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북한군이 잠입했다'는 주장은 왜 거짓인가

  • 기자명 최윤수
  • 기사승인 2018.05.21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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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광주로부터 38년이 지났다. 그러나 발포명령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밝혀지지 않았고,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암매장됐다는 의혹 등은 해명되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용기로 계엄군이 여성들을 끌고 가 집단강간하고, 시위에 참여한 여성을 성고문 했다는 참혹한 사실은 이제야 드러났다. 하지만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했었다면서 피해자들을 빨갱이 취급하고, 계엄군 진압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 날 광주에 북한군이 있었을까.

우선 시스템클럽 운영자 지만원은 '탈북자들의 수기에 의하면 김대중은 김일성과 짜고 북한특수군을 광주로 보냈다 합니다. 이들에 의해 광주시민들이 학살을 당했지요. 5000년 역사에 이 인간 이상으로 악한 존재는 없습니다'라는 글을 게시하였다가 공연히 허위 사실을 적시하여 사자(死者)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이유로 2013. 11. 14. 징역 5월, 집행유예 2년의 유죄판결(대법원 2013도6326)이 확정됐다. 즉, 지만원은 아예 광주 시민을 학살한 주체가 계엄군이 아니라 김대중과 내통한 북한군이라는 주장을 했다가 허위 사실이라고 처벌된 것이다.

지만원은 이후로도 북한 주민의 사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촬영된 사진 속 시민을 대조하여 닮은 광주 시민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라고 지목하거나 '광주에 파견된 북한특수군'이라고 주장하고, "정의와 평화를 앞에 내건 광주 신부들이 북한의 정치공작원들과 공모했다"고 비방하여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사자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지만원씨는 북한군 침투설 유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지속적으로 방송에 나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뉴데일리TV 캡쳐.

이미 북한군 침투설이 허위사실로 판결되었음에도 전두환은 2017년 4월 발간한 회고록에서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반란이자 폭동이라고 표현해 2017년 8월 4일 출판 및 배포금지가처분결정(광주지방법원 2017카합50236)을 받았다. 전두환은 가처분결정에 항고하지 않고 회고록 중 문제된 부분을 검게 칠해 재발간했으나, 2018년 5월 여전히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여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2차 출판 및 배포금지가처분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전두환 측은 가처분결정이 비민주적이라며 반발하고 여전히 북한군 개입설을 언급했다. 민정기 전 전두환 비서관은 5월 17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탈북군인의 증언이 있어 그 얘기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고, 지만원의 주장을 진실이라고 판정할 근거는 없지만 그런 논란이 있다는 걸 소개했다고 일견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북한군 침투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면서 5.18 당시에도 북한 간첩의 무선통신이 이미 다 포착되어 수사, 재판 과정에서 다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2016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북한군 개입 금시초문"

전두환은 5.18 당시 보안사령관이었고, 1980년 9월 1일부터 1988년 2월 24일까지 제11, 12대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즉, 당시 모든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는데, 2016년 5월자 <신동아>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5.18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보고를 받은 적이 전혀 없고, 인터뷰 당시에 북한군 600명이 광주에 침투했다는 지만원의 주장을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확인한 당시 동아일보에 의하면, 1980년 5월 22일 1면으로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면서 전남대 학생들을 필두로한 시위에 시민들이 결합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하였을 뿐 북한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1980년 5월 24일에는 해럴드 브라운 미 국방장관이 북한이 대남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조짐은 없으나 미 당국은 한국 내의 대규모 소요사태와 북한 측의 오랜 대남적대 입장 때문에 조심하고 있다고 한 발언이 보도되었고, 북괴간첩 이창용이 광주에 잠입하려는 것을 검거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 진압 후 계엄사가 한 2차례 발표에도 북한군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간첩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한 광주에 600명의 북한군이 아무런 저항 없이 침투해서 시민을 살해하고 흔적도 없이 북으로 돌아갔다는 주장은 믿기지 않는다.

전두환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85년 6월경 5·18 진상규명 대책기구로 이른바 '80위원회'가 만들어져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왜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80위원회의 문건에도 북한군은 등장하지 않는다.

정말 광주에 북한군이 침투했다면, 계엄군의 진압은 정당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를 입증하여 가장 이득을 얻는 사람은 전두환 본인이다. 특히 전두환은 1995년경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군을 통해 시위를 진압하였다는 이유로 내란수괴죄로 기소되었으므로, 북한군의 침투를 입증한다면 무죄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재판에서 광주교도소를 시위대로부터 방어한 부분은 정당행위로 인정되었다.

1980년 북한 남침 위험없어 5.17 비상계엄은 불법 판결

전두환이 정확히 어떤 변호를 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서울고등법원 96노1892 판결에 의하면, 전두환은 5.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할 당시 남침의 위협이 있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1980년 1월부터 6월 사이에 북한이 소수의 간첩을 10여 회 남파하여 육상 또는 해상으로 침투시켰고, 1980년 5월 초 김영선 당시 중앙정보부 제2차장이 전두환을 찾아와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들어온 첩보라고 하면서 북괴의 남침위협에 관한 첩보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침투한 간첩들은 조기에 섬멸되거나 다시 북상 도주하였고, 일본내각조사실의 첩보에 대하여는 1980년 5월 11일 육본 정보참모부에서 분석한 결과 "북괴의 군사동향은 정상적인 활동수준으로서 특이한 전쟁징후는 없고 5월 남침설과 전방 병력 배치완료설은 그 신빙도가 희박하며 이는 우리의 국내정세 추이에 따른 북괴 남침방책의 일반적 가능성을 추측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결론을 내렸으므로,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할 사유가 없었다고 인정했다. 더구나 판결에 설시된 피고인의 주장에는 당시 광주에서 간첩 또는 북한군을 진압했기 때문에 내란이 아니라는 내용이 없다.

1979년 11월 6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 전모'를 발표중인 전두환 보안사령관.

민정기 전 비서관은 수사, 재판 과정에서 북한군 개입의 근거가 될 판단이 있었던 것처럼 주장하지만, 오히려 재판에서 인정된 것은 1980년 5월 당시 북괴의 남침 위험이 없었기 때문에 5.17 비상계엄 확대가 위법하다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1980년부터 1988년 초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자기가 단 한 번도 보고 받지 못한 북한군 침투설에 대해 그것도 이미 판결에서 허위로 밝혀진 지만원의 주장을 진실이라고 판정할 근거도 없이 인용했다는 것 자체가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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