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은 체임벌린이 아니고, 홍준표는 처칠과 다르다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8.05.08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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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 던져지면 웬만한 사람들은 제꺽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다.” 유명한 E.H. 카의 명제다. 다양한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필자는 ‘대화’(dialogue)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대화란 대등한 입장에서 주고받는 것이다. 즉 일방적인 교육이나 설득이 아니다. “역사로부터 배우라”는 근엄한 충고가 난무하고, 현재의 필요에 의해 즐겨 과거가 호출되는 현상은 카의 뜻과는 다소 어긋나 있다.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결코 일방적인 과정일 수 없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양자를 더 깊게 이해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중)

과거를 거울 삼아 오늘을 비추는 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카 역시 “역사는 교훈을 제시한다. 또 역사적 인물의 개성이나 특수한 사건은 그 다음에 벌어지는 사건에 뭔가 영향을 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교훈이 수학 공식은 아니며 현재를 과거에 대입하는 것은 전혀 엉뚱한 답을 낳을 수가 있다는 것이겠다.

실제로 E.H. 카는 러시아 혁명 후 러시아 혁명가들이 ‘역사로부터 배운’ 사례를 들고 있다. 인터내셔널가(歌)와 더불어 프랑스 국가이기도 한 라 마르세예즈를 러시아 말로 바꿔 불렀던 이 혁명가들은 프랑스 혁명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혁명 후 출현한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의 재현을 경계했다. 이 역사로부터의 ‘교훈’은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세운 또 하나의 천재 레온 트로츠키를 제치고 별 업적도 없고 공훈도 그리 두드러지지 않은 스탈린을 선택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된다. ‘나폴레옹을 경계하다가 스탈린 만난’ 소련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렇듯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칼에 꿀을 묻혀 먹는 일이랄까. 조심스레 핥으면 몸에도 좋고 입에도 달지 모르나 자칫하다가는 혓바닥에 피가 홍건해질 수도 있다. 요즘 저승에서 귀가 따가울 양반으로 제 2차 세계대전 직전의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 (1869~1940)을 들 수 있겠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과의 화해 무드가 그야말로 봄 벚꽃 피듯 단번에 세상을 뒤덮는 상황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에게 넘어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는 뮌헨 협정(1938.9.30)에 체결한 뒤 “명예로운 평화가 독일로부터 왔으며 우리 시대는 평화로울 것”이라고 선언하던 모습을 과거로부터 끌어내 오늘과 비교해 보려는 분들이 많은 탓이다. 그분들은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 정책이 결국 2차대전을 불러 왔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뮌헨 협정 당시 처칠에 빙의되기도 한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왼쪽)이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오른쪽)와 악수하고 있다.

 

윈스턴 처칠은 체임벌린의 평화 선언에 반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목전에 엄청난 재앙이 닥쳐 왔다.” 언뜻 생각하면 체임벌린의 유화책에 전쟁의 책임을 돌리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무력을 동원하여 독일을 쳐부수었다면 수천만의 목숨은 온전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히틀러의 허풍 (체코의 주데텐란트에서 독일인들이 대량학살되었다던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제대로 된 협상 준비조차 하지 않았던 만큼 체임벌린의 실책은 적지 않다. 그 약점을 알아본 히틀러는 이렇게 새빨간 기염을 토했다. “마지막 영토권 주장이자 물러설 수 없는 요구”

그런데 과연 체임벌린의 유화책이 세계대전의 참극을 가져온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역사에 가정은 없거니와 굳이 가정법을 써 본다 해도 사실이 아니다. 독일 유화책은 전쟁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영국은 급부상한 독일의 군사력에 맞설 채비가 돼 있지 않았다. 대공황 이후 영국 경제는 휘청거리고 있었다. 최악의 골칫거리는 실업률이었는데 1931년에 270만명에 이르렀고 그 수효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체코 위기에 대처하면서 비로소 영국은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할 수 있었다. 훈련된 병사의 수는 독일이 월등했고 공군력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를 압도했다. 1930년대 말을 기준으로 독일군 전투기는 5638대, 영국은 1070대, 프랑스는 1562대였다. 단순한 산술적 우위가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 공군 조종사들은 서투르기 이를데 없었으나 독일 공군은 잘 훈련돼 있었고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가 증명하듯 스페인 내전에서 실전 전투와 폭격 경험을 지녔으며 영국을 직접 폭격할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까지 운용 중이었다. (전쟁의 물리학, 배리 파커 지음, 북로드)

또 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 공군이 영국을 공략했던 ‘영국대전투’ 때 영국군의 생명줄과도 같았던 레이더망은 구축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이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시작되지 않고 1938년 9월 30일 뮌헨협정 파기와 함께 발발했다면 ‘연합군’은 독일을 응징하고 히틀러를 처단하기는커녕 기갑사단과 공군을 활용한 독일의 전격전에 붕괴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처칠의 날선 말처럼 체임벌린이 번 (또는 낭비한) 1년이 “사악한 자의 악의가 선한 자의 정당함 때문에 강화된” 기간일 수도 있으나 강화된 것은 오히려 독일이 아니라 영국 쪽이었다는 얘기다.

