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7명 사망, 양승태 대법원은 왜 판결을 미뤘나

  • 기자명 최윤수
  • 기사승인 2018.06.05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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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3차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법원행정처 시○○ 심의관은 2015년 3월 26일 임종헌 기조실장의 지시를 받아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전략”이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상고법원 도입의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반드시 청와대의 협조를 얻어 내야 하는데, 우병우 민정수석을 직접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회 전략으로 비서실장, 특보를 설득, 활용하자는 취지였다. 

박근혜 정부, 강제징용 재판 관련 '부적절 요구' 의심

조사단은 이 문서 중 청와대 이병기 비서실장이 재판과 관련해 부적절한 요구를 한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즉 이 비서실장이 자신의 최대 관심사인 한일 우호관계 복원을 위해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 사건에 대해서 대법원이 청구기각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전략' 문건 일부.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 사건이 무엇이 길래 대법원과 청와대의 재판 거래 대상으로 거론된 것일까. 현재 신일본주금 주식회사(구 상호 ‘신일본제철 주식회사’, 이하 ‘신일본제철’)에 대한 대법원 2013다61381 사건과 미씨비시중공업 주식회사에 대한 대법원 2013다67587 사건이 대법원에 계류 중인데, 앞 사건을 중심으로 재판 거래 의혹을 의심할 만한 사정이 있는지 살펴보자.

일본기업 "제철소 기술 습득" 공고 뒤 지원자 강제노역 시켜

원고 여운택은 1923년생으로 만 20살이 된 1943년경 평양에서 오사카제철소의 공원 모집 공고를 봤다. 2년 간 훈련을 받으면 기술을 습득할 수 있고 훈련 종료 후 한반도의 제철소에서 기술자로 취직할 수 있다는 공고내용에 끌려 일본제철 주식회사(이하 ‘구 일본제철’)의 모집담당자와 면접을 보았고, 합격하여 오사카제철소에서 노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술습득과는 관계없는 위험한 노역에 종사하면서 한 달에 1, 2회 외출 외에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제대로 된 식사도 제공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임금전액을 받으면 낭비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 등으로 동의도 없이 일부 용돈 외의 나머지 임금은 강제적으로 예금됐다.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경찰이 자주 들러 ‘도망치더라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말했고, 기숙사의 감시인이 도망가고 싶다고 한 사람을 구타하기도 했다. 

1944년 2월 일본은 훈련공들을 강제로 징용했고, 여운택은 징용 이후에는 용돈도 지급받지 못했다. 오사카제철소 공장은 1945년 3월 미군 공습으로 파괴되어 훈련공 중 일부는 사망하고 여운택을 포함한 나머지 훈련공들은 1945년 6월 우리나라 청진에 건설 중인 제철소로 이동했다. 기숙사 사감에게 임금 통장과 도장을 요구했지만 돌려받지 못했고, 청진에서도 하루 12시간 동안 공사를 하면서도 임금을 전혀 받지 못했다. 1945년 8월 이후 제철소가 공습으로 파괴되고 일본이 패전하여 구 일본제철이 더 이상 강제노동을 시킬 수 없게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일본은 회사경리응급조치법 등을 만들어 1946년 8월 11일 오전 0시를 기준으로 회사의 계산을 구계정과 신계정으로 나누고, 그 이전에 발생한 구 채권은 원칙적으로 변제금지하고 예외적으로도 구계정에서만 변제할 수 있다고 정했다. 즉 전범기업의 채무를 이후 설립된 기업에 승계되지 않도록 법적으로 조치한 것이다. 구 일본제철은 1950년 4월 1일 해산하고, 그 자산은 4개의 회사를 설립하는데 출자되었는데, 이 중 2개의 회사가 합병하여 신일본제철이 되었다.

우리 정부는 1965년 6월 22일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청구권 협정’)을 체결하고 10년 간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를 무상 제공 받고, 2억 달러를 차관 받는 대신 양 국가 간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확인했다.

피해자, 한ㆍ일법정에 신일본제철 상대로 손배소 제기했으나 패소ㆍ기각

여운택은 1997년 12월 24일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임금 지급 및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2001년 3월 1일 패소했고, 2002년 11월 19일 항소도 기각됐다.

