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업적시스템, 수익성에 포획되다

  • 기자명 이경혁
  • 기사승인 2018.06.22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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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오락실의 하이스코어 보드, 그리고 업적

고전 비디오게임 시절에는 한 판의 게임이 끝나면 게임 오버 화면 이후에 스코어보드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알파벳 세 글자 정도의 입력이 가능한 스코어보드에는 주로 ‘AAA’같은 대충 누른 이름들이 꼭대기를 차지하곤 했는데, 한 판의 게임 결과가 점수로 환산되고 이를 통해 그 기계가 설치된 일대의 게임 실력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간혹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자신이 1위를 찍어 둔 스코어보드에 어느날 1위가 바뀌어 있는 걸 볼 때 불타오르는 경쟁심은 의외로 강력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요즘 게임들의 트렌드는 많이 바뀌어 과거와 같은 개별 오락기기의 스코어보드를 보기는 어렵다. 두 가지 변화가 함께 하는데, 일단 제한된 기회 안에 얼마만큼의 스코어를 얻느냐의 경쟁이 중심이 되는 게임들은 캐주얼 부문으로 국한되면서 과거보다는 보편성을 잃은 점이 있고, 또 하나는 그러한 캐주얼 부문의 게임들이 갖는 스코어 경쟁도 기기 단위가 아닌 서버 중심으로 이용자 전체 속에서의 점수 경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비록 고전적인 의미의 스코어보드 경쟁은 사라졌지만 그 의미만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스코어보드는 게임 내적 경쟁이 아닌 게임 외적 경쟁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한 편이다. 2인 대전의 형태처럼 게임 안에서 누군가와 대결하기보다는 게임이 끝난 결과를 취합해 비교하는 이 방식은 게임 외부에 존재하면서 게임의 의미에 한 층을 더 얹는 기능으로 자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스코어보드의 의미는 오늘날 좀더 확장된 모습으로 이어진다. 바로 업적 시스템이다.

PC게임플랫폼 ‘스팀’ 의 도전과제 예시화면. 게임 내 주요 퀘스트의 클리어 등을 통해 달성한 업적은 게임 안에서만 집계되지 않고 게임플랫폼 단위에서 수집되고 평가된다.

게임콘텐츠, 플랫폼에 보편화되기 시작한 업적 시스템

이제는 출시되는 거의 대부분의 게임들이 간단한 업적 시스템을 기본적으로 탑재할 정도로 업적은 게임의 새로운 요소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단지 게임을 시작했다, 첫 스테이지를 클리어했다 정도와 같은 간단한 업적부터 시작해 엔딩을 보기, 2회차 플레이 하기, 최고기록 갱신과 같은 일반적인 업적부터 숨겨진 요소 찾아내기나 정말 불가능해 보이는 난이도의 퀘스트를 달성하기와 같은 기발하거나 어려운 도전과제까지 다채로운 활동들이 업적달성이라는 보상을 위한 과제로 제시된다.

업적의 대두는 비단 게임 콘텐츠 안에만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각종 콘솔의 기본 시스템에서도 업적과 도전과제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수행과제들이 제시되고 달성여부가 기록되며 게재된다. 게임 콘텐츠 바깥의 플랫폼은 좀더 다채로운 업적과 과제를 다루는데, 게임 100개 보유하기나 도전과제 총 100개 달성하기와 같은 유형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각 플랫폼별로 업적 과제 자체가 통합되는 추세로, 예를 들어 ‘스팀’ 기반으로 출시되는 게임이라면 게임 안에서의 업적 달성을 스팀의 도전과제와 연계하여 카운트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업적의 활성화는 제작자나 플레이어 모두에게 나름의 긍정적 측면을 제공한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같은 자원을 들여 만든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더 많은 할 거리를 제공하는 기능을 붙이는 격이 된다. 같은 시간과 자원으로 만든 게임의 플레이 타임이 좀더 늘어나는 것이다. 한편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같은 값을 들여 구매한 게임에서 더 많은 도전과제를 만나게 되는 것이 게임에 마이너스 요소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업적 달성에 무관심한 플레이어도 적지 않지만 그러한 경우라면 신경 안 쓰면 그만인 것이고, 업적에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는 게임을 새롭게 플레이하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는 면에서 업적 시스템은 점점 공공의 인정을 받으며 게임과 함께 하는 새로운 요소이자 플레이 방식으로 자리잡아 가는 추세다. 그러나, 업적 시스템의 보편화가 반드시 긍정적인 측면으로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FIFA 온라인3의 업적시스템

