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환의 역사 팩트체크] 실록으로 본 측우기
해마다 5월 19일은 발명의 날이다. 발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발명 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1957년 상공부고시 제256호로 공포하였다. 그런데 1년 365일 가운데 5월 19일을 발명의 날로 지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날이 바로 1441년에 장영실이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든 날이기 때문이다. 장영실이 만든 측우기는 1639년 이탈리아 카스텔리의 우량계보다 198년이나 앞선다. 장영실은 측우기뿐만 아니라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등 많은 것을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장영실을 조선의 발명왕으로 기억한다. 다음백과사전은 장영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장영실은 본디 노비였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항주 출신의 귀화인으로 천인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동래현의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엄격한 신분사회였고, 일천즉천, 즉 부모 중 한 쪽이 천민이면 자식도 천민이다.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도 장영실은 동래현의 병기 창고에서 일하면서 낡고 못쓰게 된 병장기를 손질하면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고, 그 결과 관상감 출신의 남양 부사 윤사웅의 추천으로 한양에 올라와 궁중에서 일하게 되었다.
장영실의 재능을 높이 산 것은 세종이었고, 장영실이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을 때, 출신이 미천하여 불가하다는 신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장영실에게 종4품의 높은 벼슬을 제수한다.
원칙을 깨고 장영실에게 높은 벼슬을 준 세종의 일화는 세종이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인용됨으로써, 그가 훈민정음의 창제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길 수 있는 리더십의 소유자였음을 웅변한다. 후에 장영실은 종3품 대호군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그런데 위 기사에서 지나쳐서는 안 될 내용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세종의 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격루를 만든 것은 장영실이 분명하지만,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바로 세종이었다. 이러한 기록은 또 있다.
위 기록에 따르면 세종대에 만들어진 과학적 창작물들의 많은 것이 장영실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실제 그런 창작물들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제작을 기획하고, 제작 원리 및 방법 등에 이르는 온갖 아이디어는 세종의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최고의 과학자였던 세종이 자신의 구상을 장영실로 하여금 실현케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서거정의 수필집 「필원잡기」에도 다음과 기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