여운택은 포기하지 않고 2005년 2월 28일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함께 한국 법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서울중앙지방법원 2005가합16473호)을 제기했다. 구 일본제철이 원고들을 회유하여 일본으로 동원한 후 자유를 박탈한 상태에서 강제노동을 시키고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으므로, 구 일본제철의 후신인 신일본제철이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는 취지였다. 신일본제철은 이미 일본에서 동일한 내용의 소송이 패소 확정되었으므로 이 사건 청구는 기판력에 저촉되고, 일부 원고들은 일본에서만 강제노동을 했으므로, 대한민국에는 국제재판관할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청구권 협정 등으로 인해 원고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소멸했고, 피고 신일본제철은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승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08년 4월 3일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국제재판관할권이 없다는 주장은 배척했으나, 이미 일본에서 패소판결을 받은 원고들에 대해서는 패소판결의 기판력을 인정했다. 외국에서의 확정판결은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않을 경우 효력이 있는데, 일본에서의 패소판결은 신일본제철이 구 일본제철을 승계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서 국내에서도 효력이 있다고 보았다. 기판력이 문제되지 않는 원고들에 대해서 구 일본제철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면서도 일본판결과 마찬가지로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신일본제철이 승계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또한 부가적으로 위자료 청구권은 불법행위 시부터 10년이 지나 시효 완성으로 소멸했다고 보았다.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인해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했다.

대법원 "일제 불법 지배 중 법률관계 효력없다" 피해자 손들어줘

원고들은 항소했으나, 항소심 법원은 2009년 7월 16일 1심 판결을 그대로 원용하면서 원고들의 추가 주장만을 배척하여 항소를 기각했다. 그로부터 약 2년 10개월이 지난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취소한다. 먼저 대한민국 헌법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지배를 불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효력이 없다고 전제했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패소판결에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합법적이기 때문에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와 원고들에게 적용한 것이 유효하다고 평가한 부분이 있으므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 질서에 위반되어 승인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일본에서의 패소 판결은 국내에서 효력이 없다는 의미다. 

또한 일본법에 따르면 신일본제철이 구 일본제철을 승계했다고 볼 수 없으나, 국내 재판에서 일본법을 적용한 결과가 대한민국의 공서양속에 위반되면, 법정지인 대한민국의 법률을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구 일본제철의 재산, 임원, 종업원을 실질적으로 승계한 신일본제철은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승계했다고 판단했다. 덧붙여 청구권협정이 개인의 불법행위 청구권을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고, 원고들은 이 사건 소송을 제기할 때까지 대한민국에서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으므로 소멸시효도 완성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일본측 상고 뒤 대법원 5년째 '검토중'... 박근혜 정부 외압 의혹 

이후 서울고등법원은 2013년 7월 10일 대법원의 법률적인 판단을 인용하여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1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신일본제철은 2013년 8월 13일 상고했는데, 2015년 6월까지 총 5차례 상고이유서 및 상고이유보충서를 제출하였을 뿐 그 이후로 3년 동안에는 서면 공방이 없었다. 대법원은 2014년 6월 10일 주심 대법관을 지정하고, 다음날 상고이유 등 법리검토를 개시했다고 하였으나, 2016년 9월 5일 여러 관련 사건들을 통일적이고 모순없이 처리하기 위해 검토 중이라는 내용을 공시하였을 뿐 5년 가까이 판결을 선고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인 원고 여운택씨는 2013년 사망했다. 대법원은 5년째 관련된 강제징용사건을 검토중이다. KBS 뉴스 캡쳐

새롭게 판단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피고는 수백 장의 상고이유서를 제출했으나, 법률적 쟁점은 전과 동일하다. 여러 건의 유사 사건이 있다 해도 법률적 쟁점 판단을 굳이 모든 사건이 대법원에 계류되었을 때 내려야 할 이유도 없다. 앞의 대법원 판결이 잘못된 것이라면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서 판례를 변경할 수 있을 것이나, 이 사건은 전원합의체에 회부된 것도 아니다. 다만 대한민국 외교부는 2016년 11월 29일 외국의 경우 국가 간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할 수 있다는 입장이고,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할 경우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내용의 자료를 제출했다. 당시 정부에서 원고들의 승소를 바라지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법원은 상고법원 도입이라는 목표를 둔 상황에서 정부의 방침에 반대되는 판결을 선고할 수도 없고,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해서 대국민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도 없어서 아무 조치 없이 시간만 보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원고 여운택은 2013년 12월 사망했다. 대법원 2013다61381 사건과 대법원 2013다67587 사건의 원고 9명 중 7명이 판결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재판 거래는 없었다고 강변했으나, 합리적 이유 없이 권리 구제를 미뤘다는 것만으로도 대법원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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