게임 외적 요소였던 업적, 수익성에 포획되는 흐름들

업적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용자 입장에서는 주로 억지스러운 업적의 등장에 대한 불만이다.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 결제방식에 따라서는 막대한 추가 결제를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업적들이 무성의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주장들이다. 게임 플레이와 별 연관도 없는 주제를 업적 과제로 내걸거나, 플레이어로 하여금 무의미한 플레이 행동을 반복케 함으로써 콘텐츠 플레이 시간을 늘리려는 이른바 꼼수스러운 업적들은 플레이어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유도하는 경우들이다.

이러한 문제적 업적 과제들은 대체로 업적의 보상이 게임 시스템 안에 들어와버리는 경우에 주로 발생한다. 예를 들어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의 캐릭터 강화 등을 위해 필요한 장비나 게임화폐 등을 업적 달성시에 막대한 양으로 지급하는 구조이고, 이 업적의 달성이 살인적인 플레이 시간이나 막대한 현금결제를 통해 달성가능한 형태라면 이는 또다른 형태의 인게임 결제와 동일해지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업적은 본래 게임 외적인 요소였는데, 업적에 대한 보상이 게임 안에서의 어드밴티지가 되어버린다면 이 업적은 더 이상 게임 밖이 아닌 게임 안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또다른 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업적 시스템의 문제는 업적이 결국 비교와 경쟁을 자발적인 것이 아닌 타율의 무언가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대부분의 현대적 업적 시스템은 네트워크의 힘을 빌어 자신의 업적 달성도를 친구들, 혹은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타 플레이어들과 비교될 수 있는 가치로 만들고 이를 비교를 통해 드러내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적과 도전을 오직 자신만의 이유로 즐기는 플레이어들은 존재하겠지만, 플레이어의 도전이 일련의 방식을 통해 서열화되는 것은 플레이 자체보다 플레이 외적인 무언가로 자칫 게임의 중심이 이동할 여지를 만들 우려가 있다. 대전과 경쟁이 중심인 게임에서 탑 랭커를 차지하고 1,000회의 승리를 달성하는 것은 유의미하겠지만, 모바일 롤플레잉 게임에서 500회의 적 기지 약탈을 달성하는 것은 다분히 플레이로부터 파생된 도전이라기보다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무언가에 가깝다.

한 유저가 인터넷에 올린 스타크래프트2 업적 화면

나만의 도전, 나만의 성취도 우리에겐 소중한 업적이다

디지털 게임은 필연적으로 제작과 운영에 많은 인력과 시간, 자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경우 인디 게임 등을 제외하면 자본주의 대중문화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플레이어들이 여러 게임들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현금결제 유도에 반발하는 것은 디지털 게임이 비록 출신은 상품으로 시작했지만 그 지향점만큼은 체제의 틀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콘텐츠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수익을 만들려는 효율의 법칙에 충실하고자 하며, 이에 따라 수익화의 가능성이 있는 게임 내외의 많은 요소들을 최대한 시스템 안에 포획하고자 한다.

업적 또한 마찬가지로, 업적 시스템의 보편화 또한 그것이 수익성에 기여하는 바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태초의 개별 게임기계가 보유했던 스코어보드 또한 동네 친구들끼리 몇점이 최고기록인지를 묻는 과정보다도 그 재미가 새로운 도전을 불러 추가 수익의 창구가 된다는 점이 산업적으로는 보다 유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업적의 의미가 온전히 상업화에 잠식되어서는 안 되며, 또 그렇게 잠식될 리도 만무할 것이다. 게임 콘텐츠의 의미는 결코 제작자의 의도만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새로운 도전의 의미들이야말로 상업성 밖을 향하는 온전한 의미의 개별 플레이어들이 가진 도전과제이며, 어떤 의미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은 시스템이 통계로 내지 못하는, 나만의 도전에 따르는 성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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