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의 죽음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8.07.10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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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다섯 살 오래 살았다. 그는 어쩌면 내게 영원한 ‘치안본부장’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직함 치안본부장은 강민창이라는 이름과 뻣뻣한 레고처럼 강고하게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임기는 짧았다. 1986년 1월 10일 전두환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고 1987년 1월 21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직후 직위를 내려 놓았다. 그 1년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의 거대한 굴절과 용틀임이 준비되고 끓어오르던 시기와 기묘하게 일치한다.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

그가 왕무궁화 네 개를 달고 치안본부장에 올랐던 1986년은 아시안 게임이 열리던 해였다. 전두환 정권 내내 귀가 짓무르도록 노래를 불렀던 86 88 중 하나의 빅 이벤트가 드디어 코앞에 닥친 것이다. 6년 동안 떠들었던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경찰 총수가 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취임식에서 이런 코멘트를 내놓은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북괴가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등 양 국제적 행사를 앞두고 호시탐탐 대남 도발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10만 경찰은 북괴의 도발을 사전에 분쇄할 만반의 대공 태세를 갖추라.”
경향신문 1986.1.10, '학원 소요 안보차원서 엄단'

경찰이 무슨 공수부대쯤 되는 것 같다. 강민창은 자신을 경찰 부대의 사령관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전두환 시대 경찰의 위상은 검찰을 위압할만큼 드높았으니까. 그리고 또 한 번 당연하게도 ‘북괴’에 동조한다고 상정되는 이들에 대한 단호함이 뒤따른다. 

“일부 좌경학생과 시국불만자들이 연계된 집단 시위 등 사회적 안정을 해치는 행위에 단호히 대응하라.” 

그러나 그에게나 전두환에게나 1986년은 그리 만만한 해가 아니었다. 전두환의 5공화국은 정권 말기로 치달았고 광주의 핏자국에서 움튼 민주화의 불길은 들불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이른바 민주화 운동 진영은 이제 전두환에게 눈의 가시 정도가 아니라 눈두덩에 뿌리내린 나무였다. 전두환은 강민창을 민주화의 들불을 진압할 소방수로, 민주화의 나무와 가지를 조각 조각 잘라내는 도끼로 쓰고자 했다. ‘경찰은 조직이 생명’이라는 신조를 지녔다는 강민창은 그 요구에 성실하게 부응했다.

그의 1년 임기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꼽아 보면 새삼 놀랄 것이다. 5공화국 최초로 도시의 중심가가 시위대에 장악된 5.3 인천 사태, 부천서 성고문 사건, 지금도 미스테리로 남은 김포공항 폭발 테러 사건, 유성환 의원 “반공이 국시가 아니라 통일이 국시” 파동, 10.28 건대항쟁, 그리고 금강산 댐 사건, 그리고 박종철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초국가적 공안정국. 박종철 고문 치사의 주범으로 옥살이한 조한경 경위의 회고에 따르면 치안본부만 해도 공안 수사반 40개, 안기부와 보안사까지 합치면 근 100개의 공안 전담반이 움직여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물 먹이고 두들겨 패고 돌아갔다. (신동아 2000년 1월호, 박종철 고문경관 12년만의 회한토론) 그 모든 격동의 중심에 강민창이 있었다.

강민창의 공안 집착은 엉뚱한 사건에서 드러난다. 1986년 여름, 강남 서진 룸살롱에서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술 먹다 조직 폭력배끼리 시비가 붙어서 패싸움이 벌어진 끝에 ‘연장’을 들고 나타난 신흥 세력이 강남에 터잡고 있던 조폭 조직원 4명을 황천으로 보낸 것이다. 그들은 사당동의 한 정형외과 앞에 시신을 던져 놓고 사라져 버렸다. 영화 같은 이야기. 유명한 서진 룸살롱 사건이다. 이 사건 후 전국 조직폭력배 일제 소탕을 지시하는 와중에 강민창은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조직폭력배 사건을 대공적 차원에서도 수사하라.” 훈시 듣는 경찰들도 적다 말고 고개를 들었으리라. 응? 본부장님? 무슨 말씀?

“국제 정보 교환 체제를 강화하고 특공대를 배치, 조총련 등 불순분자의 국내 잠입과 항공기 탁송화물을 가장한 불법무기류 국내 반입을 철저히 봉쇄, 테러 활동을 방지하라.” 
경향신문 1986년 8월 21일, '"폭력소탕" 60일 비상 근무령'

이즈음 국내 조폭들이 야쿠자들과 거래를 트고 교분을 나누며 의형제를 맺는다 어쩐다 우습게 놀고 있었고 일본도 등이 일본으로부터 들어오기도 했는데 그 지점에서 강민창은 ‘대공적 차원의 수사’를 상상해 냈고 ‘조총련’과도 연결시키는 상상력을 보였던 것이다.