히틀러와 뮌헨 협정을 맺고 영국으로 돌아온 체임벌린 총리가 국민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 상황을 과연 오늘날의 북한 문제에 적용시킬 수 있을까? 북한의 전력이 현재 한미동맹을 압도하고 있는가? 북한이 한국에 영토적 야욕을 발휘할 역량은 대관절 소유하고 있는가? 북한을 나찌 독일에, 남한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입하는 것이 당최 가능한 공식인가? 체임벌린이 저승에서 듣다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내 실책이 컸어도 그렇지, 도대체 어디다 어딜 갖다 대는 것이냐.” 역사는 방대하고 또 다양하다. 그리고 교훈은 천지사방에 널려 있다. 우리는 역사에서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풀이하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다. E.H.카에 따르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과거를 사랑하지도 말고 과거로부터 벗어나지도 말고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통제하고(master) 이해 (understand)”해야 한다. 단편적인 사실 하나를 가져와서 이것이 답이라고 부르짖는 것은 중학생 시절의 오답노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며칠 전 자유한국당의 대표께서 “처칠의 혜안으로 자유대한을 지키겠다”고 준엄하게 말씀하시었다. 필시 체임벌린 이후 등장하여 전쟁을 이끈 윈스턴 처칠을 염두에 둔 말씀이겠다. 물론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상륙지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들판에서 싸우고 시가에서도 싸울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고 부르짖는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윈스턴 처칠 (게리 올드만 분)은 멋있기 그지없다. 그러나 생전의 윈스턴 처칠은 딱 한 단어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불 같이 화를 내거나 입을 다물거나 둘 중 하나였다. 바로 ‘갈리폴리’다. 

갈리폴리는 터키의 다르다넬스 해협 근처의 반도 이름이다. 제 1차 세계 대전 중 오스만 투르크는 독일 편에 섰다. 수 세기 동안 치열하게 싸웠던 러시아가 독일군한테 박살이 나는 풍경은 투르크 인들의 체증을 내려가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독일 군사 고문단이 투르크로 와서 투르크 군단을 훈련시키는 등 독일과 투르크간의 유대가 강화되자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군쪽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차제에 터키를 미리 밟아 버리자는 의견이 제시됐고 그 선봉이 바로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이었다. “러시아와의 연결 통로인 다이다넬스 해협을 확보합시다. 갈리폴리에 군대를 상륙시켜서 해안가 쓸어 버리고 이스탄불까지 밀어부칩시다.” 이미 독일 고문단의 지휘 하에 철저한 요새화가 이뤄져 있던 갈리폴리에 군대를 상륙시키자는 주장. 육군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해군 지중해 함대 사령관까지도 고개를 내젓는 무리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처칠은 막무가내였다. 

1915년 3월 처칠은 해군 단독으로라도 갈리폴리를 박살내겠다고 함대를 몰아간다. 그러나 해안에 깔린 기뢰와 해안 포대와의 전투 과정에서 전함 3척과 다수의 순양함을 잃는 피해를 입는다.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연합군단, 즉 안작(Anzac) 군단이 상륙 작전을 전개하지만 투르크군의 결사적인 항전 속에 무려 25만 명 (투르크군은 15만명) 이라는 기록적인 피해를 입고 물러서게 된다. 당연히 처칠은 해군 장관에서 잘렸고 이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이 오스만제국을 정벌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의 작은 만에 상륙했다. 이곳은 이후 안작만(Anzac cove)으로 불리게 된다. 영국 해군장관 처칠이 이끈 이 전투로 연합군 수십만명이 사망했다. 출처: wuwm.com

‘있을 수 있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선빵’을 날렸다가 전력을 형편없이 열세일지언정 고슴도치같이 가시를 내밀고 결사적으로 맞선 상대와 피차 참혹한 꼴을 보고 아무 소득도 없이, 수십만의 목숨만 하릴없이 내버린 사례 또한 역사는 보여 주고 있다.

행여 자유한국당의 대표께서 빌려오겠다는 ‘처칠의 혜안’이 갈리폴리 전투 당시 위풍당당한 대영제국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의 것은 아니기를 바라지만, 왠지 21세기 한국 야당 대표의 열변을 보고 있노라면 1939년 이후의 수상 윈스턴 처칠보다는 1915년 다르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로 진군하라고 부르짖는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이 오버랩되어 마음이 쓰리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것은 지극히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수미쌍관으로 말하되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다. 현재의 필요에 의해 과거의 일부만 부각시키는 것은 대화가 아니며 필요에 따라 편집되고 의도에 따라 맥락이 생략된 ‘교훈’은 재앙을 불러들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역사와 대화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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