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북방식과 남방식 명칭으로 인한 오해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8.06.18 23:3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봄 햇살이 따사롭던 지난 5월 말 ‘강화 부근리 지석묘’를 찾았다. 주말을 맞아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고인돌을 감상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고, 나이를 불문하고 셀카봉을 든 이들도 많았다. 요즘은 에스엔에스에 사진을 올리는 것이 유행이어서 보고 즐기는 것이 목적인지, 사진을 찍는 것이 목적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 출처: 문화재청

인터넷에서 강화 고인돌을 검색하면 대뜸 나오는 것이 ‘강화 부근리 지석묘’여서 강화에 고인돌이 이것 하나인 줄 오해할 수 있지만, 달랑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부근에 40여 기의 고인돌이 있다. 1964년에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었고, 2000년에는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대형 탁자식 고인돌로 디지털 분석 결과 높이 2.8m,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6.7m, 너비 5.2m이고, 덮개돌의 무게는 55.2톤이다.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돌의 무게를 100kg으로 보았을 때, 대략 460명이 동원되었을 텐데, 460이란 숫자는 마을 인구 전체가 아니다. 1가구당 가족 수를 5명으로 보고, 한 집에서 1명씩 동원되었다고 가정하면 마을 인구는 2,300명이 되는데, 이로써 청동기시대 부근리에 이미 상당한 인구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강화도를 찾는 대부분의 탐방객들이 ‘강화 부근리 지석묘’를 보고 발길을 돌리지만, 강화도에는 더 많은 고인돌들이 있다. 주로 섬의 북쪽인 부근리, 삼거리, 신삼리, 하도리, 오상리, 교산리, 이강리, 신봉리, 창후리 등에 있으니, 조금 더 시간을 쪼갠다면 크기도 모양도 각양각색인 온갖 고인돌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강화에서는 현재까지 170여 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발굴이 계속되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고인돌’이란 이름은 덮개돌을 2~4개의 굄돌로 ‘고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석묘(支石墓)는 고인돌의 한자 이름이다. 일부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등 의식을 행할 때 제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죽은 자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고인돌은 세계 여러 지역에 분포하는데, 동서를 막론하고 사후 처리 방안에 대한 답을 ‘돌’에서 찾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돌은 강하고 단단해서 쉽게 부서지지 않고 썩지도 않는다. 무덤을 돌로 만들면 사자의 흔적을 오래도록 남길 수 있다. 그래서 돌을 선택했을 것이고, 지금도 고인의 시신을 모시는 곳에서는 매장이든 화장이든 돌을 많이 사용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여하튼 인간은 무언가를 남기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강렬했던 것 같다. 유럽 등지에서는 고인돌을 돌멘(dolmen)이라 부르니 ‘돌’과 ‘dol’이 소리가 같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북유럽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유럽의 영국에서부터 프랑스·스위스와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지중해의 북쪽 연안지방, 중동·인도·동남아시아 등지와 중국의 복건성(福建省)·절강성(浙江省)·산동(山東)반도·요동(遼 東)반도·길림성(吉林省)남부, 한반도 전역, 그리고 일본의 규슈(九州)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개의 굄돌로 윗돌을 받치고 있는 아일랜드 돌멘(고인돌, 왼쪽)과 거석문화의 중요 유물이지만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영국의 스톤헨지.

 

고인돌은 세계 여러 지역에 있지만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곳은 전체의 40% 정도로 무려 40,000여 기 정도를 소유하고 있는 한반도다. 그래서 한반도를 ‘고인돌 왕국’이라고도 부른다. 한국인들은 뭔가에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향이 있어 허구한 날 고인돌만 만든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고인돌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인구가 밀집해 살았을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에는 다음 4가지 형태의 고인돌이 존재한다.

① 탁자식 고인돌은 잘 다듬은 판석 3~4매를 땅 위에 고임돌로 세워 돌방을 만들고 주검을 놓은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모습이다.
② 바둑판식 고인돌은 땅 아래에 판석을 세우거나 깬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들어 주검을 묻고 땅 위에 고임돌을 낮게 놓은 상태에서 덮개돌을 얹은 모습이다.
③ 바둑판식 고인돌과 비슷하지만 고임돌 없이 덮개돌만 얹은 것이 개석식 고인돌이다.
⓸ 위석식 고인돌은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고 여러 매의 판석이 덮개돌의 가장자리를 따라 돌려 세워진 형태로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만 보인다.
- 문화재청, 『한국의 문화유산』

 

바둑판식과 개석식 고인돌이 많이 발견된 전북 고창. 출처:고창고인돌박물관

 

과거에는 한반도의 고인돌을 이야기할 때, 한강 이북에서 탁자식이 많이 발견되고 이남에서 바둑판식과 개석식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북방식과 남방식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런데 북방식과 남방식이라는 명칭은 남과 북이 서로 다른 문화권이었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

 

묘제가 다르다 → 다른 문화를 지닌 사회다 → 청동기시대 남과 북은 달랐다!

 

고창에서 발견된 탁자식 고인돌. 남방식은 바둑판식과 개석식을 일컫지만 남쪽에서도 탁자식 고인돌이 많이 발견됐다.

1960년대 중반까지 주로 한강 이북에서 탁자식이 발견되고, 이남에서는 개석식이 많이 발견된 탓이었지만, 그 후 황해도와 평안남도 지방에서도 개석식이 다수 발견되고,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탁자식이 발견되면서 탁자식·바둑판식·개석식 등이 남북에 두루 섞여 있음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에도 남북은 하나의 문화권이었다. 문자 기록은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만, 유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