조직폭력배 사건에서도 대공 취약점을 발견하는 치안총수의 공안에 대한 불타는 의지는 성고문 사건 때에도 빛을 발했다. 이때 인천 지검은 나름 의욕적으로 경찰이 터뜨린 이 목불인견의 참사를 파헤쳐 보려고 했다. 그러나 ‘관계기관대책회의’ 후 검찰은 위에서 떨어진 수사 보고서를 읽어야 했고 검사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분노했다. (정의감도 있었겠지만 경찰에게 엿먹일 기회 놓치고 되레 엿을 먹어야 했던 상황이 분통 터졌으리라) 성고문은 없었고 ‘가슴을 툭툭 친’ 가혹 행위가 있었다고 정리됐고 문귀동이란 경찰은 일단 파면됐다. 이때 치안본부장의 코멘트.

“문경장이 의욕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다가 강압수사를 한 사실이 드러나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동아일보 1986년 7월 17일, '검찰 "성적 모욕 없었다" 발표'

자르긴 자르겠는데 강압수사의 원인이 ‘의욕적인 업무 수행’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경찰들을 잘 교육시키겠다고 다짐(?)하긴 하지만 그 ‘의욕’을 절대로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욕적으로 하되 말 안 나오게 해라. 의욕적으로 하되 말썽없게 하라는 교육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경찰들이 1987년 1월 박종철을, 혐의자도 아니고 수배자도 아닌 박종철의 머리를 물 담긴 욕조에 담그는 만용을 부릴 수 있었을까.

1986년 10월 건국대의 애학투련 결성식에서 건국대학교에 그물을 놓고 수천 명의 대학생이 그 안에 들어가 뻐끔거리기를 기다려 단번에 그물을 들어올려 버렸던, 그래서 1281명이라는 기네스북감의 구속자를 양산했던 사람이 강민창이었다. 그 이름도 어마어마한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의 명명자도 강민창이었다. 이거 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강민창은 이렇게 대답했다.

“공산혁명분자라고 지칭한 것은 이들이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반대하고 공산정권 수립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으며 이를 달성키 위해 사회 각계에 침투해 공산당 방법으로 혁명을 하려고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1986년 11월 5일, '건대사태ㆍ금강댐 대책추궁'

일찍이 신민당의 개헌 추진 대회를 무대로 일어난 5.3 사태에 대한 질의 응답 후 여당 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신민당 주장은 허구로 가득차 있다, 진실은 영원하다. 나는 내 직위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라도 감히 말하겠는데 신민당 주장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고 기염을 토하던 그는 신민당의 서울 지역 개헌 추진 대회를 ‘원천봉쇄’한다. 원천봉쇄와 발본색원은 그 이전에나 이후에나 강민창의 입에서 떠난 적이 별로 없었다. 그 가팔랐던 1년 동안.

1988년 1월 16일자 경향신문

그를 영원히 역사에 기록되게 할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망발을 남겼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작 혐의로 구속되고 집행유예로 석방된 이후 강민창은 경찰 내부에서도 그 소식을 잘 모를 만큼 은둔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어느 시골 바닥에서 소를 키운 것 같지는 않은 게 2001년 임기 3년의 진주 강씨 종친회장으로 당선된 기사가 검색된다. (동아일보 2001.3.30, 강민창 안동향우회장) 그 이전에는 안동 향우회장이었다. 그 외의 대외 활동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석방된 것이 1988년 내가 대학교 1학년 때였으니 그 후로 근 30년을 대한민국의 격동을 지켜보며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 모두를 지켜보면서 그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위 신동아 인터뷰에서 조한경 경위는 자신들이 빌라도처럼 예수를 죽이면서 역사를 바꾸고, 또 역사에 악인으로 남은 신세가 아닌가 하고 푸념했다. 그도 그랬을까.

그가 죽어 역사에 묻히기 전에 그 퇴로를 ‘원천봉쇄’하고 독재자의 수족으로서 자행했던 과거를 ‘색출’하여 죄과를 밝히고 그 변명의 근거를 ‘발본색원’하는 노력을 ‘의욕적으로’ 전개해야 했으나 끝내 강민창은 그 모든 것을 안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죽은 자 앞에 원수 없다 했으니 명복은 빌어 줘야겠다. 그러나 그 업보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립묘지에 간다면 한바탕 논란이 일겠다 싶었지만 안동의 선영에 묻힌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안동의 꼬장꼬장한 유림 조상들이 그의 종아리를 가만 두지 않기를 기대한다.

잘 가시라, 나의 치안본부장. 강. 민.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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