending on who you speak to”, 즉, “누구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문재인과 트럼프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는 의미다. who 대신 whom을 쓰는 게 문법에 맞지만 현대 영어에서는 목적격인 whom 자리에 주격 who가 자주 쓰인다. 즉, ‘천재 아니면 공산주의자’, ‘달인 아니면 졸’은 BBC의 평가가 아니라 독자(you)와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누군가(who)가 하는 얘기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이 특사로 파견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백악관에서 만나 북미정상회담을 수락한 날짜는 한국시간 3월 9일. BBC의 로라 비커가 작성한 이 기사는 정 실장의 백악관 브리핑 직후 작성됐다. 북미정상회담을 ‘21세기의 정치 도박’으로 표현하며 현재 상황과 전망을 다룬다. 결론은 대타협이 이뤄질 수도 있지만, 다시 벼랑끝 상황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리스크가 큰 게임이라는 것이다.

남한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라는 ‘평가’를 하는 근거나 분석은 기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천재 아니면 공산주의자’라는 표현의 발화자는 BBC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 대통령 모두 자국 내 지지자와 반대자 그룹으로부터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결과가 극단적으로 갈라질 수 있는 ‘도박’에 나서야 한다. ‘천재 아니면 공산주의자’, ‘달인 아니면 졸’은 현재와 미래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해야 한다.

기사를 작성한 로라 비커 BBC 한국 특파원은 한국 언론의 오역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그는 18일 오후 본인의 트위터에 정중하게 한국언론에 제대로 자신의 기사를 번역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자신의 기사가 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며 이는 우익 역사학자가 말한 것을 인용한 것이라고 확인했다.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18대 대선 직후인 2013년 1월 “문재인 후보는 공산주의자”라고 발언했고, 현재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그는 지난해 공판에서도 같은 발언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로 호명하고 싶은 이들은 고 전 이사장 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편견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외국 유명 방송사의 보도를 오역하는 건 비커 특파원의 표현대로 공정(Fair)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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